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한국개혁신학회 전 회장,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3. 칼빈의 예배 신학이 무시되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칼빈 연구서들이라 할지라도 칼빈의 예배신학을 전혀 취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칼빈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구자 자신들의 필요한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의 사상과 활동을 활용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부분의 칼빈 연구가들이 목회자가 아니라 조직신학 교수들이거나 역사학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 수많은 칼빈 신학자들은 현장에서 목양에 헌신하는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일생 동안 목양 헌신한 칼빈의 노고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지식적인 것들에만 집착해서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 스콧 클락 교수는 칼빈의 예배 원리들과 목회적 유산들을 피상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칼빈 연구서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첫째는 필자가 한글로 번역한 책, 프랑스와 방델의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은 학술적으로 매우 뛰어난 칼빈 연구서이다. 그러나 이 책은 칼빈의 초기 사상적 뿌리를 인문주의에 두고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경건 신학이 예배를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에라스무스를 능가하는 유식한 인문주의 신학자를 만나게 되지만, 결국 경건한 예배자 칼빈을 만나지는 못하게 된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예배를 재구성하고, 열정적으로 이를 관철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둘째로, 최근에 나온 칼빈 연구서에서도 역시 비슷한 현상이 반복된다. 마땅히 책의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 『요한 칼빈: 헌신, 교리, 그리고 송영을 위한 심장』이라는 책이 칼빈 탄생 5백주년에 즈음해서 출간되었다. 칼빈의 경건과 순수한 기독교 신학을 검토한다는 관심은 좋았으나, 열정적이고, 절실한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립하고자 노력했던 예배의 원리들, 예배의 갱신과 정착에 관한 노력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셋째로, 스콧 클락 교수는 칼빈의 예배 원리들과 경건한 목회적 방편들을 검토하고 연구하는 것이 일부 현대 저명한 칼빈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신학사상 중에 하나로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일부 칼빈 신학자들 자신들이 오히려 현대인들의 절박한 요구사항들을 왜곡한 측면이 강하다. 다우이 교수는 미국에서 “1967년 신앙고백서” 작성을 주도한 신학자인데, 칼빈을 하나님의 말씀과 실존적 만남을 달성한 신학자로 묘사했다. 다우이는 칼빈의 신학사상에다가 그의 지도교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대입한 것이다.

넷째로, 최근 많은 사회 사상사와 지성사(history of intellectuals) 학자들이 빚어낸 칼빈 연구서들 속에서는 예배를 갱신하고, 정착시키려 했던 칼빈의 경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에서 칼빈 시대의 자료들을 취합하여 저술한 것으로 관심을 모은 꼬뜨레의 칼빈 연구서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방법론을 따라서 근대적인 인물이 세상을 마법에서 깨어나게 하였다고 해석했다. 현대 칼빈 연구자들의 접근 방법이나 새로운 해석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성경에 명령된 방법에 따라서 예배를 올리고자 하는 칼빈의 일관된 예배 원리가 취급되지 않는다.

다섯째, 그렇다면, 기독교 예배학 교과서에서나 혹은 종교개혁 시대의 예배를 다루는 저술들 가운데서는, 칼빈의 예배 신학이 바르게 정립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나 안타까운 수준이다. 일부 예배학 교수들은 칼빈의 예배 신학을 후기 종교개혁자들의 전통과 대립적으로 서술해 놓았다. 만일 칼빈이 성경 안에서 허용하는 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자유함을 가르쳤다고 한다면, 정작 그가 가장 반대했던 “개인적인 주관주의”를 주장하는 자로 변질시키게 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받아주실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어떤 것을 용납하실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그분에에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성경 안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신 분이시다.

휴즈 올드는 칼빈의 예배론을 비롯해서 개혁주의 전통에 대해서 많은 저술을 발표한 학자이자, 목회자인데, 악기 사용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은 설명을 내놓았다. 칼빈은 시편찬송을 보급하였고, 예식적 예배순서에 삽입했지만, 악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하지난 올드의 연구에는 전혀 이러한 설명이 없다. 칼빈은 시편 주석에서 예배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 악기들은 고대 사회에 성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보았다.

올드는 칼빈이 프랑스어로 편집된 시편 찬송 만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올드에 의하면, 칼빈이 자신의 교회에서는 시편 찬송만을 사용하되, 다른 지역 교회들이 시편 이외의 찬송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용납했고, 성경보다는 어거스틴과 크리스소스톰의 권고를 따라는 것이라서, “선호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과소 평가했다. 이처럼 현대 신학자들의 예배학이나 칼빈 연구가 첨예하게 다른 입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정밀한 연구가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