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기독문학세계] 사랑의 결정 작용
인류 쌓아올린 문명과 역사에서, 의미 찾아가는 여행
모든 일 각자 삶에서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
하나님 맡긴 시간들 협력해 더 위대한 문명과 역사로
보잘것없는 나뭇가지 염광에서 다이아몬드 태어나듯
몇 번의 빈 스윙으로 호흡을 조절 한후 티박스에 섰다. 먼산 봉우리가 붉게 타오르면서 태양이 막 얼굴을 보이려는 시간이다. 나는 티를 꽂으려 엎드리다 놀라서 다시 집어들고 일어섰다.
발 밑의 잔디들에 이슬이 맺혀 티박스 전체가 보석장식을 단 듯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무숲을 바라보니 나무 숲도 온통 반짝이는 결정체들로 뒤덮혀 있다. 아마 지난 밤에는 바람이 있었고 습도가 꽤나 높았던 모양이다. 눈부신 결정체에 순간적으로 내 정신이 반응을 일으킨다.
그랬지…, ‘결정 작용’.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다. 본명은 마리-앙리 벨(Marie-Henri Beyle, 1783-1842)이며, ‘스탕달’이란 그가 사용한 수 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연애론’의 대가일 만큼 평생 사랑을 추구하며 살다 59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파리 근교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묻힌다. 스스로 지은 묘비명에 “Henri Beyle, Milanese: he lived, wrote, loved”라고 씀으로써, “살았고 글을 썼으며 사랑했다”고 자신의 일생을 규정하였다.
내가 읽은 스탕달의 첫 작품은 그가 39세 때 출간한 <연애론(1822)>이었고,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은 56세에 쓴 <파르마 수도원(1839)>이었다. <파르마 수도원>은 지난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스탕달의 56세 때 작품이다.
그리고 스탕달이 죽은지 백오십 년이 되던 해 봄날 나는 그의 무덤, 묘비명 앞에서 작가의 혼과 조우하였다. 이른 봄날이었지만 파리의 하늘 밑은 음산했다. 무덤들 사이로 메마른 바람이 울며 지나갔다.
<연애론>에서 <파르마 수도원>까지 대부분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로맨스는 ‘결정 작용’에 의해 시작되고 소멸하고 다시 성장한다.
그의 <연애론>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미지의 결정 작용과 실체적 결정 작용’이라는 두 단계를 통해 사랑의 완성 과정을 심리적·정신적 형태로 펼쳐보인 작품이다.
‘결정 작용’이라는 용어의 뜻은 이렇다. 잘츠부르크 소금 광산에서는 겨울이 되면 낙엽이 진 나뭇가지를 폐갱도 속 깊이 던져놓곤 한다. 한두 달 지난 다음에 그것을 꺼내면 온통 반짝반짝하는 결정으로 뒤덮혀 있어서 마치 다이어몬드 장식을 단 것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아주 보잘것없는 잔가지들조차 결정으로 눈부시게 반짝거리며 하늘하늘 춤을 춘다. 본래 나뭇가지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1812년이었다. 스탕달은 오랜 친구인 게라르디 부인과 잘츠부르크 인근의 폐염광으로 여행한다. 거기서 만난 한 장교와 게라르디 부인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 장교는 스탕달이 알지 못했던 게라르디의 장점과 매력들을 끝없이 언급하면서, 열애의 감정의 깊이를 설명한다. 심지어 그녀의 손등에 있는 갈색의 천연두 자국까지 흠모하는 것을 보고, 스탕달은 ‘결정 작용’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결정 작용’이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사랑하는 상대가 미(美)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끄집어낼 수 있는 정신 작용을 일컫는다.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제 눈의 안경이듯, 무조건 사랑에 빠지는 그 단계를 이미지의 결정 작용이라 보았다.
반면 사랑의 열정이 식어지고 상대방의 결점이 보이고 실체를 모두 알고 난 다음에도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은, 실체적 결정 작용에서 나온다고 했다. 결정 작용의 두 번 째 단계는 존재 자체에서 가치와 미를 끄집어낼 수 있는 정신 작용이다.
새벽 티오프 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던 이슬 결정체들은 곧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해가 비치면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아름다움이다. 너무 찰나적이어서 아쉽고 너무 허망해서 더 애틋하다.
그러나 풀잎 이슬의 실체는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지 않는가. 그 의미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한 영혼이 깃든 결정체이다. 싱그런 생명체이다. 예술가의 혼이 서린 악기 끝의 핏방울이다.
나는 전율적인 기쁨에 몸을 떤다. 삶이란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정신 작용이다.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과 역사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문명의 보고로부터 배우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체험한 모든 일들은 역사처럼 개인의 삶에서도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이로운 일은 하나님의 품에 맡겨진 우리의 시간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더 위대한 문명과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마치 보잘것없는 나뭇가지가 잘츠부르크의 염광에서 다이아몬드 결정체로 만들어지듯이. 우리는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송영옥
영문학 박사, 기독문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