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
▲화물연대 파업 관련 뉴스(본 사진은 해당 칼럼 속 특정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연합뉴스TV 캡처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잠언 11:11)”.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언 11:13)”.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리라(누가복음 11:17)”.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지하철 역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오면, 눈에 익은 모습들이 들어옵니다. 그곳은 장례식을 위한 운구차와 조문객들로 분주한 병원의 모습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유는 모르지만, 매일 같이 거행되는 장례식의 모습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가족들은 비통한 슬픔에 빠집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거처야 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이별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야말로 생전의 삶에 대한 마지막 모습일 것입니다.

필자의 출근길은 그곳에서 약 40분가량 걸어서 목적지인 학교를 갑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출근길은 참으로 행복할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장례식을 보면서 숙연해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며, 고요한 묵상으로 나를 성찰하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관공서나 직장, 어떤 공동체에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그 공동체는 발전하고 기쁨이 넘치나, 악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이 많으면 쇠퇴하고 불안이 팽배해집니다. 특히 지혜로운 사람이 많으면, 설령 이웃의 잘못이 있더라도 조용히 덮어줍니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늘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는 분명 어리석은 짓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1장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으로 패역한 삶, 거짓 입술, 악인의 제사와 행위, 악한 꾀, 마음의 교만, 불의한 판단, 부정한 상거래 등을 지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현 시대에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마치 정상인 것처럼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죄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심판의 날을 재촉하고 있는 악인들을 향해 참으시며 한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그리고 학교나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정직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가르침을 무수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공을 이룬 훌륭한 사람들의 정직한 생활의 모델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지만, 요즘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을 보노라면 정직한 생활에 대해 거의 무뎌진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거짓말은 보편화됐고, 욕설은 표준말이 됐으며, 어른들에 대한 공경심은 이미 초토화됐고, 이웃에 대한 양보심 역시 무너져내렸고, 배려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마저 사라져, 세상이 이미 차가운 광야로 변해 버렸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최근 어느 종교인 기자가 쓴 글을 보고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간질을 하지 맙시다’라는 제목인데, 화물노동자들이 지난 6월 7일부터 8일간 했던 총파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들이 왜 파업을 했는지 아시나요? 화물 노동자들은 ‘안전운임제’를 유지하고 적용 대상을 늘여달라는 요구로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안전운임제는 운송 시스템상 과로와 과속, 과적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화물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노동 여건을 보장하고, 도로 안전을 지키자는 취지로 시행된 제도입니다. 어쩌면 화물 노동자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사실 전달과 건전한 여론 형성에 앞장서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기업의 편을 갈라 국민들에게 한쪽 입장만 공감하도록 하는 언론의 형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공연히 있어 왔습니다.

해묵은 이념갈등부터 요즘의 젠더 갈등까지, 언론은 제 역할을 하기보다 이런 갈등 구도를 넙죽 받는데 급급합니다. 언론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고민에 앞서, 먼저 우리가 이해관계를 내세우며 서로 싸우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라는 가톨릭신문 기자의 글을 읽고, 필자는 오히려 그 기자께서 갈등을 부추기며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화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가 아닙니다. 각 개인이 사업주라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을 호소했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우크라이나 사태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물가는 고공으로 치솟으며 국민들의 한숨은 더욱 깊어갑니다.

더구나 올라가는 전기요금, 가스요금 등으로 국민들은 한없이 불안할 때, 새 정부가 출범한지 겨우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파업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며,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도 이건 분명 아니라는 생각부터 차오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 공직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어찌 한 말씀도 없으신지, 국민을 보호해야 할 대통령과 공직자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심지어 거짓말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에 대해 어찌 말씀이 없으신지요. 특히 북한에서 귀순하는 어민들을 되레 북으로 보내는 저들의 만행에 대해 어찌 그리 함구하고 계십니까?

대장동 사건, 부정선거, 제주 4·3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어찌 함구하고 계십니까? 지금 화물 노동자들보다 더 참혹한 노동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불평 없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춤추는 장단에서 한발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화물연대는 중요하고, 거기에 따른 기업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어찌 고요하십니까? 피해를 입은 기업들만 바라보는 또 다른 기업인들과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쪽 편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파업으로 더 깊은 고통을 당하는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물연대 총파업을 두둔하시는 기자님은 정부와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는 처사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두고 코로나의 기나긴 터널을 뚫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득 이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물러서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게 합니다. 더불어 우리를 살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들입니다.

다시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아니 우리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네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교회는, 오랫동안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답해 왔습니다. 과거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곳곳에 서려 있는 그분의 뜻과 반대되는 영을 그분의 뜻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질서를 파기하는 사람들이고, 그분의 뜻으로 살아감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여정의 길을 떠날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고, 그 힘과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멈춰 서게 하고 낙담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을 거슬러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지 말고, 가난하고 약하며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과 갇힌 자들의 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오늘도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분쟁과 이간질의 늪에서 헤어나와 정직하고 참 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주님께서 늘 말씀하셨던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모범이 되도록, 날마다 죽고 장례를 치르며 성찰하는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