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2년 7월 3일
장소: 서울 영등포 광야교회
본문: 시편 100편 1-5절

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저는 광야교회를 아주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역을 하고 있는 아주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008년 4월 26일 주일 처음으로 여기 와서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은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21년 8월 22일 주일 여기 18번째로 와서 ‘친밀한 교제와 사랑과 소통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22년 1월 16일 주일 여기 19번째로 와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22년 7월 3일 주일 여기 20번째로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러주신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과 광야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기리며’라는 제목으로 저의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감사의 간증 설교를 하려 합니다. 저는 11살 때부터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별하고 평생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았고, 결혼한 다음 불치병을 지니고 태어난 어린 아들 철원이를 4살 때 이별하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극심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제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도우심과 은혜와 축복이 되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첫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에 대한 감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를 하시다가 47세에 순교하신 분이 바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金冠柱) 목사님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신의주에 계실 때나 평양에 계실 때 자주 감옥에 잡혀 가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이따금씩 저를 보시면서 칭찬을 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저는 일제 시대에 신의주 감옥에 갇혀 계시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감옥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를 직접 만나 뵙지 못했고 담장 밖에 서서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고 소리쳐서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제가 “뜸북 뜸북 뜸북 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 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라고 노래를 부른 다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쳐서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제가 해방 후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주일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고 정학을 당하면서도 제가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의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신 분이셨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지니셨던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 아버지는 평양에서 장차 있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대비하여 기독교 자유당 결성을 준비하는 일을 김화식 목사님 등과 함께 추진하시다 이 일로 1947년 말 평양에서 김화식 목사 등과 함께 감옥에 투옥되셨습니다. 그 후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시다가 1950년 6월 23일 경 6. 25전쟁 이틀 전에 순교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평남 안주 출신인데 일본으로 가서 법학공부를 하시다가 신학을 공부하시게 되었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후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나는 김관주 전도사를 소개했다. 김전도사는 본래 일본 동경 일본신학교 (지금의 동경신학대학 전신) 출신으로 내가 미국에서 나오는 길에 동경에 들려서 알게 된 사람이다. 김전도사는 일본에서 의학전문을 나온 여의사 부인과 함께 난지 얼마 안된 아들(지금 합동신학교 교수인 김명혁 박사)과 함께 부임했다.

교회는 사택도 마련해주고 부인이 의사였기 때문에 병원도 마련해주어 애린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의료사업도 잘 했다. 일년이 지난 후 김목사는 열심히 교회를 받들어 섬기는 유능한 설교자가 될 뿐 아니라 원래 장자의 풍이 있는데 다가 강직하고 진실하고 능력도 있어서 일제 말기 때 당국과의 마찰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잘 해결해서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미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내가 미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돌보지 못하게 되자, 그 뒤를 김목사가 맡아 평북교계를 이끌고 나가는 중심인물이 되었다.”(한경직「장로시무 핸드백」, pp. 317-318).

한경직 목사님은 해방 후 월남하셨는데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46년까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하시다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기독교 자유당 결성과 관련하여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투옥되었다가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 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까맣게 탄 가루를 뒤집어쓴 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 나 남조선 갈래요. 여기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래 그러면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성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만 11살 되던 해인 1948년 8월 어느 날 밤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월남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몇 어른들과 함께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북한 경비군인들에게 발각된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그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설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남쪽을 향해 혼자 40여분 정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밭을 달리고 강을 건너서 남한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갔는데 그날 밤 38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청년 한 사람이 저 보고 “너 어디로 가냐” 라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누구와 같이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오던 사람들이 모두 붙잡혔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기차에 태워 서울에까지 데려 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이 “천사”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7번지에 살고 계시던 이모님을 찾아가서 만난 다음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저를 가장 좋은 길로 계속해서 인도하셨는데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셨고, 아주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아주 잘 하게 하셨습니다.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목회의 일과 교수의 일과 선교의 일을 하게 되었고 한국교회 연합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너무 많이 베풀어 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고난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신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과 감동과 축복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2. 어머니 유춘택 사모님

둘째로,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저에게 쏟아 부으신 저의 어머니 유춘택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니는 저를 극진히 너무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항상 동생 하나는 10리쯤 멀리, 다른 동생 하나는 50리쯤 멀리, 그리고 다른 동생 하나는 100리쯤 멀리 두고 살지라도, 어머니는 저를 언제나 어머니 곁에 두고 살겠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를 특별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맏아들이기도 했지만 제가 어머니의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 했고, 어머니가 원하는 일들을 미리 알아서 해 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저를 볼 때마다 다음 같은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어머니는 저에게 야단을 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저를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야단을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유춘택(柳春澤)씨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동렬 씨의 조카였고, 하얼빈에서 의사 일을 하면서 형의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던 유동운 씨의 장녀였으므로 남다른 민족애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중 신학공부를 하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서 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갓난 아기였던 저를 데리고 신의주로 왔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처음에는 그리 깊지 못했으나 차츰 깊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는 애린원을 개원하고 신의주 제이교회 신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투옥된 아버지를 찾아 감옥을 자주 왕래하면서 어머니의 신앙심은 점차 깊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긴 뒤 다시 투옥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서 사동 탄광을 한 달에 한 두 번씩 왕래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평양 제5인민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주일성수 문제로 거의 매주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확고한 신앙적 신념을 이해하셨거나 저의 장래를 내다보셨든지, 제가 남쪽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 어려운 요청을 울면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가, 그러면 가” 라고 울면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맏아들을 포기하는 가장 큰 희생적인 아픔과 슬픔을 감수하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머니와 생이별한지 17년 후인 1974년 가을 어느 날 제가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홍콩을 통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사진을 받아 보시고 제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직접 써서 보낸 편지였는데 저는 그 편지를 받아 떨리는 가슴으로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할 수 가 없었습니다.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한 자 한 자에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이 깊고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글씨체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어머니가 이응 자(ㅇ)를 항상 크게 쓰시므로, 제가 어머니의 글씨를 흉내내어 이응 자를 크게 쓰곤 하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편지구나! 어머니의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절규였습니다.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의 절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히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어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너무나 짧은 절규였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 짧은 사연 가운데 혈육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아픔과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소원과 간구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머니의 편지가 북한으로부터 미국에 있던 나에게 날아올 수가 있었을까요? 저는 1966년 여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김의환 박사를 통해 홍콩에서 어머니에게 편지 한 장을 저의 사진 두 장과 함께 북한으로 띄워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저의 편지와 사진을 받아 보시고 감격에 겨운 글을 써서 홍콩을 통해 저에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 다시 한 번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고 어머니도 다시 저에게 동생들의 소식을 알리는 편지 한 장을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어머니의 편지를 항상 머리맡에 놓아두고 읽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를 복사하여 한국에 있는 할머니와 이모님들을 비롯한 여러 친척들에게 한 장씩 보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앙정보부에서는 집집을 찾아와서 편지 사본들을 모두 압수해 갔다고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총회신학교에서 교수하던 1977년 11월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학교로 가려고 집을 나서는 데 어떤 사람 둘이 저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 잠깐 시간을 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동안 자문받을 일이 있는데 회사에 같이 갈 수 없냐는 것이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무슨 자문이냐고 물었더니 중요한 문제에 대한 자문인데 김 박사님의 자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래 귀가 커서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그 날도 그들의 말을 쉽게 믿고 그들의 좋은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를 데리고 간 곳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침부터 밤이 맞도록 아니 그 다음 날 이른 새벽까지 두 사람이 저를 무섭게 취조한 것은 제가 북한에 편지를 보낸 일과 일요일에 국가시험과 학도 군사훈련을 하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며 주일성수를 강하게 주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고 당당한 마음으로 그들의 강압적인 취조에 응했습니다. 주일성수를 방해하면 망한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잠시 쉬고 있는 동안에 내가 글을 쓰고 있으니까 무슨 글을 쓰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을 하니까 기가 막혀 하면서 “당신이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 라고 대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나가고 안 나가는 것은 당신들의 소관이 아니니 걱정 말고 다음 주일 교회에 와서 내 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밤 2시가 넘도록 저를 무섭게 취조한 다음 책상 하나 있는 지하실 방에서 자라고 해서 저는 아침까지 단잠을 아주 잘 잤습니다. 아침이 되어 저를 깨웠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올 때는 좋은 차에 태워주었는데 갈 때도 좋은 차에 태워주어야 가지 않겠냐고 분명하게 말을 했습니다. 결국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좋은 차를 세워서 저는 좋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잡혀 가서 강하게 심문받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중에 제가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의 편지 원본을 압수해갔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압수당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97년 1월 5일, 뜻밖에 어머니의 편지 사본 한 장을 이모님 한 분으로부터 전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예쁜 사진도 함께 전해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30여 년 전의 감격이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을 다시금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를 부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았습니다.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쓴 글이었는데 어느 신문에 그대로 실렸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못다 부를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좋고 또 좋은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압수당했던 어머니의 편지 사본을 20여 년 만에 다시 찾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5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예쁜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불러 보았습니다. 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너무나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애절한 절규를 한마디 한 마디 다시 들으면서 어머니의 가슴에 피 맺힌 아픔과 슬픔을 가슴으로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너무나 사랑하시다가 나중에는 나를 남쪽으로 떠나보내시는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맏아들을 스스로 잃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스스로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로 하여금 가장 큰 희생을 치르며 가장 큰 아픔과 슬픔을 안게 한 나의 불효를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가 있아옵니까? 어머니, 나의 불효를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에게 얼굴 한번 보여 드리지 못했고, 그렇게도 잡아보고 싶어하시는 손 한번 쥐어 드리지 못한 채 20여년이 지났고 30여년이 지났으며 이제는 50여년이 지났습니다. 이 몹쓸 불효 자식을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철도 없이 어머니를 훌쩍 떠나 남쪽으로 온 다음 한 2년 동안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 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물론 이모님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셨지만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나는 부족함이 없는 한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아니 너무나 넉넉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고 싶은 단 한가지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를 떠나 남쪽으로 온 저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이 사랑하셨고 너무나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길 수도 있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 나는 병원에 가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행복한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특히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팔순이 훨씬 지나신 어머니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나는 어머니를 마음껏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몸도 씻어 드리고 싶고, 음식도 대접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어머니의 품안에서 함께 잠도 자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시다면 먼저 순교하신 아버지를 뵈올 터이니 어머니의 슬픔을 거두시고 위로와 기쁨을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사이 나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많이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처음 드려보는 기도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 뵈올 날을 날마다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천국에 간 어머님의 손자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철원이, 나를 늘 칭찬해 주시면서 나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뵈올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 하루를 바르고 진실하게 살아 가겠습니다. 어머니가 진실하게 사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997년1월12일 불효자식 명혁 올림.”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저에게 쏟아 부으신 분을 저의 어머니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3. 어린 아들 철원이

셋째로, 뇌수종이란 불치의 병을 몸에 지니고 태어난 어린 아들 철원이가 고난과 슬픔과 아픔 중에서도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살다 세상을 떠난 어린 아들 철원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 철원이가 세상을 떠난 후 제가 어린 아들 철원이를 그리워하면서 쓴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글이 신학교 신문에 그대로 실렸는데, 많은 학생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두고두고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고생과 수고로운 삶을 다 마치고 이제는 주님의 품 안에서 고운 옷을 입은 동무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즐거워하는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즐겨 부르던 찬송소리가 지금도 아빠 귀에 쟁쟁하구나.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걱정 근심 대신 재미 많도다.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도다. 영화로운 곳에 있는 동무들 고운 옷을 입고 주를 섬기네” 가사의 뜻을 되새겨 물으며 몇 십 몇 백 번을 아빠와 함께 부르던 그 찬송가의 뜻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아빠, 걱정 근심이 아야 아야 이렇게 아픈 거지? 재미 많은 게 뭐야? 아프지도 않고 좋고 기쁜 거지? 아빠, 누구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이렇게 물어봐” “그래 철원아, 누구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철원이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뭐” “누가 부르셨나?” “예수님이 부르셨지 뭐” “철원아 네 마음이 슬프나 기쁘나?” “기뻐!” “왜 기쁜가?” “예수 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기쁘지!”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견디기 어려운 그 아픔 중에서도 너는 그렇게도 잘 참았고 기뻐했지! 철원아 너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아픔을 당하였단다. 머리 속 뇌수의 압력이 너무 심해져 머리뼈가 벌어질 정도의 아픔을 당하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울곤 하던 네 모습을 생각만 해도 이 아빠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아픔을 당할 때마다 아빠에게 기도해 달라고 했었지? 이 아빠는 너 때문에 기도하는 법을 차츰 배우게 되었단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죄를 뉘우치며 간절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너 철원이었단다. 아빠가 너를 위해 오래 오래(때로는 종일) 기도할 때마다 너는 그렇게도 좋아했지. “아빠는 기도를 잘 해서 최고야!”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렇게도 괴롭고 아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너는 한 번도 하나님이나 아빠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지! 마지막 1년 동안 시력을 잃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너는 한번도 답답하다고 불평하지 않았지! 너는 오히려 사람들이 “아이고” “죽겠다” 라고 말하면 “아이고 소리 하지마” “죽겠다 소리 하지마. 그건 나쁜 말이야” 라고 했지. 마치 “나는 이렇게 힘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아이고 죽겠다’ 라는 말 한 마디 안 하는데 당신들은 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라고 타이르듯이!

아빠는 너의 마음 속에서 천국의 평화와 기쁨을 볼 때마다 천국이 점점 더 가까워짐을 느끼곤 했단다. 네가 시력을 잃은 마지막 1년 동안 때때로 “아빠 하늘이 보여!” “아빠 예수님이 오셨어” 라고 말하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것을 보는 너의 눈을 가리우시고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여시었던 것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괴로울 때마다 “아빠 나 천국 가고 싶어. 엄마, 아빠, 누나 다같이 천국 가고 싶어. 천국 가고 싶어. 천국에 가면 구주 예수님이 나 아픈 것 완전히 다 고쳐주시지”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지. 너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곤 했었지. “아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피 흘렸지! 손에도 발에도 못 박히어 피 흘리셨지! 아빠 예수님은 나보다도 더 아프셨지!”

네가 하던 말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너무도 귀한 아픔으로 가득히 미어지는 것만 같구나! 너는 예수님 앞에 설 때 그래도 조금은 떳떳함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너 위해 당한 고통의 몇 만분지 일을 너도 경험했으니 말이다. 고난의 축복을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너 철원이었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이 땅에서 4년 동안의 너의 삶은 이 아빠를 위해서 산 값진 삶이었단다. 아빠가 졌어야 할 십자가를 네가 대신 졌으니 말이다. 철원아! 고맙다! 너는 아빠에게 얼마나 귀한 설교와 간증과 교훈을 주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나는 네가 너무도 귀중하고 사랑스럽고 보고 싶구나! 네가 있는 천국이 그렇게도 그리워지는구나. 너는 지금 무덤에서 잠자는 너의 몸을 바라보며 영화로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고 있지? 철원아, 아빠도 너와 꼭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부활의 아침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사도 요한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던 기도가 이제는 아빠의 기도가 되기 시작했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그렇게도 즐겨 부르던 수많은 찬송가! 아빠가 가사를 잘 모르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네가 가사를 가르쳐주면서 같이 부르던 그 찬송가들을 지금 혼자 불러볼 때마다 너의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구나. 너는 찬송가와 고전음악을 그렇게도 좋아했지. 이제는 천군 천사와 함께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쁘게 노래하거라.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날마다 즐겨 암송하던 그 수많은 성경 귀절을 지금 혼자 읽어볼 때 그 말씀들의 뜻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구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네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네가 늘 암송하던 욥기 23:10 말씀과 같이 네가 가는 길을 하나님은 다 아셨고 너를 보배와 같이 정금과 같이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너를 단련하신 것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비록 견디기 어려운 괴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너만큼 귀중한 삶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 없는(상대적으로) 깨끗한 삶, 고통을 당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와 교훈을 안겨주며 천국의 평화와 구원의 즐거움을 간증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값진 삶이 어디 있겠니? 아빠는 너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새로운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또한 엄마 아빠에게는 비할 수 없는 효자였단다.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에는 미국에 가서 전문의사의 진찰도 받았고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친척들을 만나 인사도 드렸으니 너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현 권사님의 기도를 받은 후에 하늘 나라로 감으로 부모의 마음에 아무런 한스러운 마음을 남기지 않았으니 얼마나 효자였니! 그러나 아빠는 너에게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른다.

“아빠, 신학지남 원고 써야 돼?” “아빠, 강의 준비하느라고 바뻐?” “아빠, 나하고 좀 놀아!” “아빠, 설교 준비 해야 돼?” 아빠는 늘 바쁘게 지내느라고 너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놀지 못했단다. 네가 천국으로 가기 4일 전에도 학교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하면서 “아빠, 나 머리 아퍼, 아빠 빨리 와” 라고 했지만 그날도 아빠는 원고 쓰느라고 밤늦게야 집에 돌아갔단다. 왜 좀 더 일찍 들어가지 못했던가 생각하면 아빠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미안하다! 그러나 고맙다! 어서 속히 철원이 만날 날만을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커서 목사님이 되어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겠다고 늘 말하곤 했지. 네가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되어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려보낼 수 있게 되기를 아빠가 늘 기도하던 것을 너도 잘 알지? 철원아 이제는 이 아빠가 너 대신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 철원이의 몫까지 이 아빠가 다 하겠다. 철원이의 소원을 이 아빠가 다 이루어 줄께.

아빠는 너의 몸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노회에 들려 강도사 인허를 받았단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목사 안수도 받게 될 것이다. 너의 몫을 이 아빠가 다 해주마! 아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보고 싶은 철원이 얼굴을 기쁨으로 대하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참으로 고맙다. 아빠는 너의 무덤 앞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우려고 한다. ‘고난의 의미와 천국의 평화를 가르치고 먼저 주님의 품으로 간 어린 아들 철원이가 영화로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여기 편히 쉰다.주후 1973년 11월 11일에 나고 주후 1977년 10월 10일에 가다.’』

극심한 고난과 슬픔과 아픔 중에서도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난 철원이를 저의 아들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 철원아! 고맙고 또 고맙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과 광야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