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서기관 전통, 신약 탈무드나 마소라로 이어져
예루살렘 벤 시라 가문, 서기관 학교 운영 추정돼
외경 집회서 기록, 안티오쿠스 4세 폭정 강력 대항

벤 시라 서기관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벤 시라.
3) 신약시대의 서기관

구약시대에도 서기관 양성 학교가 있었고, 유대 왕국이 무너진 후에도 이 전통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비록 이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적 증거를 볼 때 구약시대의 서기관 전통이 신약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후에 탈무드나 마소라(Masorah) 전통에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1) 벤 시라(ben Sira)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는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없어졌기 때문에, 서기관 학교는 국가가 아닌 유명 서기관 개인 혹은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라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서기관이 바로 B.C. 180년경 제사장 겸 서기관이었던 벤 시라(Jesus ben Sira)입니다.

서기관 훈련을 받은 그는 율법 전문가였으며, 서기관 학교 교사이기도 하였습니다(Sir 51:23). 당시 유대 문화를 활짝 꽃피웠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그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자 서기관이었던 예루살렘 벤 시라(Ben Sira of Jerusalem)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외경(즉 가톨릭 제2경전)에 있는 ‘집회서(Book of Sirach; Ecclesiasticus)’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서기관 가문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가문은 일종의 사립 서기관 학교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서기관 학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시기에는 제사장 계급(사두개파의 뿌리)과 더불어 서기관들도 상류층을 형성하였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제사장 그룹을 비롯해 포도주 판매상, 목수, 무두쟁이, 날품팔이 노동자 등 실로 다양한 계층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공한 서기관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스스로 돈을 벌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율법에 열심이었으며, 특히 유대 전통을 파괴하려는 셀루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의 폭정에 강력히 대항하였습니다.

‘마카비 혁명(B.C.167-164)’을 주도하였던 ‘경건한 자들’ 중심에는 바로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평민 출신인 이들은 이후 장로, 현인, 랍비 등으로 불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이들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습니다.

서기관 안티오쿠스
▲안티오쿠스 4세가 발행한 동전.
관대함 중시 바벨론 출신 힐렐 학파, 손자가 가말리엘
율법 해석 매우 엄격했던 샴마이 학파가 주도권 장악
율법 보전·실천, 교육, 재판관, 신학자, 성경 필사 역할

(2) 힐렐 학파(Hillel School)와 샴마이 학파(Shammai School)

성경에 정통한 서기관들은 실로 다양한 그룹에 속하여 있었습니다. 대체로 평민 출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하여 있었고, 제사장 출신 서기관들은 사두개파에 속하여 있었습니다(막 2:16; 행 23:9).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유대 전통을 고수하였지만, 사두개파 서기관들은 유대교와 헬레니즘 문명의 동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외에도 에세네파 같은 그룹에 소속되어 그 그룹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서기관을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특정 그룹과 연관시키지 않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크게 인정받는 집단으로, 또 다양한 업무와 다양한 계층을 가진 집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서기관의 고유한 가능은 문서 작성과 관련된 것으로 서기관들의 신분은 결국 기록을 원하는 권력 집단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즉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등 각 집단의 필요나 요구에 따라 서기관들이 중용되거나 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기관은 집단으로서보다는 각 개인의 능력과 관심에 따라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것 같습니다.

몇몇 서기관들은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반면 권력에서 소외된 서기관들은 끼니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지도자 그룹에 속하였던 서기관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기관은 힐렐과 샴마이입니다. 힐렐 학파의 창시자인 힐렐은 바벨론 출신으로 날품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 사는 가난뱅이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빈곤과 역경을 체험한 그는 친절함과 관대함을 중요시하였으며, 율법 해석에도 이를 반영하여 성경과 전통 사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요세푸스
▲요세푸스 초상화.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힐렐 학파 교장이자 힐렐의 손자였습니다. 힐렐학파의 특성은 가말리엘이 산헤드린에서 한 연설에 잘 드러납니다(행 5:17-42).

사도들이 산헤드린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자, 공회원들이 반발합니다. 이때 가말리엘은 다음과 같이 사도들을 옹호하는 변론을 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반면 샴마이 학파의 창시자인 가나안 출신 샴마이는 율법 해석에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한 예로 어느 이방인이 샴마이를 찾아와 “율법이 무엇인지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설명할 수 있으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하였을 때, 샴마이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즉 수많은 율법은 각각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이지. 짧게 요약하는 것은 율법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들은 힐렐은 “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율법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황금률(마 7:1-2)’과 유사함을 보이는데, 힐렐의 가르침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소극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적극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이 주도하는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는 서로 반대되는 성경 해석을 통하여 오랫동안 경쟁하여 왔으나, 주로 산헤드린을 장악한 샴마이 학파가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A.D. 70년 산헤드린이 사라지면서 힐렐 학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후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는 힐렐 학파의 성경 해석을 선택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는 주로 성경의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들입니다. 이 학교에서 서기관을 양성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율법, 문학, 예절, 윤리, 경건함 등을 누구나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즉 고대 이스라엘의 폐쇄적이고 엄격한 서기관적 전통을 일반인에게도 개방하였던 것입니다.

이 학교 출신들이 모두 서기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기관들이 이 곳에서 가르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보다 전문적인 상급 서기관 양성 학교는 따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이 유대교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공관복음에도 ‘서기관’이라는 단어가 모두 57회나 나타납니다. 이 중에서 21번은 제사장과, 또 18번은 바리새인들과 연관하여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을 공격한 핵심 그룹이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파의 지도자격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많은 논쟁을 벌이는 그룹이었으며, 예수님도 이들에 대하여는 모두 7번이나 저주하는 것을 마태복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마 23장).

이처럼 신약 시대에 나타난 서기관 역할은 구약시대의 서기관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중심 역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①율법의 보전과 실천 ②율법 교육 ③재판관 역할 ④율법을 연구하는 신학자 역할 ⑤성경 필사.

이처럼 서기관의 역할이 구약시대와 달랐던 것은 국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서기관의 역할이 왕국 운영에서 율법 분야로 축소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로마 마카비
▲유대-로마 전쟁 승리 후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하는 로마 군인들 부조.
70년 헤롯 성전 파괴, 율법 중심 종교 생활 관심으로
실천 중시 바리새파, 지도자로서 중심적 지위 차지해
랍비 유대교 조상 바리새파, 미슈나와 탈무드 집대성

(3) 유대-로마 전쟁 이후

A.D. 66-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132-135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패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두 전쟁을 통하여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보게 된 유대인들은 전쟁 패배로 인한 끔찍한 참상을 바벨론 이후 다시 한 번 몸소 체험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모든 정치적·군사적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였습니다.

대신 종교 생활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A.D. 70년 헤롯 성전이 파괴되어 더 이상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도 유대인들의 종교적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상황 속에서 성전 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한 종교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미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이들은 ‘성전 없이도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기도’ 중심의 종교 생활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가 이 전통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은 법궤 없이 재건된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 성전과 같은 온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는 속죄일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비록 절기는 지키더라도 하나님과 대제사장 사이에 교통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바벨론에서 행하였던 율법 연구와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졌을 때, 성전 제사와 병행하여 ‘율법 연구와 실천’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가 세운 이러한 전통은 이후 헤롯 성전 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 온전히 ‘율법’에만 초점을 맞추는 생활을 하던 바벨론의 전통이 다시 시작된 것은 바로 A.D. 70년 유대-로마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성전은 다시 불에 타 없어졌고, 성전을 무대 삼아 활동하던 (제사장들을 포함한) 사두개인들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다시 ‘율법과 기도’에 초점을 맞춘 종교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변화 속에서 홀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율법 실천’을 중시하는 바리새파였습니다. 이들은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조상으로, 기원, 사회적 신분, 유대교를 보는 입장 등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핵심인 율법을 독점함으로써 향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다질 수 있었습니다.

유대-로마 전쟁 이후 유대 전통을 중시하는 율법학자들은 주로 갈릴리 또는 바벨론 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결과로 A.D. 200년경 구전 율법을 모아 놓은 미슈나(Mishnah)가 편집되었습니다.

또 A.D. 400년경 미슈나를 더욱 확대하여 편집한 예루살렘 탈무드가, A.D. 550년경 바벨론 탈무드가 집대성되어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사다 열심당원 마카비 이스라엘 헤롯 멸망
▲열심당원이 최후 항전을 펼친 마사다 요새.
예수님 십자가 못박아 죽인 민족으로 후일 핍박받아
서기관 성경 필사 및 사용법 전통 혹은 규칙, 마소라
원문 잘 보존하고 정확한 발음 구사, 원어 성경 기준

4. 마소라(Masorah) 전통

(1) 마소라 전통의 출현

이후 서기관들(즉 율법 전문가인 랍비들)의 활동은 기독교와 관계없이 때로는 기독교와 경쟁자가 되어 율법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왔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민족’으로 지명되어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마 27:25). 이렇게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들은 물리적 저항 대신 더욱 더 율법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율법 연구가 유대인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서기관 전통이 미슈나-탈무드 시대를 거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세계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마소라(Masorah) 전통입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원어 구약 성경은 마소라 전통 덕분입니다.

‘마소라(Masorah)’는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규제하는 ‘전통 혹은 규칙’을 의미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성경 원문을 필사하고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일체의 것을 통제하는 규칙’을 의미합니다.

모세나 솔로몬 같은 성경 원저자가 썼던 원고 자체가 현재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이 오랫동안 원칙 없이 필사를 통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방치하다 보니 수많은 종류의 버전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성경 권위에 손상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소라 전통은 자음으로 이루어진 성경 원문에 붙여진 모든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이전 성경이 자음으로만 되어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이 달라지고 또 이에 따라 의미가 다른 단어로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오류를 막기 위하여 개발된 마소라 전통은 본문 옆 여백에 쓰여진 ‘참고 설명’이나 본문 위/아래에 붙여진 ‘엑센트’나 ‘모음 기호’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율법 해석은 랍비 유대교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성경 원문이 충실히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소라 전통의 목적은 원문을 잘 보존하여 더 이상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에는 정확한 발음도 포함됩니다. 정확한 ‘모음’과 ‘엑센트’가 보존되어야 본문도 정확하게 보존될 수 있게 됩니다.

마소라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마소라 전통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 원어 성경의 기준이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전통은 단순히 문법이나 교정뿐만 아니라 단어 발생의 빈도, 단어 의미나 철자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본문의 보존을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계속>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