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알렌 입국으로 선교 역사 공식 시작되지만
처음 발 들인 신자는 1628년 네덜란드의 벨테브레
이어 1653년 하멜도 상륙, 제주도는 선교의 시작점
제주 주민들, 200년간 ‘출륙금지법’으로 고통당해

벨테브레 박연 John J. Weltevree 제주
▲네덜란드 드레이프 시청 광장에 세워진 벨테브레 동상. ⓒCTS 캡처
제주 목회자 최상권 목사님(제주하람교회)께서 한국 개신교 선교의 관문이 ‘제주도’라는 주장과 함께 복음화율이 현저히 낮은 제주도 복음선교를 위한 방안을 시리즈로 제시해 주십니다. -편집자 주

Ⅰ. 들어가는 말

신명기 1장 1-5절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설교의 서문이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니 그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주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신명기 1장 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 다양한 지역과 왕들의 이름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과 함께 그 이스라엘 너머에까지 미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열방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뿐 아니라 지역과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사랑과 관심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방민족을 향한 선교의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래 전 개신교도들을 보내신 제주도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이방을 향한 선교의 도구로 삼으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교회 선교 역사의 공식적인 시작은 1884년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 입국하면서 불씨가 지펴졌다고 알려졌지만, 조선은 그 이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복음을 접하였다.

처음 조선에 발을 들여 놓은 개신교 신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John J. Weltevree, 박연)이다. 그는 인조 6년(1628)에 일본으로 무역차 항해 중 제주 앞바다에 표류하였다.

같은 네덜란드 사람 하멜(Hendrik Hamel) 역시 효종 4년(1653) 제주에 표류한 뒤 『하멜표류기』를 기록하여 조선의 제주를 서양에 소개하였다.

이렇게 한국선교 역사는 제주에서 시작한 것이다. 필자의 한국교회 선교역사 소개 연구는 대부분 제주도 선교를 언급하여 제주도 선교의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권영석의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에 관한 연구, 박기호의 ‘한국선교역사’, 김영동의 ‘한국교회의 선교: 선교 초기부터 6.25 이전까지’, 변창욱의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 파송 100년’ 등의 저술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해외 선교지였다.
2. 둘째 제주도 선교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분위기가 반영되었다.
3. 독노회 설립과 제주도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선교하는 교회’에서 찾았다.
4. 제주도 선교는 이기풍 목사가 자원하여 이루어진 한국인에 의한 선교였다.
5. 제주도 선교는 이후 해외선교의 디딤돌이 되었다.

이렇게 제주는 한국교회의 기틀을 세우는 기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제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그간 우리나라의 자연유산, 대표적 관광지, 아름다운 섬으로 보는 관점에 그쳤다.

신명기 1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보는 기준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정탐 당시 그들의 불평으로 40년이 흐른 후였으나, 여전히 젖과 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땅을 통한 수많은 이방 민족을 향한 관심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 1장 1-5절을 통해 제주 선교역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선교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돌하루방 제주 제주도 돌인형 파도 바다 휴가 풍경
▲바다를 배경으로 한 제주도 돌하르방. ⓒ픽사베이
Ⅱ. 신명기 1장 1-5절을 통해 보는 제주선교

지난 40년간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 교육받은 출애굽 당시 20세 미만 청소년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만나 세대는 모두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고,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이 상황에서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을 감당한다.

모세가 요단 강 동편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서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동안 40년간 온 정성을 다해 가르쳤던 광야학교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네 번에 걸쳐 역사 특강이자 광야학교 졸업식 설교를 한 것이 바로 신명기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인 신명기의 핵심은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네 자녀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제주도와 가나안의 지역적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제주에서 시작한 선교적 접촉점과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오늘날 제주도를 다시 기억하게 하셨다.

유배지였던 척박한 땅 제주도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불모지였다. 지난날 조선의 제주도를 거쳐갔던 수많은 외지인들은 물 한 모금 얻기 힘든 제주도에 믿음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다. 그리고 벨테브레(박연) 500년 후, 다시 제주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1. 제주의 명칭과 출륙금지법

제주는 ‘제주(濟州)’라 불려지기 전 ‘탐라’라는 명칭을 썼다. 제주 고대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섬을 보통 탐모라·섬모라(som-mula)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이다. 삼한 지방민과 교역하던 위인(魏人)들에 의해 제주도가 som-mula(섬나라)로 중국인에 알려져,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접하면서 그들의 기록에 그 소리가 가장 가까운 차자(借字)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탐라는 일본의 츠보이 박사에 따르면 tom, 즉 ‘물’과 ‘참, 다량’으로 분석된다. 대양을 원의로 하다가 변하여 대양 중의 섬이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동안 섬의 명칭은 자주 바뀌었고,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제주도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조건으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다.

옛날에 탐라(제주)는 조선의 한 부족국가로서 독립국이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숙종 10년(1105년)때 군현에 편입되기 전까지, 실제 탐라는 백제 및 신라의 부용국이었다.

탐라는 280년간 신라의 부용국으로서 부과된 조공을 충실히 바쳤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면서, 탐라를 고려조 통치 체제에 편입시켰다.

고종조(1214-1259)에 들어와 고려조는 탐라군을 ‘제주’라고 개칭하고, 부사와 판관을 섬에 파견하여 직접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는 명목으로 ‘보호별감’을 상주시키고, 무력으로 도민들에게 위압을 가했다.

제주는 고려 이후 조선에 귀속되었으나 여전히 이민족의 침입과 나라의 수탈로 섬을 빠져나가는 난민들이 발생했다. 인조 7년(1629년)에 이르러서는 제주도 출륙(出陸)을 엄금함과 동시에, 정주민과 제주 여자와의 결혼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특히 여인의 출륙(出陸)을 엄격히 막았다.

이렇게 출륙 단속이 엄격해도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섬을 탈출하는 자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민들에 대한 출륙금지령 철폐와 본토민과의 통혼금지 해제는 순조 23년(1823) 1월경 이뤄진 것으로 본다.

제주도는 200년간 지속된 ‘출륙금지법’으로 제주라는 큰 섬, 감옥에 갇혀 마치 죄인처럼 학대당하고 비인도적 국법에 의해 군역과 부역에 동원돼 소수의 지배 계급의 생활 제공자로서 일생을 희생한 셈이다. <계속>

최상권
▲최상권 목사.
최상권 목사
제주 하람교회
백석대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