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매오가 겪어야 했던 인생
1. 먹을 것 없어 항상 배고픔
2. 항상 무시당하고 거절당함
3. 희망과 소망이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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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의 ‘바디매오를 고치시는 예수님(The Healing of the Blind of Jericho, 1650)’. ⓒ크투 DB

마가복음 10장 46-52절에 기술된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여리고에 사는 소경이자 거지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리고는 많은 사건과 이야기를 담은 보고이다. 그중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압권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순간적인 행동이 매우 이상했다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름대로라면 그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여리고의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지내는 신세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아마 가족에게도 버림을 받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처량한 인생이 없다. 그럼에도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 왜 그의 간청을 못 들은 척하시며 바디매오의 애간장을 녹였을까?

거지의 인생이 어떤 것인가? 첫째, 먹을 것이 없어 항상 배고픈 사람이다.

자기 힘으로 밥을 먹을 능력이 없어 빌어먹어야 한다. 그래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배고파 죽을지언정 빌어먹고 살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 배고픔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런 소리는 한가하게 들린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어 도둑 안 되는 이 없다’고 했듯이, 사람에게 배고픔은 최고의 고통 중 하나이다.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겐 자존심 운운할 여유가 없다. 이어령은 자신의 암 투병을 기록하면서 전두엽으로 기억하는 고통과 자신의 척추뼈로 직접 겪는 고통의 차원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고백했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거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사람이면서 사람 노릇을 못하고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는 이가 거지다. 그러니 아무나 거지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거지에게 자존심 운운하는 대신에, 지금 당장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물에 빠진 자를 앞에 두고 물에 빠진 이유를 논하며 입으로 떠드는 쓸개 빠진 한량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논객이 바로 ‘정서 살인자’이다. 인지심리학자인 김경일은 단언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외면하는 이를 일러 ‘나르시스트’ 혹은 ‘소시오패스’라 한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흉부에 와 닿지 않는가? 당신이야말로 지독한 이기주의자임과 동시에, 공동체 사회를 허무는 파괴자일 것이다.

둘째, 거지는 사람들로부터 항상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산다. ‘무시받았다’는 느낌은 미묘하게 기분을 나쁘게 한다.

보통 사람은 가끔 이런 기분을 느끼지만, 거지는 이런 느낌을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가진다. ‘무시한다(ignore, neglect)’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간과한다’ 혹은 ‘방치한다’이다. 우리가 간과당하고 방치당할 때,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특히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상대방이 거의 반응하지 않거나 늘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도 나를 간과하는 행동이다.

무엇보다 이런 무시를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당하다 보면, 모든 무시나 간과가 일상적으로 무기력한 현상으로 고착된다. 유명한 마틴 셀리그만의 ‘무기력 학습(learned helplessness)’ 실험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자신의 무기력한 한계 상황을 딛고, 오랜만에 가장 간절히 외치고 싶었던 목소리로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예수님은 짐짓 못 들은 척하시며 그를 외면했다.

되레 사람들은 그를 보고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 말에는 ‘이분은 너 같은 자를 돌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고 무시하는 속내가 깔려 있다.

셋째, 거지에겐 희망이나 소망 같은 단어가 없다. 밤새 추위에 떨다 날이 밝으면 오직 얻어먹는 일이 전부다.

잠자는 곳도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을 뒤덮은 옷은 이미 옷이 아니라 거죽이요 덮개일 뿐이다. 씻지 못한 몸에는 기생충이나 벌레가 동거한다. 얼마나 악취를 풍기는지 모든 이가 코를 막고 지나친다.

거지는 자신의 삶을 회복하거나 개선할 기회조차 차단당한 완전한 ‘루저’이다. 인생에서 자포자기보다 위험한 일은 없다. 한 인간이 자기를 포기하는 일은 목숨만 부지한다는 것이지 다른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저 죽지 못해 산다.

죄악된 세상에 길들여져, 현실에 끌려다닐 것인가?
바디매오처럼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릴 것인가?
응답이 없으면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이 귀 아프시게!

그런 바디매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주님이 오신 것이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불렀다. 영어 성경은 이때를 그냥 ‘소리쳤다(cry out)’고 표현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외면했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는데, 모르는 척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귀찮게 여겼다. 어떤 이는 발로 툭툭 차면서 비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에겐 이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더 크게 소리쳤다. 영어 성경은 이 소리를 ‘cried out all the more(더욱 크게 소리지르다)’이라고 표현했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그를 돌아보셨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시험하고 싶으신 거였다. 바디매오가 과연 이전처럼 사람들의 무시 앞에서 잠잠할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간절하게 주님께 간구할 것인지를 알고 싶으셨다.

그래서 처음엔 짐짓 못 들은 척하셨지만 온 힘을 다한 바디매오의 절규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향해 “안심하고 일어나라”고 하셨고, 이에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일어나 뛰었다.

한국교회 사정이 좋지 않다. 여러 통계조사의 결과의 지표들이 어둡고 불투명한 미래를 예측한다. 신앙의 열기는 식어버렸다. 신자들이 앞서서 목회자를 비롯한 사역자들을 비웃으며 세상 사람을 닮아간다. 그 사이에 세상은 더욱 죄악된 곳을 치달린다.

세속주의에 함몰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복음을 회피하고 산다. 그 정도라면 견딜만하다 하겠지만 서울은 이미 소돔이다.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공개화되었다. 겉으로만 복음의 옷을 입고 다니는 듯한 주일 신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주위 사람들이 ‘잠잠하라’, ‘당신만 기도할 줄 아느냐’고 윽박지르고 핀잔을 준다. 지금 우리가 바로 바디매오 신세다.

이제 우리도 선택해야 한다. 죄악 된 세상에 길들어져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끌려다닐 것인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절규하며 하나님께 매달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 하나님께 의지하라. 응답이 없으면 더 큰 소리로 외쳐라. 하나님의 귀가 아프게 소리쳐라. 아멘.

최더함 박사(Th.D/역사신학, 바로선개혁교회)
▲최더함 목사. ⓒ크투 DB

최더함 목사
마스터스 개혁파총회 설립준비위원장
마스터스 세미너리 책임교수, Th.D.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바로善개혁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