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서울 쌍문동 올람교회
일시: 2022년 7월 31일
본문: 누가복음 11:28, 마태복음 26:41

김명혁 2019년 12월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저는 죄와 허물 밖에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인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어릴 때부터 평생토록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고백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1살 때부터 9살까지는 신의주 제이 교회에 다니면서 한경직 목사님과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고, 10살과 11살 때는 평양 서문밖교회에 다니면서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은 저에게 가장 귀중한 신앙은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 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평양 제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라고 했지만 2년 동안 한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을 다했습니다. 결국 저는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때 새벽 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맨날 감옥에 가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저는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지니고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을 평양에 두고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서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이모님을 만나서 이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신앙 생활의 자유를 누리게 되어서 너무너무 감사하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고아와 나그네로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살게 되었지만 저는 주일 성수는 물론 새벽 기도와 은혜 사모에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의 삶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는데 서울 중학교와 서울 고등학교와 서울 대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아주 잘 하게 해주셨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2년 동안 이곳 저곳의 좋은 학교들에서 신학 공부를 많이 하고 학사, 석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박사 후 연구원 박사 후 연구원 연구원으로 연구를 계속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11살 때 월남해서 서울에 온 다음 2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 이모님과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가서 3년 동안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에 전념하면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모님 두 분과 이모부님과 사촌 동생과 함께 셋집의 작은 방에서 살았는데 저는 셋집의 대문을 열고 닫는 방법을 알아내 대문을 열고 닫고 새벽 기도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을 열고 닫고 셋집의 작은 방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는데 한국교회의 무디 라고 부리시던 이성봉 목사님께서 서너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큰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중학생인 저에게 너무 재미가 있었고 감동적이었고 은혜로웠습니다.

저는 늘 앞 자리에 앉아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을 듣곤 했는데, 부흥회 도중 이성봉 목사님께서 찾아서 읽으라는 성경 구절을 미리 암송했다가 성경을 찾지도 않고 즉시 암송하므로 이성봉 목사님의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는 시 50:15, 시 37:4-6, 시 81:10, 렘 33:3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모두 그대로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면 성경을 열심히 암송했고,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를 열심히 했고,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면 은혜를 열심히 사모했고, 전도를 하라고 하면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하시면서 안수기도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아마 12번 정도 안수기도를 받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이었지 모릅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아직까지 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것은 이성봉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서12번 안수 기도해주신 사랑과 은혜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했고 너무너무 존경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와 헌신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사” 라는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하셨는데 저는 새벽기도 후 남산으로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저는 매년 1월 1,2,3일 동안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금식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금식 기도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산 기도회에는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까지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2만 8천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대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던 김치선 목사님의 기도와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고 3때와 대 1때 토요일과 주일에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전도를 하면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불러모으고 천막 교회를 세우기도 했는데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이곤 했는데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삶”이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 모릅니다.

저는 서울대학을 졸업한 다음 1년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말씀과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귀국한 다음 후암교회에서 5년동안 교육 목사로 사역을 했고 영안교회에서 1년 동안 목회 사역을 했고 강변교회를 개척해 설립한 다음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함께 사랑과 섬김의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28년 동안 외국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를 빠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삶과 목회가 아주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삶과 목회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분들 중의 란 분이 박윤선 목사님 이셨는데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신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특히 부족한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신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게 하려고 합니다.

부족한 제가 한평생을 돌아볼 때 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분들이 여러분들 계십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대구에서 만난 이성봉 목사님과 서울에서 만난 김치선 목사님과 어릴 때부터 한평생 만난 한경직 목사님과 나중에 만난 박윤선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과 방지일 목사님 등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저의 삶에 지대한 영양을 미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려고 합니다.

제가 12년 동안의 유학생활 후 귀국해서 총신대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79년 3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대의 신학원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그 이후 저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동안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박윤선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참으로 저의 삶과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제가 아주 존경하고 아주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는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과 상의를 하곤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도 저를 퍽 좋아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시간에 상관 없이 저에게 전화를 거시고 그리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 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박 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박 목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말씀했음에도, 저는 “박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라고 말하면서 박 목사님의 입장을 교수들 앞에 내세우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박 목사님과의 친근한 관계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했고 반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습니다.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인간적으로는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셨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신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주여, 주여” 라고 고백하시면서 주님만 의지하시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별세하시기 얼마 전 안만수 목사와 함께 박 목사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서울대공원에 모시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원숭이나 호랑이를 보여드렸지만 박 목사님은 그것들에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라고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들이 함께 모일 때 피차 농담하는 것을 박 목사님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 교수 세미나를 할 때는 언제나 기도원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으로 가느냐?”라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지일 사진
▲세 명의 기도 동지. 앞줄 왼쪽이 김진홍, 오른쪽이 박윤선, 뒤에 선 이가 방지일 목사. ⓒ크투 DB
박윤선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셨습니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주님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정으로 주님을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자연히 “기도”에 전념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기도를 생활화 하신 분이셨습니다. 기도를 쉽게 하신 분이 아니라 수고스럽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박 목사님을 흉내 내며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 2개월 동안 기도하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택시를 타고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습니다. 택시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1979년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시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좀 불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박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저는 박 목사님보고 “제가 기도회를 인도할 터이니 집에 가시라” 하고는 밤 기도회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일관의 박 목사님 삶의 자세를 지금 돌이켜 볼 때 “바로 그것이다!” 라고 새롭게 감탄하며 저는 지금 그 길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행정이나 정치에 관심을 두기 전에 기도로 일관하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길선주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세요 스타일이었던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마지막 1주일간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 매일 박 목사님을 찾아가서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박 목사님께서 기도로 일관하신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안식년으로 (평생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가진) 8개월 동안 미국 휫튼 대학교에 가서 이런 저런 활동도 하고 연구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 피를 토하시고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박 목사님이 쓸어져서 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의식 중에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박 목사님께서 병상에 계시던 일주일 동안 박 목사님은 매일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 라고 고백하시기도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목사님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곤 했는데,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저는 목사님의 순수한 인성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 목사님은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 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기도로 일관된 귀중한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평생을 신 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쳤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쳤습니다. 박 목사님은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 말씀과 관련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1983년 7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암스테르담 국제전도대회에 참석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 저와 같은 의자에 앉아 빌리 그래함 박사님의 진솔한 고백과 권면의 말씀을 듣고 계셨습니다.

빌리 그레함 박사님은 복음 전파는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도 아니고 어떤 새로운 윤리의 기준도 아니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 복음전파인데 복음 전도는 기술이나 어떤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변화된 삶으로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 헌신하며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권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빌리 그레함 박사님은 잠시 주저도 없이 첫째도 성경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고 둘째도 성경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고 셋째도 성경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적고 계셨습니다. 저는 빌리 그래함 박사님의 진솔한 고백과 권면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마루 바닥에 주저 앉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평생 박 목사님의 주석을 애독하고 있는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른 주석들을 거의 찾아보지 않지만 오직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만 주로 찾아보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들을 세상의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곤 합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라고 토를 달곤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에게 있어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진솔하고 따뜻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습니다.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 받은 박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고 진솔하게 고백했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호소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종종 저의 손을 꼭 붙잡고 격려와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진솔하게 하시곤 했습니다. “김 목사, 마음에 기쁨을 잃으면 안돼!” “힘을 내!” “강의 준비를 더 잘해야 돼!” “주님을 바라봐!” 박윤선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을 몸에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훌륭한 분들 중에는 함께 있기가 편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함께 있기가 너무 편한 분이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수제자였던 장경재 목사님이 함께 있기가 편한 분이셨고 성결교회의 정진경 목사님이 함께 있기가 편한 분이셨고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 함께 있기가 편한 분이셨는데, 박윤선 목사님이야말로 함께 있으면서 친밀하게 대화하고 교제하기가 너무너무 편한 분이셨습니다.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그것을 몸에 지니고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박윤선 목사님이셨습니다.

한 마디 더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포용적인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밀하게 지내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면서 매우 기뻐하고 매우 만족해 하셨고, 독일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초청하여 강의를 하게 하시면서 친밀하게 지내셨습니다.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포용적인고 개방적인 입장을 취히셨습니다. 장신대의 주선애 교수를 초청해서 강의를 하게 하셨고 이동주 교수를 초청해서 강의와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윤선 목사님은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결국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올바로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극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한국 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고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적인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인 순수한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올바로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은 배타적인 분리주의가 아니라 긍정적인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 라는 것을 올바로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현세적인 정치 사회 문제에 치중하기보다는 사도 바울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붙잡히고 전적으로 기도에 붙잡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 더 합니다. 제가 개나리 아파트에 사시던 박윤선 목사님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려고 하면 박 목사님께서는 의례히 저보고 “열쇠 잊지 마!” 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제가 박 목사님과 대화를 한 다음 거의 매번 제가 가지고 다니는 열쇠 뭉치를 소파에 놓고 그대로 나오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박 목사님은 저보다 더 건망증이 많으셨는데, 저더러 열쇠 잊지 말라 라고 매번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신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 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합니다.

“박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박 목사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박 목사님!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박 목사님 조만간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 됩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