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흥망성쇠 함께한 역사
이스라엘 역사 파악 위해 성전 이해 무엇보다 중요
성막 계속 옮겨다니다 예루살렘에 성전 지어 정착

예루살렘, 해안길과 왕의 대로 연결하는 주요 통로

계곡 둘러싸여 방어 유리하고, 식수 확보 가능 환경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등 세 종류

예루살렘 이스라엘 성전
▲예루살렘 성전 터를 공중에서 내려다본 모습.

1. 들어가는 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요 2:20)”.

이 성경 구절은 공생애 초기 예수님께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실 때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있었던 논쟁 중 일부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헤롯 성전은 아직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로 46년째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A.D. 27년쯤 시작하였다고 본다면, B.C. 20년경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롯이 시작한 이 성전이 최종적으로 A.D. 63년 완공되었음을 고려할 때, 자그마치 82년 이상 걸려 지은 건축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82년이라는 기간 사이에는 헤롯의 죽음이나 사회 혼란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공사가 멈추어야 했던 기간들도 있었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성전이 지어졌다는 것은 마치 애굽 피라미드처럼 그 규모와 더불어 중요성도 느껴집니다.

성전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였고, 이스라엘 역사는 성전과 더불어 그 흥망성쇠를 함께 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A.D. 70년 헤롯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성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성전의 역사

1) 성전 터의 형성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단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동 성막이 만들어진 것은 출애굽 때로 모세는 하나님 지시에 따라 성막을 만들었으며, 광야 40년 동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에 따라 성막을 치고 걷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성막이 길갈에 잠시 머물다가(수 4:19, 5:10), 여호수아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실로에 300년 이상 오랫동안 정착하게 됩니다(수 18:1, 10).

이후 성막은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 근처에 있는 놉으로 옮겨졌다가(삼상 22:11, 19), 사울이 다윗을 도왔다는 핑계로 이곳의 제사장 85명을 죽인 후 성막은 다시 기브온으로 옮겨지게 됩니다(왕상 3:2-4; 대상 21:29). 이후 솔로몬 성전이 완성되기까지 성막은 기브온에 남아있게 됩니다(대하 1:3).

한편 법궤는 엘리 제사장 때 성막과 분리되어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숱한 재앙 끝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세 장막 레위기 성전 성막 광야 임재 제사
▲모세의 장막 성전을 표현한 그림.

돌아온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오랫동안 모셔집니다(삼상 7:1-2). 사울이 전사한 후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취한 후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 하다가, 웃사 사건으로 오벧에돔 집에 임시로 머물게 합니다. 이후 오벧에돔의 집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마침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됩니다(삼하 6:12-15).

이로써 다시 이스라엘에 법궤가 모셔진 성전을 가질 기회가 만들어졌지만, 다윗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연고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성전 지을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후 영구적인 성전 터가 예루살렘에 자리잡게 됩니다.

성막이 사사 시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후에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의 중심이 됩니다.

2) 예루살렘의 특징

이처럼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습니다.

먼저 지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은 족장의 길에 위치하여 주요 무역로인 ‘해안길’과 ‘왕의 대로’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 중 하나였습니다.

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사방이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시를 방어하기에도 매우 유리했습니다.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이 성을 빼앗고자 했을 때 그들은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삼하 5:6)”며 다윗을 조롱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에서 방어가 가장 취약한 곳은 북쪽 방면이었는데,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자 이중 삼중의 성벽을 이곳에 쌓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곳에 물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기혼샘은 예루살렘 성이 세워질 수 있는 기초가 되었으며, 왕들은 왕위에 오를 때 이곳에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히스기야왕은 전시에도 성 안에서 이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당시로선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터널을 만들었습니다.

기혼샘 외에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었던 또 하나의 장점은 빗물을 모으기 매우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은 실로나 벧엘과 같은 도시들과 달리 산꼭대기가 아니라 능선 비탈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도시 안으로 흐르는 중앙 계곡(Tyropoeon Valley)에 많은 물웅덩이를 만들어 겨울철에 내리는 빗물을 모아 일년 내내 쓸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 멜기세덱이 다스리던 성읍이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곳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종교적 이점도 두루 가진 예루살렘은 법궤가 돌아온 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다윗에 의하여 성전이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게 되자, 이후 예루살렘은 명실상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한 곳이 바로 시편 137편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지은 이 시는 고향의 노래를 청하는 바벨론 군사들의 요청에 마지못해 부른 노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늘 간직되어 있는 보물이 예루살렘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 137:5-6)”.

여기서 오른손의 재주는 ‘생업’을 상징합니다. ‘나의 오른손에 익힌 기술’은 나와 우리 가정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재산목록 1호입니다. 또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는 것은 마실 물이 없어 갈증으로 곧 죽게 될 것임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광야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입니다.

결국 이 시는 내 ‘생업’이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강조한 신앙 고백입니다.

바벨론 성전 예루살렘 파괴 화재 멸망
▲바벨론에 의하여 불타는 예루살렘 성전을 표현한 그림.

3. 성전의 역사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후 이스라엘 역사가 내내 평화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모두 세 종류의 성전이 나오는데, 건축 주체에 따라 세 가지 이름으로 구분합니다.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이처럼 성전의 이름이 세 번 바뀌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전이 무너질 정도의 큰 재앙이 몇 번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역사에서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성전이 두 번 불에 타 없어진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역사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도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온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제1성전 시대와 제2성전 시대’로 나누기도 합니다. ‘제1성전 시대’는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시작한 다윗-솔로몬 왕으로부터 그 성전이 무너진 B.C. 586년까지를 의미합니다. ‘제2성전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스룹바벨의 주도 하에 성전이 지어진 때로부터 A.D. 70년 로마제국에 의하여 또 다시 성전이 무너지는 때 까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왜 제2성전 시대를 스룹바벨 성전(B.C. 538-B.C. 21)과 헤롯 성전(B.C. 20-A.D. 70) 시대로 나누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솔로몬 성전과 헤롯 성전이 무너질 때는 각각 바벨론과 로마제국에 의해 이스라엘 역사에 큰 재난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이 헤롯 성전으로 바뀌는 시점에는 성전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던, 즉 성전의 제사가 멈추지 않았던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즉 성전이 교체된 것은 이두메인(즉 에돔 족속) 출신 헤롯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임명받은 유대 왕국의 왕으로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고자 낡고 오래된 스룹바벨 성전을 헐고 그 터 위에 크고 화려한 새로운 성전을 지어준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스럽게 성전의 교체가 일어난 점을 강조하여,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 시대를 함께 묶어 ‘제2성전 시대’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헤롯 성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이유는 헤롯 성전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그 중요도에 비해 신약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고, 따라서 많은 독자들이 헤롯 성전이 지어진 배경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헤롯 성전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신약성경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질 것입니다.

참고로 독자들께서 가끔 ‘제3성전’에 대하여 여러 언론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제2성전 시대(스룹바벨-헤롯 성전)가 A.D. 70년 막을 내린 이후 아직 성전이 건축된 바가 없지만 새로운 성전 건축을 통하여 ‘제3성전 시대’를 열고자 준비하고 있는 종교 그룹들이 있음을 보도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4. 헤롯은 왜 성전을 지었나?

1) 가문의 이력

헤롯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야기처럼 극과 극을 달립니다. 그의 천재성과 잔인성은 늘 화제가 되어 왔습니다.

헤롯의 이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기 전, 먼저 헤롯 집안의 이력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헤롯 가문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약성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롯 가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두메인들(에돔 족속의 후예들)입니다. 하스모니아 왕국 시절 요한 힐카누스 1세는 B.C. 125년 페트라 지역에 살던 이두메인들을 정복한 다음, 죽음과 할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압적인 유대화 정책을 펼칩니다. 이들은 할 수 없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였지만, 이후에도 유대인들에게 차별과 박해를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헤롯 가문이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터 1세 때부터입니다. 이두메인들 사이에서 부와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B.C. 63년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복잡한 정치 상황에 맞추어 교묘한 줄타기를 하며 유대 왕국의 권력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시저가 애굽에서 승리하여 황제가 되도록 도운 그는 마침내 유대 행정관이 되어 실질적인 유대 통치자가 됩니다.

B.C. 43년 안티파터 1세가 독살당하고 난 뒤 헤롯은 형인 파사엘과 권력 투쟁을 벌입니다. 이 혼란한 틈을 타 B.C. 40년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왕손이던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켜 파사엘을 죽이지만, 아버지의 정치 감각을 물려받은 헤롯은 재빨리 마사다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집니다.

그곳에서 이두메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 간 그는 유대왕국의 중요성을 인식한 로마 원로회의로부터 유대 왕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유대로 돌아온 헤롯은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B.C. 37년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마침내 헤롯 왕조를 열게 됩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34년(즉 B.C. 37-4)간 유대를 통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헤롯에게는 유대 통치자가 된 이후 두 가지 중요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왕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를 위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결국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필수적임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