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김주환, 한 편의 드라마 만들어가는 세상
<삶- 축제>, 수많은 군상 정교하고 수준 높게 완성
인물 형상 오려붙이는 작업 30여 년 전부터 지속해
그에게 축제란 숙제나 계산 등 멈추고 영혼의 긍정
군집으로 소통과 어울림 표현, 힘 되는 공동체 가치
김주환의 그림을 주목하게 된 것은 2017년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을 찾았을 때였다. (물론 그전에도 작가는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다.)
화면의 수많은 군상을 정교하고 수준 높게 완성시킨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가 성실한 작가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전시로 작가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근 몇 년 사이 그동안 재직하였던 교직에서도 퇴직하고 서울에서 양평으로 이사하는 등, 신변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근작을 관람할 기회가 생겼다. 경북 예천 신풍미술관(2022. 7. 19- 8. 19)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양평 서종면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신작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매일 오늘을 만난다. 먹고 잠을 잔다. 말하고 침묵하고 울고 웃기도 한다. 다양한 만남을 경험한다. 호흡하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각양각색의 무늬를 띠는 삶을 표정을 ‘삶-축제’의 놀이마당인 화면으로 초대한다.”(작가 노트)
김주환이 <삶- 축제>를 테마로 작업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인물 형상을 오려붙이는 작업을 근 30년 가까이 지속해 왔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에, 이 테마를 고수해 오지 않았나 싶다.
그에게 ‘축제’는 숙제나 계산 등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축제에는 목적이 없다. 우리는 축제가 열리는 동안 정신 없는 일상과 일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영혼의 긍정적인 움직임을 표현해 준다.
그의 작업 과정은 바탕과 표면의 두 차원에서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작가가 작업을 할 때 바탕을 구축하는데, 이때는 스톤미디엄을 붙이거나 물감을 흩뿌리는 독특한 수법을 사용하여 화면에 표정을 준다. 바탕이 오래된 암석이나 토양처럼 자연스럽다.
인체 이미지가 두드러진 표면은 일일이 가위로 오려낸 것으로 각 인물의 동세와 움직임이 다르다. 작가는 이들을 ‘노니는’ 사람들로 부르는데, 수많은 인체를 자르고 붙이는 과정이 힘들지 않느냐고 하자 오히려 즐겁다고 한다.
김주환은 인체 이미지를 나타낼 때 판화의 실크스크린 기법처럼 천에 물감을 투과한 후 남겨진 부분을 살리는 수법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몇 년 전부터 밋밋하던 배경에 표정을 불어넣은 등의 미세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새롭게 관목과 숲도 눈에 띄는데 이것은 양평으로 이주한 환경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외견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전의 <삶- 축제>와 현재의 <삶- 축제>가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도처에 모여 있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장소에서 만나는 모습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바는 무엇일까? 그 실마리를 우리는 화면의 정황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림에서 여러 인물들은 무개성한 군상(群像)처럼 보이나, 실은 각 사람이 각기 다른 움직임을 취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숨은 그림을 찾듯이 이야기를 찾아내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림이다.
화면을 보면, 주위 사람들과 차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고 연주도 즐기고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요리하고 빨래를 널며 김장을 하고 화분을 가꾸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그런가 하면 공사장에서 일하고 출퇴근을 서두르는 직장인들의 모습,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일정한 목적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별 것 아니게 여겨온 것들이 각별하게 다가온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근래 우리 사회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사람들을 맘 편히 만날 수 없었다. 반면 온라인 네트워크와 SNS의 발달로 점점 더 비대면 소통이 급증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미디어가 발달해도, 그것이 직접적 만남의 장점을 대신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정보는 전달할지 모르나 사람들 사이의 따듯한 마음결까지는 전달하기 어렵다.
작가는 군집(群集)의 형태를 빌어 소통과 어울림을 말하고 싶다고 한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활발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표상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고 의미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공동체에 대한 소중함을 키우도록 북돋아주는 것 같다.
한국 사회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 생긴 문제 중 하나는 ‘능력주의’를 미덕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의 가치를 가르치는 대신,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출세를 주문하였다.
관계와 공감능력보다 과업을 얼마나 괄목할 만하게 완수하였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로 인해 개인화는 거침없이 촉진된 반면 ‘함께 하는 삶’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졌다.
김주환의 작품은 ‘함께 하는 삶’을 지지한다.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즐기기도 한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시간을 같이하면서 삶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삶이 멈춘 자리에서만 이웃의 동정을 살필 수 있다. 상대와의 대화와 표정을 통해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 삶의 교차로에는 슬픔과 고난으로 심한 교통체증을 일으키지만, 만일 슬픔과 고통을 당할 때 위로해 주고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축복인가?
존 던(John Donne)의 시 “어떤 인간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에서)라는 말처럼,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에 속해 있으며 ‘대양’에 속해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알려준 대로 세상의 선을 자라나게 하는 일은 어느 정도 역사에 남지 않는 보편적 행위들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만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낸 사람들의 덕분인지 모른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작가는 우리 삶이 어떤 위기를 맞더라도 ‘축제’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공감 스위치를 작동시킬 때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리라.
주어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일컫는 ‘축제’라는 효소가 작품의 의미 내용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이웃에 대한 의미와 나눔의 가치를 더욱 배양시켜 주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김주환에게 타인을 익명의 객체로 보는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다.
요컨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고락을 같이하며 멋진 세상을 꿈꾸는 것이 그의 작품의 요체이다.
일상의 굴레에 갇혀 종종 놓쳤던 문제로부터,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한 발상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