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 마음 사기 위해 건축 적극 나선 헤롯
성전 특히 유명, 솔로몬 성전 두 배 넘는 넓이
성전 건축 명목 지나친 세금으로 분노 커져가

헤롯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모습 추정 그림.

4. 헤롯은 왜 성전을 지었나?

2) 건축 천재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헤롯을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헤롯 가문을 포함한 이두메인들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했다고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들을 이방인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미 안티고누스 반란 사건에서도 경험했지만 헤롯은 유대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거센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두려워했고, 따라서 유대인의 마음을 사는 한 가지 방법으로 중요한 건축물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① 가이사라 항

헤롯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는 가이사라 항구입니다. 이스라엘 해안은 주로 모래 퇴적물로 되어 있어서 자연적인 항구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를 내해로 하고 있던 당시 로마 제국 시대에는 항구를 갖는 것이 절대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헤롯은 당시 최첨단 기술인 ‘바닷물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시멘트’를 이용하여, 당대 최고의 인공항을 이곳에 만들었습니다.

또 이 인공도시에는 물이 없었기 때문에 급수 시설이 필요하였는데, 갈멜산에서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해 만들어진 수로는 아직도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물이 너무 세거나 약하지 않게 흐르도록 일정한 각도로 정확하게 맞추어 만들어진 이 수로 건설에는 매우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었습니다. 이 인공 도시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 총독이 거하는 수도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당대 최고의 인공 항이던 가이사라 항구.
② 마사다 요새

또 유대 광야 사해 근처에 위치한 마사다에 요새를 만들어 20여 년 전 일어났던 반란과 같은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B.C. 40년 안티고누스 반란 때 이곳의 가치를 몸소 체험했는데, 언제 다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헤롯은 여기에 1만 명의 군사가 무기한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헤롯은 운좋게도 평생 이곳을 다시 사용할 기회를 갖지 않았지만, 나중에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0)이 끝난 후 열심당원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최후 항거를 하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A.D. 73년 이방인의 손에 죽기 싫은 960여 명의 열심당원이 더 이상 항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곳에서 자결을 합니다.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장소로 ‘Never Again’이라는 구호와 함께 ‘마사다 최후 항전 같은 일이 이스라엘에 다시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마사다 맛사다 이스라엘 광야 항쟁 항전
▲오늘날 마사다 유적 모습. ⓒ이스라엘관광청

③ 예루살렘 성전

헤롯 건축물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성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성전은 B.C. 516년 지어진 스룹바벨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매우 작고 볼품이 없었는데, 당시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겐 충분한 자금이 없었고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페르시아 지원금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가 처음 놓여 졌을 때 참석자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50여 년 만에 다시 시작된 성전 기초를 보니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기억하고 있는 그들에게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스 3:12-13).

법궤도 없이 초라하게 만들어진 스룹바벨 성전에 비하면, 헤롯 성전의 규모와 화려함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에도 절대 뒤지지 않았는데, 외국에서 수입된 최고가의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전은 절기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 멀리서 봐도 예루살렘 하늘을 온통 하얀 빛으로 채우는 예루살렘 대표 건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성전 마당은 솔로몬 성전의 두 배가 넘는 넓이로 만들어졌는데, 현재 있는 통곡의 벽(서벽)이 이때 확장된 곳의 서쪽 부분입니다. 또 동쪽 깊은 기드론 계곡으로 확장된 마당은 서벽보다 높이가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확장된 부분까지 모두 완공하기까지 총 8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 성전이 완공된 지 불과 7년 만에 헤롯 성전은 불에 타 없어집니다.

④ 건축의 부정적 측면

이 외에도 헤롯의 무덤으로 알려진 헤로디움 요새, 추운 겨울에 지내고자 만든 여리고 인근 겨울궁, 기타 수많은 요새 등을 건축했는데, 이런 다양한 건축을 통해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고, 또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했던 헤롯의 목적이 얼마나 성취됐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위한 건축물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건축물도 많이 지었고, 또 성전 앞에 로마를 상징하는 금독수리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유대인보단 로마 제국의 이익을 대변한 행동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로 개종한 헤롯의 신앙에 대한 불신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이었던 것은 지나친 세금을 부과했다는 점입니다. 헤롯은 수많은 건축과 또 로마 제국에 바칠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자주 많은 세금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곤 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으며, 헤롯 말년에는 많은 소요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헤롯의 건축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순기능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특히 기근이 저주 일어나는 가나안 지역의 특성상 하층민들에겐 끊임 없는 공사가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에 대한 분노는 그 뒤에 있는 로마 제국에 대한 분노로 발전했고, 언젠가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 민족적 과제가 됐습니다. 이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0)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하스모니아 왕가 후광 얻고자, 정략결혼 선택
왕위 노린다 의심 들면 가족도 죽이는 잔인성
두 살 이하 모든 사내 살해 거짓? 현실성 높아


헤롯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헤롯 성전 조감도.

3) 잔인함의 대명사

헤롯이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건축에 열심이었던 것은, 결국 그의 왕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만큼 헤롯은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왕권을 노린다고 의심이 들면 구체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자기 부인이나 자식까지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하스모니아 왕가와 혼인 정책을 펼칩니다.

하스모니아 왕가(B.C. 140-63)는 비록 로마 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했지만, 셀루쿠스 왕국을 몰아내고 유대 독립 국가를 건설해 유대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가에 대해 깊은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 결혼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는데, 하스모니아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느(Mariamne)의 후광으로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어보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방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헤롯은 공주인 마리암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교활함을 알게 된 마리암느는 평생 헤롯을 조롱과 무시로 대했습니다.

헤롯은 하스모니아 왕가의 후광을 얻고자 정략결혼을 선택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 왕가가 자기 왕위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의심을 부채질한 것은 유대인들이 마리암느와 그녀가 나은 두 아들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헤롯은 늘 이들이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장모로부터 시작해 처남은 물론, 아내까지 죽이고 나중에는 둘 사이에서 난 두 왕자와 다른 부인에게서 난 왕자까지 죽이게 됩니다.

헤롯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헤롯 가계도.

헤롯의 이런 의심증과 잔인함은 로마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큰 조롱거리가 됐는데, 특히 헤롯이 온갖 충성을 다 바쳤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헤롯의 미친 행동을 보면) 그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칭 유대인임을 주장하는 헤롯이 율법에 따라 돼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비록 율법을 경시하는 이방인이었지만 표면상으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흉내라도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이 죽인 이 가족들의 특징은 모두 구체적 증거 없이 헤롯의 왕위를 위협한다는 의심 내지 혐의가 있었습니다.

헤롯의 이런 잔인함은 마태복음 2장 1-18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고 떠났을 때, 헤롯은 베들레헴 지경에 있던 두 살 이하 모든 사내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혹자는 이 이야기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가공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기 왕위를 노린다고 의심이 되면 자신의 가족까지 죽일 수 있는 헤롯의 잔인한 성격을 보면, 마태복음의 이야기가 꾸며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현실성 높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헤롯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공히 싫어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범죄라도 능히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헤롯 성전, 당대 최고 기술력 동원 최고 속도로
완공까지 82년, 기초석 돌 크기도 어마어마해
‘이방인의 뜰’ 만들어 이방인도 관람 가능케 해

헤롯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바위 돔 이슬람 무슬림 유적
▲성전터 위에 세워진 바위 돔. ⓒ픽사베이

5. 헤롯 성전 건축 과정

1) 성전 건축의 의도

헤롯이 유대인들에게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지어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주는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지어줌으로써 유대인적 경건함을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성전에 금독수리상도 함께 건설함으로써 그의 경건함은 참된 것이 아니었음이 곧 증명됐지만, 로마에서도 지나치게 화려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성전을 지을 때 율법에 어긋나지 않고 성전의 경건함도 잃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소에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는 율법에 따라, 성소를 지을 때는 제사장들이 직접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1천 명의 제사장을 선발하여 대리석이나 목재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 성소 건축을 전담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 있었습니다. 그는 수입산 흰 대리석 등 값비싼 재료들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여기에 사용된 건축 기술도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동원하여 유대인들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그는 성전 건축 때문에 제사가 최대한 불편해지지 않도록, 건축 기간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그는 성전 건축을 할 때 제사의 연속성을 위해 성소를 먼저 건축했는데, 불과 1년 반 만에 완공을 시켰습니다. 그의 건축 기술은 로마까지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습니다.

헤롯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헤롯 성전 상상도.
2) 성전 규모

성전 건축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어간 것은 성전 마당을 넓히는 작업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총 17에이커(약 2만 평) 정도였다면, 헤롯 성전은 그 두 배가 넘는 36에이커(약 4만 4천 평)나 됐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가는 인력과 시간은 단순히 두 배만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이 위치한 곳이 평지가 아니라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마당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성전 남쪽 비탈면에 매우 높은 축대를 쌓아야 했습니다.

지금의 서벽(통곡의 벽)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땅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지만, 축대의 기초석에는 수십 톤에 해당하는 어머어마한 크기의 돌들을 사용해 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기드론 계곡 쪽의 축대는 훨씬 더 높이 쌓아야 했는데, 기드론 계곡이 서벽이 있는 중앙 계곡 쪽보다 훨씬 더 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 마당을 넓히는 공사는 어마어마한 대공사였으며, 모두 완성시키는데 자그마치 82년이라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3) 스룹바벨 성전의 교체

이렇게 당대 어느 종교 사원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성전을 갖게 됨으로써 국내나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높은 자긍심을 갖게 됐고, 헤롯은 자신의 건축 재능과 종교적 신실함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이 이런 어마어마한 건축 사업을 벌인 궁극적 이유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먼저는 제사장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로마 당국의 허락도 필요로 했습니다. 헤롯의 간교함을 잘 알고 있던 제사장들은, 헤롯이 이런 어마어마한 청사진을 제시하자 처음엔 헤롯이 성전을 없애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이를 눈치챈 헤롯은 먼저 그 규모와 화려함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던 로마 당국으로부터 적극적인 로비를 통하여 허가를 얻어낸 다음, 3년여 기간 동안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헤롯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자, 비로소 제사장들은 헤롯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기존 성전을 허물 수 있도록 허락을 하였습니다.

4) 혁신적인 성전 구조

이런 대역사를 통해, 마침내 울퉁불퉁하던 바위산인 성전산이 넓고 평평한 정원을 가진 매끄러운 성전 마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헤롯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을 만들도록 합니다. 이는 당시 매우 혁신적인 조치였는데, 특히 성전을 개방해 이방인들도 이 멋진 건물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성전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고, ‘이방인의 뜰’에서만 바라볼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이 선을 넘는 이방인들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판이 경계 지점에 붙어 있었습니다.

통곡의 벽 헤롯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일명 통곡의 벽, 헤롯 성전 서벽 현재 모습. ⓒ픽사베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유대인들이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주장합니다(행 21:28-29).

이는 아마 바울이 이방인을 ‘이방인의 뜰’까지 데리고 간 것을 확대 해석해, 마치 바울이 이방인을 금지구역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처럼 모함하기 위한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이 오랜 기간 건축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전을 지을 동안에는 비가 밤에만 내렸는데, 그 이유는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밤에 비가 내리다 아침이 되면 바람이 불어 모든 비구름을 다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전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이런 자연 현상을 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성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더욱 열심히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5) 건축에 대한 평가

헤롯 성전 건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기 힘든 대역사였기 때문에, 헤롯 성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평가를 보면 이 성전 건축은 1만 8천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늘 가난에 시달리던 가나안 지역의 하층민들에게, 수십 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가계 수입에 큰 힘이 됐습니다.

또 헤롯 성전의 아름다움은 유대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이 지중해 전 지역에서 모여들었는데, 헤롯 성전이 더 많은 유대인을 불러모은 것은 분명합니다.

또 어느 유명한 랍비는 “이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 아름다운 건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여, 헤롯 성전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엄청난 건축 비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려한 성전을 갖는 대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전에 대한 감격보다는 세금에 대한 고통이 이들을 짓눌렀습니다.

특히 에세네파는 성전 건축에 들어간 엄청난 돈을 가리키면서, ‘이는 제사장들의 타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계속>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