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성품 있는 악기’, 성가와 합창의 매력
루터 “음악이 하는 일, 신학이 그나마 대체해”
경배와찬양? 경배는 사라지고 찬양은 흐려져
예배의 시작,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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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용 지휘자의 사무실에는 데이비드 웰스, 디트리히 본회퍼 등 다양한 신학 도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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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입은 우리 인생의 궁극적 가치와 최선, 최우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시편 126편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마음의 기쁨과 입술의 열매인 찬송을 통해 평생 구원의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인생들이 은혜의 열매요 구원의 노래인 찬송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에 더해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를 펴낸 박치용 지휘자는 합창단과 자신의 저서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과 한국교회에 대한 내용에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해 3시간여 동안 설명했다. 서울모테트합창단을 33년째 이끌고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음악 서적들과 함께, 성경과 신학 관련 서적들로 가득했다.
박치용 지휘자가 이끄는 서울모테트합창단(SMC)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민간 프로페셔널 합창단으로 한국 음악문화를 선도해 온 합창단이다. 국내외 많은 평론가들로부터의 호평은 물론, 1997년 협연했던 영국 작곡가 겸 지휘자 존 루터와 2013년 독일 헬무트 릴링 등 합창음악과 교회음악의 세계적 권위자들과 수많은 국내외 유명 음악가들로부터 음악성과 연주력이 세계 정상급 수준이라는 찬사를 들고 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박치용 | 홍성사 | 456쪽 | 20,000원
-성가와 합창의 매력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성품이 있는 악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악기들도 위대하고 훌륭하지만, 연주자가 아무리 악기와 혼연일체가 된다 해도 악기 자체에 성품이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성가와 합창에서는 성품이 있는 악기에서 삶이 배어 있는 음성이 나옵니다. 무한한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적 면에서의 가치입니다.
기능적 면에서 말하자면, 모든 악기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가진 일부를 모방한 것입니다. 모든 훌륭한 악기들을 다 모아놓아야 사람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목소리 안에는 이처럼 뭔가 다른 게 있습니다.
현악기가 아무리 좋아도 계속 들으면 피곤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도 계속 들으면 심금을 울리는 게 약합니다. 관악기도 하루종일 들으면 심란하기도 합니다다. 북이 시원한 소리를 내지만, 몇 시간씩 들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사람 목소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70-80억 모든 사람들의 음성이 다 다릅니다. 같은 음정을 내더라도 결코 같을 수 없는 다양성이 있는 것입니다. 음성이 다르다는 것은 얼굴 모양과 크기, 구강구조와 심폐능력 등이 다 소리에 반영돼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피아노는 건반에서 내는 음이 고정돼 있습니다. 이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에 의해 정립됐습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피아노) 곡집’이 그것입니다. 바흐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교본이었습니다.
바흐 때까지만 해도 음정을 조율하는 기준점이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A(라)음이 440헤르츠(Hertz)로 통일돼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기준이 되는 A음이 지방과 국가마다 달랐습니다. 바흐가 음과 음 간의 간격을 통일시켰고, 이는 음악 악기와 연주법 발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평균율(equal temperament)이란 음과 음 사이 간격의 평균값을 정해 일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바흐는 평균율로 음을 한 옥타브 안에서 균등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률의 원리는 평균율이 아니라 순정율(pure temperament)이라는 것입니다. 음과 음의 간격이 완전히 일정하지 않습니다.
평균율은 일률적으로 음과 음 사이 간격을 1대 1.06으로 나눴습니다. 하지만 순정율은 1대 1.02, 1.22 등으로 들쭉날쭉 차이가 납니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만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화음이 완벽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귀는 여러 음들이 어우러질 때 각 음들의 주파수가 정수 비율일 때 조화와 아름다움을 느낀다. -편집자 주)
평균율은 1.06처럼 정수로 안 떨어지지만, 순정율은 정수로 딱 떨어집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합창은 어떤 오케스트라도 흉내낼 수 없는 완벽한 하모니를 냅니다. 그 말은 반대로 합창 연습이 안 되면 최악의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버톤(倍音, 옥타브 높은 음)이 많으면 상상력이 자극됩니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자극됩니다. 높은 천정 있는 집에 사는 아이들의 상상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음악이 가진 고상함과 놀라운 비밀들은, 사탄이 하나님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악용하기도 합니다. 목회자들께서 클래식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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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의가 함께하는 ‘전인격적 찬송’을 강조하셨는데요.
“지·정·의란 인간 정신의 요체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감정(情)적 기능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음악은 지·정·의가 통합된 영역입니다.
루터는 서신에서 ‘신학을 제외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음악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은 신학이 그나마 겨우 대체할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음악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정),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의)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편에서 말씀드렸듯 찬양이란 하나님 말씀을 음악으로 주석해내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찬송은 은혜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찬송은 은혜를 깨달은 백성들의 최선의 의무요 권리이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찬송의 본체이십니다.
찬양에 대한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17절과 에베소서 5장 18-19절은 내용이 같지만,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이라는 전제가 다릅니다. 둘 모두 시와 찬미과 신령한 노래로 구분했는데, 시의 경우 신학자들 의견이 분분하지만 시편을 노래하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책에도 썼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두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성령을 찬송해야 하는데, 지금은 예수님 없이 성령님만 찬송하고 찾습니다. 예수님 은혜를 거론할 때도 하나님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주일학교를 꾸준히 다니면 신앙의 맥을 다 배울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소요리문답도 성경도 교회에서 안 가르치다 보니 그게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용어도 혼용되고 더럽혀지면서, 교회도 함께 타락하고 있습니다.
경배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것’인데, ‘경배와찬양’이라는 이름으로 열린예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배가 사라지고 찬양도 흐려지다 보니 청년들은 교회를 떠났고, 아이들은 올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전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께서 20여 년 전 장신대 사경회에서 설교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홍수가 나면 물이 넘치는데 마실 물이 없듯, 한국교회에 성직자 수는 늘어나고 기관들은 많아지지만 말씀의 기근이 왔습니다. 교회에서도 찬송을 위한 여러 최신 장비가 넘쳐나지만, 성도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지·정·의의 온전한 전인격적 찬송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성도들이 찬송을 통해 죄성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음악은 찾기 힘듭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를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어떠한 주제의 설교든, 초반에는 설교를 듣는 모든 이들이 죄인임을 자각하게 해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합니다. 음악도 우리 속에 내재된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일으켜야 합니다.
예배 중 찬송과 성가대 찬양은 말씀이 온전히 심길 수 있도록 성도들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정서는 말씀을 담는 그릇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흐 시대 루터교회에서는 설교 전 성가대 찬양 순서를 ‘설교 음악’이라고 지칭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으로 하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 심정은 어떠해야 할까요? 원죄를 탕감해 주셨지만, 세상에 나가서 여전히 죄된 삶을 살았기에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올 자격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겨주셨다는 것이 예배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미사의 첫 순서가 ‘키리에 엘레이손’ 아닙니까.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고서는 당신 앞에 나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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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모테트합창단 공연 모습. ⓒ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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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라는 책 제목이 떠오르는 말씀입니다.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이고, 미디어가 본질을 좌지우지하는 시대입니다. 그 실체보다 미디어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음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찬양한다지만 내용적으로는 사탄적일 수도 있고, 사람을 한없이 우울하고 공황 상태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음악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세 시대 대학에서 음악을 꼭 가르친 이유도 그렇습니다. 정서 순화만이 아니라, 음악은 그 이외의 모든 학문들과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한 유명한 수학자는 ‘수학은 이성의 음악이요, 음악은 감성의 수학이다’라고 했습니다.
수학이 이성적 영역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학자 수준으로 올라가면 상상력 없이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과목이기도 합니다. 음악도 한없이 감성적인 것 같지만, ‘감성의 수학’입니다. 음악에는 수학적 논리성과 이성적 밑받침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분야별로 우수한 신학자들이 있지만, 예배학 분야만은 아직까지 석학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직신학부터 선교학, 성서학에 음악까지 마스터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정’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고 은혜가 되면 다라고 여깁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용되는 단어가 이 ‘은혜’ 아닐까요. 막 찬양하고 나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곡조가 감성을 자극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찬송이 음악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세계를 주석해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찬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의할 때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이것입니다. ‘찬양입니까, 찬송입니까?’ 찬송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흐트러진 이유 중 하나는 온누리교회가 빈야드 음악을 가져오면서 ‘경배와찬양’이라는 말을 곡해시켰기 때문입니다. ‘곡조가 붙은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찬송이라 불러야 합니다.
‘찬양’은 광의의 개념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무릎 꿇고 손 들고 하는 것을 다 찬양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깨달은 주님의 백성들이 그 은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 찬양입니다.
그런데 노래로 부르면 다 찬양이라고 합니다. 성가대를 찬양대라고 이름을 바꾸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성가대’가 왜정 시대 단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웃음). 찬양대라고 붙이려면, 차라리 ‘음악찬양대’라고 해야 합니다. 찬양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오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찬송의 개념은 3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찬송을 왜 만드셨고 왜 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세계를 주석해서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로 그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은혜에 감사·감격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곡에는 이 3가지 요소가 충족돼야 합니다. 곡조 자체가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찬양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곡조의 음률과 리듬과 화음의 내용이 그러한 하나님을 인간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찬송을 통해 은혜받았다는 것은 철저히 내가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찬송의 3가지 요소 중 2가지는 철저히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십자가 못박히심과 부활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기쁘고 복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를 내 삶에 적용함에 있어, 조이풀(joyful)과 엔조이(enjoy)는 다릅니다. 한국교회는 찬송의 요소 중 앞의 2가지는 빼고 마지막 3번째만 말하고 있는데, 이는 찬송의 기능 일부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