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모 로셀리 Cosimo Rosselli 산상설교와 나병 환자의 치유 Sermone della Montagna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가 코시모 로셀리(Cosimo Rosselli, 1439-1501)의 ‘산상설교와 한센병 환자의 치유(Sermone della Montagna)’. ⓒ위키피디아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태복음 8:6-7)”.

신약성경에는 한센병(나병) 환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 거라사 지방 귀신들린 자 등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는 중풍병 걸린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치는 장면과,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레위기 14장에는 한센병이 나은 후 정결 의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한센병이 다 나았을지라도 스스로 깨끗함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정결 의식을 치러야만 언약 백성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정결 의식은 먼저 첫날 진영 밖에서 산새 두 마리를 바친 후, 몸의 털을 모두 밀고 목욕을 하고 난 후 진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7일 동안 자기 집에서 격리 후 일곱 째 날 다시 털을 밀고 목욕을 했으며, 8일째 양 두 마리(속건제와 속죄제)와 암양 한 마리(번제), 그리고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성막에 바치는 의식입니다.

이 부분은 당시 가난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정결 의식 규례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은 그 양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이 미치는 대로 바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인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은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 선민사상에 너무 깊게 물들어 있었기에, 예수께서 이방인의 병을 고치신 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이라면, 누가와 요한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전도를 위해 기록된 성경이지만 복음은 결코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열국의 모든 잃어버린 족속과 나라와 민족, 병마로 고통 받는 자와 소외되고 가난한 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 모두를 찾으시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알고 있지만, 예사로 흘러 듣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과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빈부 격차와 차별에 대한 평등과 정의 실현을 넘어, 하나님의 자비를 한층 더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자색 옷을 입은 부자의 문밖에 있어, 부자의 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했습니다. 부자는 본인만을 위해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았기에 벌을 받고, 거지 나사로는 고통과 고생만 가득했으니 안식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사고를 넘어,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의 나라가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자는 언제나 이웃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소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음부에 내려간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을 끔찍이 챙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밖에 있던 거지 나사로는 외면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가족들만 챙기는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이웃 사랑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풍요를 넘어 영적 충만의 완성입니다. 참 행복은 재물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오롯이 모든 선과 사랑과 자비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에게 허락된 재물이 본인만을 위한 행복에만 사용됨에 만족하며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나사로는 자신이 기댈 곳은 오롯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만을 위해 사용돼야 합니다. 외면이 아닌 함께, 소유가 아닌 나눔이라는 선택에 분명한 주님의 뜻이 있음을 우리 스스로 진정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참된 구원을 얻을 것이며, 천국을 차지하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스스로 이웃을 배려하면서 산다고 자처하며 자랑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진심 없는 배려는 쓸모없는 휴지조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섬김은, 의로움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필요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로움은 돌아가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좋은 상태로 되돌아가고, 인류가 다시 한 번 참 좋은 상태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조화로운 계획의 완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조화가 충만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 온갖 형태의 불평등과 차별을 없앨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구원, 곧 사랑의 복음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본질적으로 모든 이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변방에 사는 이들이 우선시될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수많은 노동자들도, 고용주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수많은 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이 함께 건설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고용주와 노동자들도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신분을 잊은 채 하인의 고통을 감내한 채 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며 고통스러운 문둥병을 치유케 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툭 하면 머리에 빨간 띠를 띠고, 시위나 파업을 넘어 파괴까지 일삼으며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은 이제 삼가고, 고요한 대화와 미소로 노사관계를 이룰 때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물질이 풍부하다 해서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고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절대 안 됨을 교훈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노동자들도 자신들만을 위한 노조활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민들이 노사관계로 피해를 입는 사례는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 일의 목표는 가정과 이웃,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회사를 파괴하거나 이웃에 피해를 주는 일은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파업과 파괴로 인한 손해는 노동자들이 모두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같은 OO노총 등은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오직 노동자와 고용주가 머리를 맞대고 순수하게 대화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기업을 이끌어가는 고용주는 노동자들을 가족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진심이 담긴 사랑의 표현으로 함께 대화하며 소통해야 합니다. 특히 노동자들은 정치로부터 분리돼 자유로워야 합니다. 기업이 어려울 때는 한 마음으로 기업 이익 증진에도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에게 다가가 달콤한 유혹으로 꼬드기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들 역시 권력 앞에 무너지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자신의 기업을 위해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아름다운 일터에서, 고용주들과 함께 웃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들을 연출하는 노사관계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의 모습과 부자의 어리석은 행동을 거울 삼아, 기업의 고용주들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깊은 사명을 깨닫고, 선한 백성들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