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트위터
저명한 메시아닉 쥬(예수를 믿는 유대인) 변증가이자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 칼럼니스트인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 박사가 최근 “교회는 ‘트럼프 2024’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Is the Church ready for Trump 2024?)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당신이 트럼프를 싫어한다면, 이 기사의 목적이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트럼프를 좋아한다면, 이 기사가 그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점은 도널드 트럼프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다.

우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잠재적 대권 도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그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우리의 윤리와 기독교인으로서의 증거를 타협하지 않은 채 온전한 상태로 남을 수 있는가?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의 많은 긍정적인 성취 속에서, 많은 부분 미국교회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가?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책임은) 그가 아닌 우리에게 있다.

결국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거칠고, 굴욕적이며, 때로 논쟁을 벌이고, 때로 불쾌하고, 나르시스트적이며, 부유한 뉴욕 사업가에서 정치인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들은 그가 변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바로 그가 우리가 뽑은 인물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자신의 성격을 유지했으며,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매우 놀라운 점은, 그가 아주 많은 훌륭한 일을 했고 보수적인 기독교적 기초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는 점이다. 그것이 예외적으로 눈에 띄는 일이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끊임없는 반대와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양의 선행을 했다.

그러나 그가 바뀌기를 바라며 그에게 투표했는데 그가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투표할 때 감수한 위험 또는 계산이다. 그는 그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계속 그러할 뿐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를 일종의 정치적 구세주로 칭송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때로 조잡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얕잡아보고 조롱하면서 이를 즐긴 점 또한 우리의 잘못이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문자 그대로 그를 혐오하며 열정적으로 분열한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그를 변화시킨 것보다 그가 우리를 더 많이 변화시켰다는 사실, 우리의 소셜미디어 페이지 중 일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공격 사이트로 보이는 것도 우리의 잘못이다.

그 사람은 우리가 선택한 인물이며,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의 부정적인 특성으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다.

비유하자면 그가 재임해서는 농담, 특히 더러운 농담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러운 농담으로 유명한 코미디언을 선출한 것과 같다. 그는 농담을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다시 말하지만 그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더러운 농담에 웃기 시작했다. 더 나쁜 것은 우리가 스스로 반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이클 브라운 박사.
▲마이클 브라운 박사. ⓒhttp://askdrbrown.org.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출마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을까?

2018년에 출판된, 트럼프 관련된 나의 첫 책에서 “복음주의자들과 도널드 트럼프: 천국에서 맺은 약속인가 지옥과의 결혼인가?”라는 주제로 한 장을 할애했다. 2020년에 출판된 내 두 번째 트럼프 관련 책 제목은 “우리는 트럼프 테스트를 통과할 것인가?”(Will We Pass the Trump Test)이다.

‘트럼프 테스트’라는 말은 “트럼프에게 투표하면서 기독교인의 증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트럼프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한 ‘아니오’이다.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로서 (힐러리 클린턴이나 조 바이든에게 투표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트럼프에 대한 우리의 투표를 쉽게 정당화할 수 있지만,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와 연합한 방식은 우리의 증언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우리의 증언에 상처를 입힌 것은 트럼프에 대한 투표가 아닌 트럼프 지지자로서 우리의 행동이었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육신적인 행동, 선거에 대한 집착, 사람을 과도하게 높이는 것, 서로 다름으로 인해 상대를 야만적으로 몰아붙이는 것, 거짓 예언을 따르는 것, QAnon 음모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기보다 트럼프 지지자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를 지켜보는 세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러한 분열의 최전선에 서서 트럼프를 반대하는(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얻기보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더 집중했다.

그러나 우리를 맹목적으로 공격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첫 번째 책에서 난 일반적으로 정치, 특히 트럼프와 우리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7가지 우선순위를 나열했다. 그리고 이 경보를 울리는 유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 책에서 난 교회를 위한 10가지 더 많은 우선순위를 나열했는데, 모두 중대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후 나온 신간인 ‘교회의 정치적 유혹: 수백만 명의 미국 기독교인이 정치와 복음을 혼동하는 방법’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평가하면서 이 17가지 우선순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내 계산에 따르면, 우리는 나열된 17개 항목 중 15개 항목에서 실패했다. 그렇다. 17개 중 15개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교회의 정치적 유혹’에 주목하라. 유혹은 일반적으로 겉보기보다는 은밀한 것으로, 등을 찌르기 전까지 너무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만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경우 그가 옹호한 많은 좋은 것들, 그가 옹호한 훌륭한 것들, 그가 보여준 많은 용기, 그가 분담한 우리의 짐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가 너무 쉽다(유혹한다는 것은 그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했던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증거를 타협하고, 정치 체제를 신뢰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합하기보다 대통령을 놓고 분열했다. 트럼프가 다시 출마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더 잘할 수 있을까?

이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과거의 실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삶(그리고/또는 사역)을 검토하고 근본적으로 심각한 조정을 하지 않는다면, ‘트럼프 2024’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그것은 그가 아닌 우리에게 달렸다(그리고 분명히 말해서, 이 글의 목적은 그가 출마할 경우 그를 지지하거나 반대하자는 게 아니다. 선거 열풍 속에서 교회가 교회답도록 요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