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한국개혁신학회 전 회장,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다시 한 번 종합적으로 평가하건대, 칼빈은 종교개혁의 성취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예배의 개혁을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항으로 간주하였다. 중세 말기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를 시행했는데, 회중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진행되었기에,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예식은 성경 말씀의 제시와 성만찬의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제단의 사제가 중심이라서 일반성도들에게는 종교적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미사는 구원의 신비를 시행하는 핵심적인 예식으로서, 대속의 재현으로서 십자가의 희생을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칼빈의 예배 개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은 모든 예배의 전체 내용들과 항목들을 성경에 따라서 온전하고도 순수하게 구성하였다:

실제적으로, 칼빈은 교회 건물을 정화시켰는데, 모든 종교적인 형상들과 상징물들을
제거했다. 심지어 십자가마저도 그 어느 곳에 내걸지 않았다. 칼빈은 성경봉독과
설교를 회중들이 이해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예배의 중심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그는
성경에 없는 의식들과 예식 절차들을 모두 폐지했다. 또한 칼빈은 예배에서
음악적인 악기들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회중들이 시편 찬송을 부르도록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했으며, 하나님과의 만남이
깊이 있게 이뤄지는데 예배의 중심이 위치하도록 이끌었다.

성경에 나오진 않는 문장들 중에서, 칼빈이 공식적인 주일 예배에 채택한 것은 “사도신경” (the Apostles’ Creed) 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도신경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대하여 역사적인 고증이나 정확한 증거가 없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고백서는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문구가 성경내용과 별로 차이가 없다. 사도신경은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유익한 기능을 하고 있었으므로, 종교개혁자들이 채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첫째로,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예배의 내용들을 결정하는 원칙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공예배는 설교, 기도, 성례가 중심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그가 실현한 예배의 원천적인 개혁은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둘째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부터 제네바에서까지, 칼빈의 예배개혁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예배 의식들이 진행되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깊이있게 인도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칼빈의 신학사상에 기초한 탁월한 안목이 반영되어져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사역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성도들은 그 말씀 앞에 반응을 한다는 “대화적 구조화”(Dialogical organization)이다.

예배는 인도자가 시편 124편 8절,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을 낭송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죄의 고백으로 나아간다. 스트라스부르크에 있을 때에는 이 기도를 드린 후에, 칼빈이 사죄의 선포(the absolution)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에서는 목회자가 이러한 선포를 하지 못한다고 금지 시켰다. 예배 중에는 오직 시편 찬송만을 회중들이 부르게 하였다. 다른 도시에서 다소 예외적인 찬양곡의 사용하다라도 칼빈은 묵인했다.

1542년에 제네바에서 칼빈이 출판한 예배의 내용들과 항목들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오전 예배 순서와 크게 차이가 없다. 최종적인 예배 의식서는 1545년 6월 10일자로 출간되었는데, 1542년에 제정된 예배 내용들과 비교해보면, 별로 큰 차이는 없다. 전쟁이나 흑사병과 같은 상황에 따라서 찬송이나 기도의 순서가 약간 변경이 있었다. 주일 오후 예배와 주중에 실시되는 예배에는 회중을 위한 목회 기도가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공예배 순서와 내용들:
기원
고백과 기도에의 부름
사죄의 확신
찬송
순종에 대한 기도
기도 (주기도문이 포함됨)
찬송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설교
기도 (다른 성도들을 위한 간구가 포함됨)
주기도문의 해설
찬송
축도 (신명기 6:24-26)

칼빈은 예배의 예식적 순서와 질서를 개혁하되, 말씀에 따라서 전통적인 예식들을 철폐하였고, 객관적이며 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된 성경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은혜와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올려드렸다고 말할 수가 없다. 형식은 갖췄으나, 과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이뤘느냐가 남아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역사하여만 가능한 것이다.

위의 순서에는 성례가 생략되어 있는데, 설교 후에 성례를 집례하였다. 칼빈은 성례가 “눈에 보이는 말씀들”이라고 설명한 어거스틴의 저서를 많이 인용했다. 성례는 오직 주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풀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세례는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실시하거나, 혹은 주중 예배에 설교 직후에 평범한 물을 사용했다. 소금이나 기름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성만찬은 한 주 전에 미리 충분한 준비를 하도록 안내를 했다. 자녀들도 합당한 신앙 교육을 받았고, 신앙고백을 했으면 동참케 하였다. 여행자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는 미리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제공했다. 칼빈은 성만찬이 가치있는 감사의 예배가 되도록 강조했다. 고린도 전서 11장 23-26절을 중요한 지침으로 가르쳤다. 성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성도들이 스스로 살펴서, 성찬을 받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도록 준비케 하라는 사도의 가르침을 실행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우리의 믿음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는데, 주님의 만찬은 병들고 가난한 성도들에게 주는 치료약과 같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소망을 둔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우리도 또한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 칼빈은 성만찬에 참석한 성도들이 “마음을 들어올려서”(Sursum Corda, lift up our heart) 천상의 영광 중에 계신 주님과 함께 교통하며, 거기로부터 내려 주시는 영적인 생명을 얻도록 촉구했다.

칼빈의 예배개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배의 개혁은 내적인 경건과 긴밀히 연결 되어지는 바, 칼빈은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참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며, 경건을 실천을 하고 있다고 격려하였다. 특히, 매 예배 시간마다, 칼빈은 철저히 성경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는 매우 진지한 강해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을 양육하고 설득해 나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신앙고백을 확신하도록, 예배의 중심에 위치한 설교시간에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개혁된 예배에 참여함을 통해서, 성도들은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던 미사를 완전히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성도들은 차츰 교황청이 조장해온 성자와 성물 숭배, 마리아 찬양 등 각종 미신들과 무지한 관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성례에 참여한다거나, 혹 죽은 성자들이나 살아있는 성직자들이 관여함으로 얻을 수 없다는 점을 터득하게 되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첫 목회 사역을 시작할 때로부터 삶을 마감하기까지 평생 동안에 가장 관심을 갖고 몸부림쳤던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를 정착시키는 일이었다. 종교개혁의 여러 부분들 중에서도, 제네바에서만큼은 교회의 독립성을 확고히 정착시키면서, 공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목양 사역의 내용들을 성경에 따라서, 사람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정립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로 인해서, 첫 번째 제네바 교회의 로마 가톨릭적인 관습들을 폐지하려다가 저항하는 시의회 권세자들로부터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칼빈은 예배에서 중심에 설교를 복원시켰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에서 시행하는 것을 완전히 폐지하는 예배행위였다. 강단에서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집행하는 예식을 통해서 속죄사역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가 중심적 행동이 되도록 하여, 단순하면서도 순결한 예배가 정착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제네바 교회에서 목회자로 헌신하면서 성취한 업적들 중에서, 오늘날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부분이 바로 칼빈이 예배 원리를 정착시킨 노력들과 그 성공적인 열매들이다. 그의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연구가 있으나, 예배의 원리를 바로 세우고, 시편 찬송을 보급하면서 공예배를 회복한 노력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다. 우리가 주일날마다 공적인 예배의 핵심내용들로 채택한 것들은 거의 대부분 칼빈이 제네바 교회의 예배 시간에 성취한 유산들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가 로마 가톨릭과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한 것처럼, 우리들도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죄인에게 내려주시는 충만한 은총을 체험하도록 노력해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과 펜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전 세계 교회는 모이는 공적인 예배를 폐지하는 등, 극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서,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하여 바치는 예배가 송두리째 무너져 버린 너무나 안타까운 현상이다.

둘째로, 칼빈이 예배 개혁이라는 과제를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시행이라는 구조적 이해가 항상 담겨 있음에 유의하게 된다.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놀라운 비밀들을 깨우치게 되는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이시며, 동시에 상호 교류와 상호 임재 가운데서 구원의 경륜적 사역들을 펼치고 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에서 전혀 소홀히 취급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근본적으로 설정하고, 강조했다 (요일 5:5-8).

참된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작동한다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칼빈은 성경을 통해서 터특한 바, 항상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성경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중세 말기 신학과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라는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을 인하여 감사, 찬양, 기도, 헌신, 순종이 가능하게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순종의 첫 단계는 전심을 다하여 예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종교개혁의 본질이자 핵심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 교리를 주창한 루터의 투쟁으로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유럽 각 지역 교회들에서 종교개혁에 가담한 성도들이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예식들을 거부하며 동참하지 않음으로 확고히 정착되어 나갔다.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면서, 개혁주의 진영의 최선두에서 교회의 예배 갱신을 정립한 목회자가 바로 칼빈이다.

오늘날 공적인 예배가 갖가지 변형된 형태로 개방된 나머지, 예배의 원리와 중심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을 목격하게 된다. 칼빈의 예배 신학의 원리들이나 그 적용사역들이 점차 희미하게 되고 말았다. 지금은 교회의 예배에서 무엇을 어떻게 갱신할 것인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대단히 안타까운 것은 칼빈의 예배 신학이 전혀 중요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는 오직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다는 기본적인 성경의 명령과 지침을 벗어나서, 사람들 중심으로 변질하였다. 차츰 사람들의 각종 종교적 욕망들을 채워주는 쪽으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현대식으로 갱신되었다고 하는 예배에서 “체험을 강조하는 주관주의”와 “인본적인 자율주의”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이러한 예배의 원리들은 거의 아랑곳하지 않는 경향이다. 일종의 음악 행사가 되거나 특수한 설교자의 돋보이는 공연 쪽으로 기울어져서,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예배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들의 여러 가지 부족함들을 채워주는 방편들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예배원리 등은 진지하게 살피는 성찰이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현대 예배의 문제점은 부패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각 개별 성도들의 요구들이 반영되어서, 하나님께서 금지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이 그토록 경계했던 양 쪽의 극단들, 하나는 거대한 로마 가톨릭 조직의 형식적인 미사들, 또 다른 하나는 “주관적 유연성”(flexvility of subjectivism)을 강조하는 개인적 성향들로 채워진 예배가 성행하고 있다. 철저히 하나님께만 올려야 할 경배는 사라지고,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너무나 지나치게 유연하고도 자유로운 순서들이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 채, 공적인 예배 시간에 실현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