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범죄 만연 속 발전과 번영 외치는 것은 위선”
켄트리지의 작품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작품 속 약자들과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에 주어진 소명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

윌리엄 켄트리지
▲'더 달콤하게 춤을, 마카브르 단스(윌리엄 켄트리지, 비디오 인스탈레이션, 2012)’.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2012년 카셀 도큐멘타가 열리는 독일의 소도시 카셀을 찾았을 때였다.

세계 각국에서 초대된 작품들을 돌아보다가, 켄트리지의 작품을 만나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의 작품은 영상 이미지에다 사운드, 삐걱거리는 기계까지 합쳐진 복합적인 설치 작업을 선보였는데, 특히 사방의 벽에 ‘마카브르 단스(Macabre Danse, 죽음의 무도)’ 영상을 비추는 것이 흥미로웠다. 카셀 도큐멘타에서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면, 그때의 방문은 별 감흥 없이 끝났을 것이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요하네스버그 아트 파운데이션에 입학하여 미술을 전공하였으나, 한때는 배우와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현장에 참여하기도 했다. 결국은 원래의 전공으로 돌아와, 지금은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예술가가 되었다.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은 그의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던 무렵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인들의 인종차별을 보며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는데, 그가 변호한 인사 중에는 상징적인 인권운동가 만델라가 포함되어 있다. 켄트리지가 유년시절에 접했던 남아공 정부의 샤프빌 유혈진압 사건의 충격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목탄 애니메이션으로 되어 있고, 세심한 스톱모션프로세스를 이용하여 촬영하였다.

<광산>(1991)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가 흐르는 가운데 그곳 책임자로 보이는 인물이 커피 프레스를 아래로 누르자 커피 프레스는 광산의 수직갱도로 변해 채굴장을 거쳐 흑인 광산 노동자의 숙소와 샤워장까지 내려간다. 드릴로 구멍을 낸 곳은 파편을 사방으로 내며 노동자들의 침상으로 변한다.

과거 노예제의 비인간성이 간직된 노예선 브룩스(Brooks) 이미지를 이용해, 켄트리지는 남아프리카 광산업의 현실을 고발한다.

그의 작품 모티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주위로 눈을 돌려 사회적 불의를 주제로 다룬다.

윌리엄 켄트리지
▲‘블랙박스(윌리엄 켄트리지, 비디오와 설치, 2005)’.

<블랙박스>는 나미비아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헤레노족 학살사건에 관한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독일 제국이 나미비아를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독일군들은 나미비아인들의 땅과 가축을 약탈했고, 이에 반발해 나미비아의 헤레로족은 나마족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독일 점령군은 헤레로족 몰살을 지시했고, 헤레로족 봉기에 동참한 나마족 10만여 명을 무참히 학살한 제노사이드를 자행하였다. 여기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은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들 상당수가 가혹한 고문과 기아, 질병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블랙박스>의 극이 시작되면 무대에 확성기가 등장해 ‘애도작업(trauerarbeit)’이라고 쓴 독일어 간판을 들고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뒤이어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해 해머로 해골을 내리치는 장면은 학살의 잔인함을 표현한다. 해머로 부서진 해골은 기계가 되었다가 해체되기까지 조각난 사람이 되기를 반복한다.

마지막 장면은 사냥꾼에 의해 코뿔소가 힘없이 죽어가는 실제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코뿔소는 아프리카인을 상징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는 장면을 통해 작가는 가혹한 인권유린의 현실을 질타한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들을 보다보면 메시지를 강조한 나머지 조형적인 부분들을 소홀할 수 있는데, 그의 경우 조형적인 부분에 대한 세심함도 잃지 않는다.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수많은 목탄 드로잉으로 이루어진다. 즉 한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목탄으로 드로잉을 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그 드로잉을 지우고 다시 그리고 찍고 수정하며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고와 시간은 그의 작품에 큰 힘이 된다. 여기에다 음악 연주와 영상 이미지, 설치 구조물을 결합시키는 멀티센스환경은 그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은 ‘역설의 수사학’이다.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고 할지라도, 작가는 거기에 유머와 충격완화 기술을 동원해 관객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사용한다.

<사랑이 충만한 캐스피어>는 제목과 다르게 독재와 싸우다 희생된 아프리카인들을 무차별하게 진압하는 데 사용한 중장비 군용차량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제목만으로는 작품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 실린 메시지는 폭력적이고 소름 끼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캐나다 국립미술관 드루인 비세부아(Drouin-Bisbois)가 ‘켄트리지의 걸작중 하나’로 손꼽은 <마카브르 단스> 연작도 그런 작품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대표작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춤을 추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화면을 가로질러 방 주위를 돌며 엄숙하게 걸어가는 인물은 걸을 때마다 머리 위로 종이를 날린다.

21인조 브라스 밴드가 경쾌한 연주를 하는 가운데 에볼라 환자, 정치인, 광부, 성직자, 해골 등 더 많은 그룹이 전시 공간을 채우며 퍼레이드를 펼친다.

‘마카브르 단스’는 중세에 유행하던 양식으로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죽음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도상이며, 춤과 음악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타락한 성직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이 애용하던 도상이기도 했다. 물론 켄트리지의 연작은 이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21세기 ‘마카브르 단스’에서는 주로 부패한 권력자들을 비판할 용도로 이 그림 형식을 차용하였다. 작가는 흥미롭게도 이 무거운 주제를 ‘좀 더 부드럽게 춤을 춰라(more sweetly play danse)’고 명명함으로써 전혀 다른 연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줄거리에 있어서는 아프리카인이 직면한 고통스런 현실을 언급하고 있다.

비세부아는 이 퍼레이드를 ‘자유, 저항, 희망’을 향한 발걸음으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유색인들의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라는 주장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동정심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그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우리는 종종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제도 폐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두신 커다란 목표(1787. 10. 28일 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노예제도는 윌버포스나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용기 있는 정치인들 덕분에 폐지되었지만, 그 망령은 오늘날 ‘인종차별’이란 이름으로 되살아나 지구촌 주위를 배회한다.

켄트리지는 ‘혐오범죄’가 만연한 사회에서 발전과 번영을 외치는 것은 위선이라고 주장한다. 켄트리지의 작품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