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 잃은 美 참전용사 “너희가 빚진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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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사진작가 라미현, 참전용사에 대한 헌정

웨버 예비역 대령이 말하는 자유인 의무
자유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전하는 것
북한 동포들에게 자유 전달할 의무 있어
거짓 평화 외치는 정치인 행태와는 달라

▲故 윌리엄 웨버 대령(1925-2022). 사진 라미 현 작가

▲故 윌리엄 웨버 대령(1925-2022). 사진 라미 현 작가

깊게 패인 주름, 덥수룩한 수염, 꽉 다문 입술, 이마에 핀 검버섯, 건조하고 살점없는 피부, 검은 눈썹. 이 인물사진에 담긴 노인의 표정이다.

사진 속 인물은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눈빛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숨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잘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강렬함, 그것이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사진작품에는 특별한 기법이 들어가 있지 않다. 인물의 모습을 담담히 담아내려고 배경을 없앴고 조명을 주어 최대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대신 인물의 표정을 살리기 위해 극사실주의 회화처럼 터럭 하나도, 주름 하나, 땀구멍 하나라도 놓칠 새라 정교함을 살렸음을 볼 수 있다. 작가들은 종종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피력할 때, 디테일한 재현을 애용한다.

사진의 주인공은 윌리엄 웨버(William Bill Weber, 1925-2022)이다. 사진작가 라미현은 윌리엄 웨버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를 촬영했을까? 과연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윌리엄 웨버를 소재로 한 다른 사진은 그의 전신상을 찍은 것인데, 이 사진에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만한 부분들이 등장한다. 그의 옷에는 훈장이 달려 있고, 약간 큰 옷을 걸치고 있다. 그런데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잃고 지팡이에 힘겹게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 웨버 예비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강원도 원주에서 한 팔과 한 다리를 잃은 참전 군인이다. 휴전을 몇 개월 앞두고 입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1년 넘게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상륙작전, 서울 탈환, 평양 수복 등 많은 전투에 군사작전에 참여하였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일본에 진입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는 조선인 노역자들을 해방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부터이다.

그의 부대는 일본의 군수공장, 탄광, 비행장, 항만을 돌며 강제노역자들을 찾아내 2천 5백여 명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한국에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던 윌리엄 웨버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6.25 전쟁의 승부처인 원주에서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으며 막바지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라미현이 참전 군인들을 뷰파인터에 담기 시작한 것은 2016년 군복 입은 군인들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 무렵 특별한 손님과 만나면서부터라고 한다. 전에 그는 다른 작가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진작가였다. 그런데 전시장을 방문한 미 해병대 출신 살바도르 스칼라토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故 윌리엄 웨버 대령(1925-2022). 사진 라미 현 작가

▲故 윌리엄 웨버 대령(1925-2022). 사진 라미 현 작가

라미현은 먼저 그의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어드렸다. 그런데 작업실로 돌아와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스칼라토의 눈에서 빛나는 특별한 눈빛을 본 것이다. 전혀 만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해 싸웠는데, 과연 어떤 이유로 퇴역군인은 자부심을 느꼈던 걸까?

라미현은 그 궁금증 덕분에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고, 2017년 이후 국내를 포함하여 세계 14개국을 돌아다니며 1천 5백 명이 넘는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작가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게 하고 그들의 자부심을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윌리엄 웨버 대령의 한국 사랑은 전역 후에도 계속됐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재단(KWVMF) 회장을 맡아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비 건립을 주도했고, 2006년부터는 한국전 추모의 벽 건립운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전쟁 중 사망한 미국 3만 6천여 명과 한국인 7천 1백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벽(Wall of Remembrance)’ 건립에 주력하면서 한국전쟁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데 힘썼으며, 후대들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전파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던 중 날아온 지난 4월 9일 그의 임종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필자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탐방작업 <솔저 프로젝트>에서 주목한 부분은, 그가 사진 작품을 참전용사들에게 무료로 선물한다는 점이다. 사비를 들여 진행하므로 최소한의 재료비라도 받아야겠지만, 그는 참전용사들에게 한 푼도 받지 않고 선물하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 제일 크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진에 대한 특별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사진은 돈을 버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진을 현 시대를 기록해 다음 세대에 전달해주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사진 철학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을 담을 때 유감없이 분출된다. “나는 열심히 기록하고, 기록하고, 기록하는 메신저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공하고 뭔가 느끼고 바꿀 수 있다면 나는 매우 만족스러울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루이스 하이드(Lewis Hyde)의 말에 따르면, 예술은 ‘상품’이 아니라 ‘선물’(Gift)이다. 예술은 상행위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움직일 때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라미현의 사진선물은 분명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자신의 작품을 선물함으로써 아름다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프로세스 자체가 창조적인 활동이며 이 활동에 불씨를 지피고 초석을 놓은 이가 바로 사진작가 라미현인 셈이다.

그가 펴낸 책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마음의숲, 2021)에는 윌리엄 베버가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너희가 빚진 것은 하나도 없다. … 자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있어. 바로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게 생긴 사람들에게 그 자유를 전하고 지켜주는 거야.

우리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도 이 의무를 지키기 위함이지, 다만 너희도 자유를 얻었으니 의무가 생긴 거야. 북쪽에 있는 너희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것, 그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

그의 말에서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자부심, 공산 진영의 침공에 맞서 싸운 참전용사의 확고한 가치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평소 팔다리를 잃고도 이 점 때문에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를 되찾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지켜주는 책임, 즉 북한 동포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책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윌리엄 웨버의 메시지는 간결하지만 묵직하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이제는 북한 주민들에게 흘려보내야 한다는 뜻이리라.

평화가 아닌 것을 평화라 우기고 세습독재 하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전하는 인사들을 상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탄압하는 엊그제 정치인들의 행태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라미현은 앞으로도 6.25 전쟁 당시 한국인들을 도와주었던 나라의 참전용사들을 찾아가서 최대한 많이 그들의 사진작품을 찍을 예정이고, 참전용사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전시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정부 산하 기관이나 교회가 나서서 할 일을 개인이, 그것도 사비를 들여 묵묵히 감당해주는 라미현 작가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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