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일시: 7월 24일

장소: 군산 샬롬교회
본문: 마 5:43-45, 9:12,13, 25:35,36,40

이런 제목의 설교는 처음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10여년 이상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잠들기 바로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매일 드리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 주님의 피와 보혈을 이 죄인의 몸과 마음과 영혼과 살과 피에 가득히 부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죄인의 원죄와 자범죄를 사해 주시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정결하고 온유 겸손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과 마음과 영혼과 살과 피를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저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고 저를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해주시고 저의 지정의필언행을 감화 감동시켜 주셔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움직이게 하시옵소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제 소원을 만족케 하사 제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사실 저는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었고 특히 성자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 때까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의 부 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제가 한 살 때부터 저를 안아 주시면서 사랑해 주셨는데 제가 평생토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던 유아 및 유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놀러 다니면서 심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이 가꾸어 놓은 토마토 밭에 들어가서 주인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길가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를 종이와 흙으로 덮은 다음 숨어서 보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썰매를 티고 쇠통에 담은 숯불을 쇠줄에 매달아 휘두르면서 친구들과 이곳 저곳으로 몰려 다니면서 신나게 놀기도 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 들어가 미역을 감고 물 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신의주 제2교회 교회당 지붕 위와 교회당 건물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어느 아이가 똥이 마렵다고 하면, 제가 똥을 종이에 담아서 멀리 던져 남의 집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는 못된 장난까지 쳤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했고 장난치기를 좋아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꾸짖거나 야단을 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손자들이 저의 장난꾸러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저의 심한 장난꾸러기 기질이 나중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막 뚫고 나아가는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살아가는 “막가파”의 기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예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믿고 섬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깊은 감동을 저는 평생 지니게 되었는데 그 때 받은 알타반 박사에 대한 깊은 감동의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 성경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데 네 번째 박사인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떠난 네 번째 박사는 세 박사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던 중에 길가에 쓰러져서 죽어가던 병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준비해서 가지고 가던 세 개의 보물 중의 하나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시간을 지체하므로 세 박사들을 약속 장소에서 만나지 못했고 베들레헴에 늦게 도착해서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도 경배 하지도 못했다는 서글픈 이야기였습니다.

메시아이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세 개의 보물 중의 하나는 길가에 쓰러져서 죽어가던 병자를 위해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어느 집의 아기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려고 하는 것을 살리기 위해 써 버렸습니다. 그 후 알타반 박사는 평생토록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이곳 저곳으로 찾아 다녔지만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다는 서글픈 내용의 성극이었습니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30여년이 지난 다음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는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군중들이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로 올라 가냐고 물었더니 메시아를 못박아 죽이려고 올라간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 이제라도 자기는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노예로 팔리기 위해 군인들에게 잡혀서 끌려가던 한 소녀가 알타반 박사를 향해서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하나 남은 보물을 그 소녀에게 주므로 그 소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서글픈 이야기들이었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유치부 어린이였던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장면은 성극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빈 손으로 서글픈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던 백발의 노인이 된 알타반 박사가 지진으로 돌무더기에 뒤덮여 죽어가면서 들은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너는 나를 만났느니라. 네가 준비했던 보물들은 내가 모두 받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니라.” 유치부 어린 시절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성자 예수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돕고 섬기는 일을 성자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좋아하시면서 축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목회자가 된 후에도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펴는 것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펼 때마다 부족한 제가 성자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섬기게 된다는 귀중한 진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받은 감동과 은혜를 저는 평생토록 지니고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신의주와 평양에 있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신의주와 평양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습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서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면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저는 감옥에 계시면서 고난을 당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우리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성자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면서 섬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목회하시면서 늘 바쁘게 지내셨는데 저에게 잔소리는 고사하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저를 칭찬해 주시고 격려하신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옥중 생활의 삶을 바라보면서,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의 유산을 제 몸과 마음과 삶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에게 야단을 치거나 잔소리를 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저를 칭찬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곤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하도록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결국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하곤 했습니다. 저는 공부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는데 글을 잘 쓴다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 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강량욱 목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셨습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남루한 죄수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뵈온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계속해서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계속해서 전수받았습니다. 결국 극심한 고난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2년동안 다니면서 일요일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주일 성수가 최고로 귀중한 신앙이었고 주일을 성수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은 세상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제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제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 성수를 바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자발적이고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 제가 떠나기 전에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를 믿고 저를 멀리 떠나 보내시는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지니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밤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일행을 향해 모두 손을 들고 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예배 드리기 위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긴 파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 달렸습니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아마 40여분 동안 달린 후 저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예수님만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달리는 저를 예수님께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로 붙잡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뛰어넘은 사건은 그후 저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귀중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모험적으로 막 뚫고 나아가는 “막가파”의 삶이 저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오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누구하고 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서울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해주에서 서울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제 주머니에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라는 주소 한 장을 가지고 왔는데, 서울역에서 걸어서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 저는 밤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영락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 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습니다. 새벽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 주신 아주 귀중한 스승이셨습니다. 모두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저는 공부도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제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를 계속 놀려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데리고 가서 나하고 싸움을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두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때려 눕혔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저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운동도 싸움도 공부도 제가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평생 신앙 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저는 공부도 잘 해서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저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엉뚱한 짓도 잘 했습니다.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을 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의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월남 한지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비행기 B29의 폭격도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쟁의 불행과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몇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셋방 하나를 얻고 한 방에서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셋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 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대구에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 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 뻘 되는 주명숙이라는 고등학생이 저하고 누나 동생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를 귀엽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내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저를 누나 집에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내 손수건도 빨아주었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시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3년 동안에 12번이나 부흥회에 참석해서 깊은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개학 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 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과 재림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습니다. 때때로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 라는 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습니다.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암송해서 읽곤 했습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제가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들 중의 하나는 시편 50편 15절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12번은 안수 기도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게 되었고, 결국 2000년 5월 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란 제목으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하게도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였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 때문에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보다 친밀하게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섬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제가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모음” 이란 제목의 간증 설교를 다 하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할 것입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간단하게 추려서 하려고 합니다.

제가 3년동안 대구에서 살다가 고등학생 때 서울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는데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는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한국의 예레미야 라고 불리셨는데 회개와 기도와 부흥 사역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는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 기도회를 빠지지 않았고 예배와 기도 드리는데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매일 새벽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라는 찬송을 부르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 받았는데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는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의 영성을 계속해서 조금씩 물려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또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셨고 2만 8천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는 처절하게 기도하면서 성자 예수님과의 보다 친밀한 사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중구 회현동 2가 45번지에서 살았는데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남산에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성경을 보며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와서는 아침 밥을 먹고 30여분 동안 걸어서 서울 고등학교를 다니곤 했습니다. 저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는데 서울의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 부흥회까지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 때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피 흘려 사신 교회” 라는 가사에 저는 깊은 감동을 받고 너무 감사해서 울고 또 울었고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에 늘 사랑하지 못하는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옆의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 있어?”라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에 함께 참석했던 김치선 목사님의 아들 세창군이 저보고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해서 제가 안수기도를 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창동교회에서 매년 년 초마다 3일씩 금식 기도를 했는데 저는 언제나 빠지지 않았고 금식 기도에 참예해서 열심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즉 2만 8천여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어서 주일날 들판에서 예배 드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주일마다 학교의 교실 두세 개를 빌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결국 주일마다 학교의 교실 두세 개에서 학생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고3 때는 공부에 전념하여야 하는데 저는 서울고등학교 3학년 때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합격하여 역사를 전공하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막을 구해 다가 천막을 치고 “한양 제일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달았습니다.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 엄마 교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양 제일교회가 제일 좋아요.” 제가 주일 오후 대학생 교복을 입고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어떤 교인이 보고는 “천사가 전도하는 것 같아요” 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회개와 기도와 은혜 사모와 전도의 유산 때문이었고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1974년에 귀국한 다음 조동진 목사님의 초청으로 후암교회에서 5년동안 교육 목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목회 초년생이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목회 사역에 임했는데 많은 젊은이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후암교회에서 교육 목사로 사역할 때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합니다. 1976년 여름 대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군 옥현리에 가서 하기 성경학교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동네의 청년들 20여명이 교회 근처에 와서 유행가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정에 없던 전도의 대화를 마을의 청년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목요일 밤 동네 청년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도 설교를 들은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청년 하나가 또 앞으로 나오더니 자기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청년 하나는 자기는 청주에서 잘 알려진 불량배인데 자기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날 밤, 15-16명의 청년들이 하나 하나 앞으로 나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 때 목사도 아니었고 선생과 박사였는데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통해서 크신 은혜를 베푸셨다고 생각합니다. 토요일, 그들과의 이별은 눈물의 이별이었습니다. 그들과의 서신 왕래는 그후 수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편지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김 박사님 읽어주세요. 나에게는 그 기간이 인생 중에 가장 은혜스러웠고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바입니다.

박사님이 설교와 기도하실 적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박사님을 언제 뵈올 지 몰라도 꼭 한번 뵙고 싶은 것이 제 소원이라면 소원이겠습니다. 또 저희들을 잊지 않으시고 공부할 성경 교재를 보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8월 7일 박궁래 드림.”

“그간 선생님, 안녕하세요? 떠나는 7일날 보천서 우리는 너무나 섭섭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배운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왜 그렇게 떨리는지 몰라요. 그런데 끝날 때는 말도 잘 나오고 떨리지도 않았어요. 정말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가 봐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어요.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그때서야 똑똑하게 알았어요. 선생님, 가을에 꼭 한번 오세요. 지금부터 부탁입니다. 정말 꼭 오세요. 8월 11일 박정옥 씀.”

“죄책감에 눈시울을 적셔야 하는 나의 마음 ‘주여 이 몸을 용서해 주소서’ 하며 나의 발길은 교회로 향한다. 그 동안 인생의 줄달음에 주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후회도 하며, 울어도 보고 . 먼젓번 부탁과 동일하게 녹음 테이프 2개를 보내니 녹음해서 보내주세요. 1976년 8월 김재옥 서.”

사실 괴산 옥현리의 청년들과의 교제와 만 남은 10여 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그들과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들과 만 남도 이어졌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는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자는 성자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 남과 교제와 사랑과 도우심과 축복 때문에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놀라우신 일들을 평생토록 경험하면서 고마움과 감사와 기쁨과 찬양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영원토록 올려 드립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특히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지금도 주님의 살과 파를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과 살과 피에 부어주시는 성자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도우심과 축복으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한 일들을 계속해서 하게 하시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이야기들의 제목들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 신자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 “회장 보살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 “불행에 빠져있던 부산에서 살던 한 여자가 고마움과 감사에 사로잡혀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 이야기” “불행에 빠져있던 부천에서 살던 박범순씨와 그의 두 딸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 “강변교회를 통해서 삶이 새롭게 변화된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중국 연변의 조선족 고아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므로 저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이야기” “북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와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므로 저들의 삶이 변화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 더 하면 부족한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14년 7개얼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들과 어려움에 처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조그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들이 얼마나 귀중하고 축복된 일들인지 모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몇 마디를 인용함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36,40).

온갖 죄와 허물 밖에 없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에게 베푸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특히 성자 예수님께서 부족한 죄인에게 베푸시고 또 베푸시고 또 베푸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말로 다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싶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이것으로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모음” 이라는 제목의 간증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을 우리들 모두에게 가득하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