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무죄한 아담’이 ‘선악과 언약(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아래 있었던 것과 ‘범죄한 죄인’이 ‘율법 아래’ 있는 것과는 그 ‘의미’와 ‘목적’이 전혀 다르다.

전자에게 ‘선악과 언약’은 계속적인 ‘언약 준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의’와 ‘죽지 않음(undyingness)’의 보장을 약속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후자의 ‘율법 아래 있음’은 율법으로부터 “죄 삯 사망(롬 6:23)”을 요구받는 것을 뜻한다.

‘무죄한 아담’이 ‘율법 준수’를 하는 한 ‘의(義)’와 ‘죽지 않음(undyingness)’을 향유할 수 있었다면, ‘범죄한 죄인’에겐 오직 ‘죄삯 사망(넓은 의미에선 ‘죄삯 사망’ 지불도 일종의 ‘율법 준수’이다. 이는 율법이 ‘죄삯 사망’을 요청했기 때문이다)’의 요구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죄인이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죄를 받을 뿐이다. 죄인의 ‘부정함’과 ‘무능’이 영원히 그것(율법 준수)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자들은 대개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같은 말씀을 곡해한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생각하듯, ‘타락한 죄인이 율법을 지켜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 약속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다. 곧 의롭고 완전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무죄한 아담에게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도 네가 율법준수의 삶을 살면 계속 ‘죄와 죽음 없음(undyingness)’을 향유하게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 ‘죽음 없음(undyingness, 율법을 준수하는 한에서만 보장되고 율법을 어기는 순간 파기된다)’은 ‘영생(eternal life)’과는 다르다. ‘영생’은 율법 준수로 획득하지 못한다(이것이 율법 준수의 한계이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사’로 주어지기 때문이다(롬 6:23).

‘율법의 기준’은 ‘무죄한 의인’이다. ‘무죄한 의인만이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그 기준이다. 따라서 죄인은 이 기준에 이미 미치지 못하므로 ‘율법 준수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가 만일 율법 준수에 도전한다면 ‘의롭다 함을 받기는커녕 죄만 깨닫는(롬 3:20)’ 참담한 결과를 얻을 뿐이다.

이처럼 무능한 죄인에겐 ‘공의의 법(the law of justice)’이 언제나 ‘정죄의 법(the law of condemnation)’이 된다. 그에게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는 말씀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는 정죄의 말씀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율법에서 정죄받은 죄인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고, 율법은 자신의 몽학선생 역할(갈 3:24)을 완수할 기회를 얻는다. 이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순기능(順機能)이고 은혜이다.

우리는 ‘행하면 살리라’ 같은 ‘공의의 법(the law of justice)’을 ‘생명의 법(the law of life)’으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무능한 죄인에게 그 법은 이미 ‘준수 불가의 법’으로 폐기처분됐다. 성경의 선포이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

무능한 죄인에겐 오직 ‘죄삯 사망(롬 6:23)’을 요구하는 율법만 남아 있다. 그러나 무능한 죄인은 이 ‘죄삯 사망’마저 갚을 수가 없기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죽어주심으로 그 율법을 이루셨다.

◈‘율법 준수’냐 ‘율법 성취’냐?

‘율법’과 관련된 사람들의 용례(用例)를 보면,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율법주의자’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율법의 완성’을 본 적 없는 율법주의자는 ‘율법 준수(conforming to the law)’라는 말을 상용(常用)한다.

이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율법 준수를 통해 자기에게 부과된 율법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롬 10:4)’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준수’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이미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부정한 죄인의 죽음은 ‘죄삯 사망’이 못되기에)’을 자기의 ‘죄 삯’으로 받아들여 율법을 완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以信稱義)’로 율법의 완성을 본 그들에게 ‘율법’은 준수하여 완성시켜야 할 강박적인 의미로 다가오기보단 ‘구원받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징’ 혹은 ‘행하여 복을 받는 특권’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율법’은 대상에 따라 그 ‘요구의 내용’도 ‘그것(율법)에 대한 반응’도 각기 다르다. 무죄했던 아담에겐 ‘율법 준수(의롭고 완전한 행위)’를 요구했다면, 타락한 죄인에겐 ‘죄삯 사망(롬 6:23)’을 요구했다. 인간의 타락 전후로 요구 내용도 달라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타락한 죄인임을 잊고,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는 율법의 요구를 자기에게 적용시켜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하려고 혈안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오늘 율법주의 신앙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으로부터 요구받는 것이 ‘율법 준수’가 아닌 ‘죄삯 사망’인 줄도 모르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을 대신해 지불한 ‘대속(redemption, 代贖)인줄도 몰랐기에 ’그의 죽음‘을 영접하지 않았다.

결론이다. ‘무죄한 의인’은 ‘율법 준수’를 통해 ‘율법을 보존(preservation of law)’하고, ‘타락한 죄인’은 ‘죄삯 사망을 지불해 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성취(completion of law)’한다.

거기에 따른 결과물도 각기 다르다. ‘무죄자’가 ‘율법 준수’를 했을 때 주어지는 ‘대가’는 ‘죽지 않음(undyingness)’이나, 죄인이 ‘이신칭의’로 ‘율법 성취’를 했을 때 주어지는 ‘은사’는 ‘영생(eternal life, 롬 6:23)’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