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며 상실감 사로잡혀 있는 작품 속 인물들
광야 같은 위기 일체의 우아함과 고상함 포기해
고통받는 사람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것 웅변
새로운 하나님 받아들일 때만 원래 자리로 귀환

최진희 광야에 서다
▲광야에 서다, 최진희, enameled, kiln cast glass, 2019

작가들은 주로 인체를 바라볼 때 물리적인 대상, 곧 피사체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인간을 사물을 관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어떤 감정도 이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이와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F. 밀레와 반 고흐는 ‘다정한 이웃’으로, 조르주 루오와 요세프 이스라엘스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상처 투성이의 동료 인간’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인간을 사물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고락을 함께하는 동시에, 삶의 유혹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존재로 나타난다는 특징을 지닌다.

최진희의 <광야에 서다>에서 인물들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쳐다보거나 바닥에 앉아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슬퍼하며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다. 인물 주위는 거칠고 울퉁불퉁하여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소망도 없어 보인다. 시선을 한군데 정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것은 불안한 눈빛을, 고개를 숙인 포즈는 슬픔과 절망의 수위를, 바닥에 엎드린 것은 그에게 어떤 실낱 같은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광야’에 있으며,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광야’란 말은 문자 그대로 사막지대요 불모의 지대를 일컫는다. 유대 광야를 방문했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광야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양떼를 보고 “이곳 양들은 돌멩이를 먹고 산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사막에서 먹이를 구하는 양떼의 모습을 마치 여기저기 흩어진 돌멩이들을 먹고 사는 무리처럼 보았던 것 같다.

광야란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의지로는 살 수 없는 곳, 그러니까 절대자의 손길이 요청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광야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일체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포기하였다. 우아함과 고상함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지켜지지만, 수렁에 빠진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상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그의 작품에 실망감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진희 광야에 서다
▲광야에 서다, 최진희, enameled,kiln cast glass, 40x110cm(each), 2019
<광야에 서다>는 작가가 겪은 일에 기초한 것으로 작가의 진심이 아로새겨져 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던 광야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고 통곡하고 있을 때 더 이상의 길도 보이지 않고 지쳐 있었을 그때에 나는 그곳이 광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작가노트).”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우리의 한계를 경험하는 지점이 바로 광야임을 실감하게 된다. 고온에서 구어낸 유리 속에 갇힌 인체는 숨이 막힐 정도로 밀폐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비참함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비참함은 어느덧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침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수천 명이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숨지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다. 날마다 마을 하나만큼의 인구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남겨 둔 채 세상을 떠난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수히 많은 고난이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더 큰 긍휼로 이끌어 주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비극을 외면하거나 일시적인 사건으로만 축소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왜 이 비극이 일어나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의문을 던지는 것은 일리가 있다.

요셉이 형들로부터 마른 우물에 던져져 살려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신 걸까? 그러나 생각을 더 넓혀보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형들이 아우를 종으로 팔아버리지 않았더라면, 요셉을 포함하여 가족은 재난과 죽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일이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엡 1:11-12)”의 소산인 것이다.

물론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이 글의 취지는 아니다. 우리가 최진희의 <광야에 서다>에서 살펴볼 과제는, 왜 굳이 실의의 구덩이에 빠진 인물들을 형상화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괴롭고 슬픈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감정을 자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교감의 수고가 필요한 시기가 바로 누군가 곤경에 빠졌을 때이다.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사 42:3)”고 언급하였다.

사람들은 구제불능의 죄인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었으나, 예수님은 되레 이들을 선악의 피안에서 불쌍하게 바라보셨다. 작가는 그같은 마음으로 동료 인간을 섬겨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정신이야말로 역대의 위대한 기독교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섬김의 정신이며, 평범한 눈으로 보아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정신이다.

우리가 세상의 고통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그것에 반응하지 못한다면, 중요한 그 무엇이 고장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예술가는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진술하지 않지만, 정직하게 그 핵심을 꿰뚫는다. 최진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눈을 돌려 종전에 보던 시각과는 다르게 볼 것을 역설한다. 미의 고상함을 희생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을 파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그들에 대한 공감,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 죄많은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파커 J. 파머(Paker J. Palmer)가 “낯선 사람들과 서로 관계를 맺을 때 좋은 사회의 직물을 복원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조언하듯, 타자에 대한 공감은 더 깊은 인간 이해의 첩경이 된다.

최진희 생기를 불어넣다
▲생기를 불어넣다, 최진희, Enameled, Blown Glass, Acrylic on Wood Panel, 98x98cm, 2019
<생기를 불어넣다>는 유리 안에 얼룩진 인체 이미지가 들어 있는 부조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유리 공예에서는 일정한 모양 또는 완벽한 형태를 추구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형태가 길쭉하기도 하고 찌그러져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무언가 결여된 존재, ‘망가지고 상한’ 인간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작가는 하나님의 생기(生氣)로 창조된 인간은 ‘그토록 오래되었으면서도, 늘 새로운(Augustinus)’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만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즉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음을 나타냈다.

작가는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삶의 공간을 ‘구속의 시그널’을 발견할 수 있는 적지(適地)로 판단한다. 막상 그 곳에 들어가면 혼란과 딜레마에 휩싸이기 쉬우나, 시련과 역경이 전부가 아니다. 그곳은 역설적으로 ‘언어와 논리가 힘을 잃은 곳’이요 ‘새 생명’을 얻는 곳이다.

작가는 이렇듯 광야 체험이 새 삶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