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메소포타미아에선 세분화된 행정 업무에 종사
이스라엘 서기관은 행정 업무뿐 아니라 성경 필사도
당대 지적 분야 최고 엘리트, 왕궁과 가까운 권력자

서기관 에스라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서기관 에스라.

3. 이스라엘에서 서기관의 역할

1) 서기관의 존재

히브리어 ‘소페르(סֹפֵר)’와 헬라어 ‘그라마테우스(γραμματεὺς)’는 모두 문자적으로 ‘기록하는 사람’, 즉 오늘날 비서(Secretary)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혹은 주인)이 입으로 불러주면 이를 문자로 기록하는 자들이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 비서처럼 왕의 지시와 질문에 수시로 대응을 해야 했던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기록과 보존이었습니다.

거대한 문명을 이루었던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선 서기관들이 왕궁이나 신전에서 세금 수납, 군역 부과, 국제 관계 조약, 민간 업무 등 세분화된 분야에서 세분화된 행정 업무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 레위인, 서기관 등 여러 직책의 역할이 서로 중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는 왕국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관장 업무가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소국이라 업무가 서로 중복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에스라로, 그는 제사장이었지만 동시에 모세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이기도 하였습니다(스 7:6, 12). 유대인들은 에녹(에녹1서 92:1), 모세, 엘리야도 서기관이었다고 믿었습니다.

서기관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있었고(대하 34:13; 스 7:12), 유다 가문에도 서기관이 있었습니다(대상 27:32). 이처럼 재능을 필요로 하였던 서기관은 신분 제약이 없었으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서기관 직분이 가족을 통하여서도 ‘서기관 종족’으로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대상 2:55).

다른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서기관의 역할도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이는 서기관의 수요가 왕궁이나 성전에 이르기까지 국가 기능 전반에 걸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2장 10절에 보면 ‘왕의 서기관’이 대제사장과 더불어 성전 재산을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서기관’은 서기관의 우두머리로, 마치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서기관이라 해서 반드시 성경을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나 왕을 위하여 문서를 기록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제2성전 시대(스룹바벨-헤롯 성전 시대)’ 들어, 기관의 역할은 행정기관뿐 아니라 일반 백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즉 성문 앞이나 시장에서 수수료를 받고 개인간 상거래 문서를 작성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서기관 애굽
▲애굽 서기관 학교 모습을 담은 벽화.

이런 점들을 볼 때 서기관들은 당대의 지적 분야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엘리트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힘은 최고의 권력이 나오는 왕궁이나 신전과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업무가 백성들 개인간 사적 문서와 관련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서기관의 입김은 상당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서기관의 역할이 크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성경의 기록과 보존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성경이 문서로 기록되고 모아지는 과정에서 서기관들이 끼쳤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비교적 잘 보존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왕궁 문서 기록 및 보관 책임 중요한 위치
성경도 기록하고 보존, 현인으로서 왕의 스승 역할도
시편, 잠언, 전도서 등 지혜 문학 수집해 기록 남겨

2) 구약시대의 서기관

(1) 서기관의 중요성

구약 시대에는 성경 외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서기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내용들을 기반으로 하여 추론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왕국에 여러가지 직책들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군사령관, 사관, (대)제사장, 서기관 등 주요 직책을 맡은 인물들이 열거됩니다(삼하 8:15-18).

또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신하로는 (대)제사장, 서기관, 사관, 군사령관, 지방장관의 두령, 궁내대신, 노동 감독관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왕상 4:1-6).

히스기야 통치 시절 예루살렘을 침공한 앗수르 장군들이 왕에게 강압적으로 대화를 요구할 때 왕 대신 왕궁 책임자, 서기관, 사관이 협상 상대로 나갑니다(왕하 18:17-18).

이런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듯, 다른 중요한 직책들과 마찬가지로 서기관도 왕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서기관이라 함은 ‘왕의 서기관’, 즉 서기관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왕궁 모든 문서의 기록과 보관을 책임지는 자였습니다.

이들이 다루었던 문서에는 일반 행정 문서는 물론이고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현인(Wise Men)’으로서 왕의 스승 역할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대상 27:32).

서기관 히스기야
▲히스기야 터널 가운데 기록되어 있었던 비문.

히스기야 터널 비문, 라기스 편지 등 기록 발굴도
예레미야 예언 받아적은 그의 제자 ‘바룩’도 서기관
서기관 학교 존재 암시하는 구약성경 구절도 존재

(2) 서기관의 양성

거대한 문명을 형성한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선 필요성과 활용 범위에 따라 서기관 학교가 아주 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소국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에서 서기관 학교가 어느 정도 체계화돼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고, 따라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성경도 서기관들이 어떻게 양성됐는지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킵니다. 그러나 전문 지식을 가지고 방대한 문서를 다루는 것은 몇몇 개인이나 가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도 이런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할 수 있는 인재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서기관 학교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것 같습니다.

서기관 학교의 존재 근거로 자주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을 들고 있는데, 지혜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은 과거의 문서나 선진 외국의 문서를 모두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대표적인 지혜 문학인 ‘잠언’을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비록 규모나 질에서는 떨어질지 몰라도 왕궁이나 성전 중심 혹은 가족 중심 서기관 학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다윗과 솔로몬의 글이나 그 밖에 따로 전해져 내려오는 지혜 문학 등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그 중 남아있는 것이 시편, 잠언, 전도서 등으로 추정됩니다.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는 지혜 문학에도 이들과 유사한 내용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나아가 이런 서기관 학교의 존재를 암시하는 성경 구절이 몇 개 있습니다(사 28:9-13, 50:4; 잠 22:17-21). 이 구절들에는 서기관 학교에서 학문(지식, 진리, 지혜 등)을 가르치고 기록하고 전수하는 모습들을 연상시키는 표현들이 발견됩니다.

비록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이런 표현들이 가능했던 것은, 서기관들이 성경 기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실체들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큰 도시에는 서기관 학교들이 있었고, 또 여유 있는 집안의 자제들은 이곳에서 커리큘럼에 따라 정기적으로 읽고 쓰기를 배웠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터널 비문, 게젤 달력, 라기스 편지 같이 큰 도시에서 발굴되는 기록들은 그 지역의 서기관이나 제자들이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은 것도 ‘서기관 바룩’이었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었을 뿐 아니라(렘 36:4, 18), 예레미야의 예언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으며(렘 36:32), 또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예언자 행세를 하기도 하였습니다(렘 36:6-15). 이는 서기관 바룩이 바로 예레미야의 제자였음을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부터 서기관 학교 본격 출범 추정
바벨론에서 귀환 에스라, 제사장보다 서기관 중시
성전 회복됐으나 대제사장 지성소 법궤 사라져서?

(3)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에서 서기관 학교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종교 생활에서 중심이 되었던 솔로몬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난 뒤, 바벨론에서 ‘희생 제사’ 대신 ‘율법 연구’의 전통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는 서기관들이 율법 해석의 전문가로 ‘현인(Wise Men)’ 대접을 받았습니다.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바벨론에서 제사장 대신 성경 전문가인 서기관의 역할이 커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서기관의 삶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분명해지는 것은 에스라 때입니다. B.C. 459년 제2차 포로 귀환 때 율법 전문가로 돌아온 에스라는 제사장인 동시에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서기관(스 7:6, 12)”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서기관 훈련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서기관 애굽
▲애굽의 서기관 학교 모습.

에스라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 가르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스 7:10)”입니다. 즉 에스라는 제사장의 역할 보다는 서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보여주는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 종교 생활이 바벨론 포로 시대 전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에스라가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성전은 회복되었으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인 지성소 법궤가 사라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속죄소에서 이루어졌던 하나님과 대제사장 간의 소통이 이제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대신 회당에 모여 율법을 연구하고 기도하기에 힘쓰다 보니, 그것이 전통이 되어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서기관 에스라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책무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수시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강론했으며, 이방 여인과의 혼인처럼 율법에 어긋난 행동들을 모두 고치도록 하였습니다.

에스라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을 양성하여 각 지역마다 돌아다니며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노력은 이후에도 꾸준히 계승돼, 신약 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순서로 마카비 혁명을 주도한 ‘경건한 자들’, 바리새파, 랍비들이 율법 해석 전문가로서 에스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라기스 성경 서기관
▲도기 조각에 기록된 라기스 편지.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