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 이성구 님이 기독교 문학 서평을 재개합니다. 솔직하되, 책에 대한 애정을 담아 덜 가혹한 감상평을 펼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역지사지와 배려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 결혼

예수님 마음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육아
호세아서를 그대로 1800년대로 옮겨놓은 책
예측 가능하지만 800쪽 넘는 진지함이 매력적

리디밍 러브 Redeeming Love
리디밍 러브
프랜신 리버스 | 김지현 역 | 템북 | 864쪽 | 22,000원

역지사지와 배려를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 아닐까 합니다. 서로 다른 자아가 만나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일은 마냥 낭만적이지도 않고 향기롭지도 않습니다.

사랑도 감정이기에 처음의 사랑으로 ‘결혼’은 할 수는 있지만 ‘결혼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혼이 생활이 되기 위해 서로의 자아가 충돌하고 고민하면서 맞춰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감내할 용기와 결단이 있다면 결혼은 생활이 될 수 있고, 이로 인해 역지사지와 배려의 덕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를 키우는 일일 겁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오래참음과 끈기를 요합니다.

똑같은 태도로 자녀를 대해도, 어제는 좋아했다가도 오늘은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립니다. 요구하는 것도 많고 부모의 개인생활을 침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화뇌동, 표리부동의 전형을 보여주고 논리가 통하다가도 어떨 땐 무논리와 궤변으로 억지를 보입니다.

말을 모를 땐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못해 화를 내고, 말을 알 때는 부모의 머리 위에 서는 언어유희로 농락하기도 합니다. 사랑스러워 보이다가도, 비열해 보이기도 합니다.

정글에 두면 동물로 자랄 수 있는 사람을 인격체를 지닌 사람으로 키우는 일은 그 모든 합리와 불합리, 논리와 비논리, 애교와 생떼를 품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는 건 ‘사람을 키우는 일은 사랑을 키우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여전히 사람을 키우는 높은 사랑을 원한다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말입니다.

이 책 <리디밍 러브>은 성경 호세아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1800년대 골드러시가 한창인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합니다.

8살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아 팔려 나간 사라는 이름도 엔젤로 바뀌고 몸을 팔아 먹고 사는 창녀로 삽니다. 그러다 스물세 살에 세 살 많은 미가엘 호세아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리디밍 러브 Redeeming Love
▲영화화된 <리디밍 러브> 트레일러.
이 책은 호세아서를 그대로 1800년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건, 진행 과정과 결말이 호세아서와 똑같다는 겁니다. 읽으면서 예상한 그대로, 여자 주인공은 일탈하고 남자 주인공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책을 읽히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궁금함입니다. 다음에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에 대한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분명한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 이 책은 구성이나 심리 묘사, 대사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소위 오글거리기까지 합니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와 ‘철수는 사랑한다. 영희를’은 같은 내용이지만 느낌이 다릅니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는 밋밋합니다. 하지만 ‘철수는 사랑한다. 영희를’은 궁금해집니다. 철수가 과연 누구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중에야 대상이 영희라는 걸 알게 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문장을 비트니, 같은 내용이라도 재미가 있는 겁니다. 이 책은 호세아서를 그대로 이식했다는 예측 가능한 내용을 빌려왔으면 구성이라도 비틀어 재미라도 줘야 하는데, ‘철수가 영희를 사랑한다’ 그대로 가져갑니다. 홈런 치기 좋은 볼이죠.

여기에 다소 실소가 나오는 단점은 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성경 인물들 이름과 같다는 겁니다. 여자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이죠. 남자 주인공은 너무도 노골적인 호세아. 조연들의 이름도 바울, 미리암, 스데반, 누가…. 읽으면서 그렇게 작명 실력이 없단 말인가 싶었습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읽힌다’는 점입니다. 864쪽의 두꺼운 책임에도 읽혔습니다. 예측 가능한 내용임에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 쉼을 짧게 갖고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어떤 힘이 있기에 읽힐 수 있었던 걸까요?

세상에 이런 사랑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너무 현실과 괴리된 고답적이고 환상의 사랑입니다. 떠나가도 받아주고 멸시해도 품어주는 이 답답한 사랑이 이 세상에는 어머니 외에는 없기에, 우리는 이런 사랑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떠나가는 여자 주인공에게 ‘어서 돌아가라’고 남자 주인공 대신 애원하게 되고, 남자 주인공에게는 ‘어서 저 여자를 되찾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라’고 응원하게 합니다. 그리워한다는 건 이런 사랑을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부러워한다는 뜻도 됩니다.

또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 묘사가 800쪽 넘게 전개되다 보니 ‘사랑’의 ‘사’와 ‘랑’ 사이 여러 감정의 진폭을 세밀하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어, 그것이 삶인 것 같습니다.

삶이란 판사의 판결문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결정을 하고, 하나의 표현을 해도 수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만약 300쪽 내외로 그쳤으면 ‘뻔하다’로 끝났을 겁니다. 800여 쪽으로 늘리니 어떤 이에겐 지루하다 할 수 있겠지만, 진한 사랑을 잘 담아내는 분량입니다.

종교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예수님의 사랑도 이와 같겠다는 이입이 됩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원형으로 지금도 내 삶에 호세아가 되어 사랑해 주는, 그것은 나도 누군가의 호세아가 되어 사랑을 하라는 메시지가 됩니다.

단순히 ‘사랑하라’는 설교와 강론보다, 소설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니 예수님의 사랑이 더 절절해지고 간절하게 와닿습니다. 소설의 힘이고 이 책의 힘입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