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드리운 자리
빛이 드리운 자리: 회고록

필립 얀시 | 홍종락 역 | 비아토르 | 460쪽 | 22,000원

바벨탑 사건 전 인간의 언어는 하나이고 말도 하나였지만, 이후 언어와 말은 달라지고 사람들은 흩어져 산다.

바벨탑 때보다 지금은 건축기술도 더 발전하고 사람들은 엄청난 거대도시와 높은 빌딩에 더 모여 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주택가의 사람들보다 더 대화가 없고 오히려 말 한 마디에 상대를 죽일 듯 공격하면서도 고립과 고독을 겪는다. 이러한 모습은 가족과 종교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 이것은 하나님의 부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일 듯 싶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깨어진 거울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그 형상은 굴곡이 있고 온전성을 가지기 힘들다.

그 틈을 메워 그 온전성을 복원해 나가는 것이 일종의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정통보다는 전통을 중시하고 제사장과 성전의 말과 언어로 일부 뒤틀어진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으로 확증편향식으로 받아들여 사람들을 심판하고 재단하곤 한다.

그러한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불순물과 흠집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깨어진 안경을 좀 더 복원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필립 얀시의 지금까지의 책들은 우리가 갖는 그 깨어진 흠결을 보게 하고 영적 안경의 도수를 교정하는 일들을 해온 대표적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의 여러 가지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던 예민한 이슈와 신앙적 주제들을 다루며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자극해 왔다.

아마도 이십여 년 전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책에 대해 상당히 다가오면서도 당시로는 더 민감했을 동성애에 대한 그의 접근을 보면서, 아슬아슬하면서도 그의 이러한 태도를 통해 제목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접할 수 있었다.

한국어판 20주년 기념판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바꾸었다. 원제를 보니 What’s So Amazing About Grace?‘이다. 필립 얀시의 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제목 변경은 옳은 결정일 듯 싶다.

그의 이러한 시각과 접근은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비아토르에서 나온 필립 얀시의 회고록 <빛이 드리운 자리>는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사실 회고록이란 말은 많이 무겁고 딱딱한 듯 싶다. memoir라는 단어는 회고록을 말하긴 하지만 영한사전에서 또 다른 뜻처럼 추억의 기록이나 회상록처럼 조금 부드럽고 인간적 냄새가 나는 표현을 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독자들이 좀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기대이상의 강한 감정적 몰입도를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그의 가정사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회고록이 맞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의 남부 미국교회사―특히 근본주의 교회사―의 한 측면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그런 공동체와 종교교육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필립 얀시와 그의 형, 그리고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종교의 영향은 극명하게 다른 양태와 각 개인에게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오래 전 읽었던 크레이그 톰슨의 상당히 두꺼운(590쪽) 그래픽 노블 ’담요‘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교육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는데(이 그래픽 노블은 기독교 도서도 아니고 그것이 그 책의 중심적 주제는 아니지만 한번쯤 읽어볼만한 걸작이긴 하다), 필립 얀시의 이번 회고록은 당시의 교회 상황과 더불어 기독교 교육과 종교적 편향성이 갖는 그늘을 더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은 꼭 보수적 교회나 근본주의 신앙을 부정적으로만 보려하거나 비하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다. 책 말미에 그의 책들에서 등장하는 그가 거쳐온 교회나 공동체의 반발에 “누구를 비하하거나 할 뜻은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받았던 뒤섞인 메시지를 가려내려는 시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443쪽)”는 답변처럼, 얀시는 그가 거쳐온 신앙의 궤적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깨어진 흔적, 왜곡된 자욱을 교정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교회와 집단을 바꾸려는 것보다는 그것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어서라도 교회를 벗어날 수 없었던 그와 그의 가족 상황 속에서 영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 전략이었을 듯 싶다.

그러한 그의 시각은 그가 언제나 좇으려 했던 그의 형이었지만 결국 대학 이후 형과 전혀 다른 신앙과 인생의 길을 걸었던 이유이고, 기독교에서 벗어나 인격적으로 무너진 형과 다르게 신앙을 알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한 것이다.

필립 얀시 컨퍼런스
▲과거 국내 방한했던 필립 얀시(오른쪽). ⓒ크투 DB
종종 교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과 상담하면서 하는 말 중 하나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걸러서 소화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목회자의 설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그 속에서라도 건질 것을 골라내 영양분으로 취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차원이 다르다.

어떤 때는 그러다가 탈이 날 수도 있고 중독 현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처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100% 온전한 교회나 목회자를 이 세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가운데, 이러한 소화 능력은 우리가 필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버릴 것보다 대부분 영양분으로 가득찬 교회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는 축복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이전에 읽었던 여러 책들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노르웨이의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이다. 원서가 7권이고 총 분량이 3,600쪽이라는 어마무시한 내용이지만(국내에서는 아직 절반 정도 번역되었고 계속 번역 출간 중이다), 이 책은 소설가인 그에게 그의 인생이 그 자신의 형성과 소설가로서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시시콜콜하게 그려낸다.

특히 1편은 알콜중독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가 그에게 미쳤던 영향을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가며 세밀하게 담아낸다(1권도 670쪽이다).

필립 얀시의 책에서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미친 압력과 영향을 읽어나가며, 그런 집요함과 솔직함을 보게 되었다. 책 후반에서 그의 어머니와 형 사이의 증오와 분노, 그것이 교조적 믿음 속에서 나타나는 악영향은 소설보다 흥미롭고 가슴 아프다.

소설이라면 어쩌면 극적 화해와 해피엔딩이라도 기대할 수 있고 설혹 극단적 엔딩으로 끝나도 허구라는 소설적 재미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와 형의 문제는 실제 살아있는 이들이고 필립 얀시에게 있어 사랑하는 가족이고 고통이기도 하기에, 더더욱 읽는 이들을 조바심 갖게 하기도 한다(필립 얀시는 다른 기독교 작가들처럼 ‘할렐루야’와 ‘아멘’으로 책을 마치는 이가 아님을 알기에 더더욱).

필립 얀시의 책을 읽으며 떠오른 또 다른 책은 이문열의 <영웅시대>였다. (고3 때 읽었던 책이라 그 기억은 부정확할 수 있다.) 김성동의 <만다라>와 더불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종교를 소재로 구도와 회의를 담아낸 당시 대표적 소설로 꼽혔다. 몇 년 후 이문열은 그의 연작인 <변경>의 프리퀼과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영웅시대>를 선보인다.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기억으로 ’영웅시대‘는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지만 그저 그런 드라마로 그쳤다―이 책은 일제 강점기를 싸워 나가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투쟁을 했던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해방 후 남한에서 자녀들과 홀로 살아가야 했던 그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념 갈등 속 종교에서 안정을 찾았던 어머니를 통해 사상과 종교의 이데올로기의 폐해성을 보여주는데, 이것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상당수 책에서 드러내는 이데올로기, 특히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극도의 혐오적 태도가 어디서 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초가 <영웅시대>와 <사람의 아들> 등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창기 이문열의 작품은 그 혐오가 많이 약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일부 동경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 듯 싶다. 필립 얀시와 형도 근본주의와 냉전 논리, 남북 전쟁으로 인한 인종차별, 종교적 폭력과 학대 속에서 그 반작용을 일으킨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이다.)

비록 근본주의 신앙과 교회환경이긴 했지만 그 속에 올바름과 하나님과의 만남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 필립 얀시가 하나님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길로 가는 은혜를 입었던 것 아닐까?

필립 얀시의 책을 전통적이고 보수적 신앙인들이 읽을 때 느끼곤 하는 신앙적 불편함과 아슬아슬함은 결국 그가 그런 신앙적 복마전과 그 속에서도 등대의 빛을 놓치 않고 걸었던 긴장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아슬아슬함과 긴장의 원인을 이번 회고록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듯 싶다.

예컨대 조성기의 자전적 소설인 대표작 <야훼의 밤> 4부작 중 1편인 ‘갈대바다 저편’에서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은혜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반면, 2편인 ‘길갈’은 그를 구도로 이끈 공동체가 보이는 종교적 폭력과 이데올로기성을 보여주는 상반성을 보여준다. (그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라하트 하헤렙>도 또 다른 종교적 이중성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하나님과의 만남은 축복이고 기쁨이며 그것을 이끌어주는 것은 은혜이고 감사이지만, 그렇게 이끌어준 이들의 악함 속에 신앙적 혼란과 갈등을 겪는 이중성을 경험한다.

필립 얀시도 그런 혼란을 성장하면서 점점 더 경험한다. 그러한 불일치 속에서 형은 결국 정반대의 길을 가기까지 한다. 필립 얀시는 이 책에서 그가 함께 했던 교회, 가정, 성경학교의 이러한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소설은 전혀 아니지만 더 소설같은 흥미와 긴장을 그려낸다.

(재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다가 흥미라는 단어로 대체했는데, 재미라는 표현은 이 책이 허구가 아니라 필립 얀시가 실제로 살아온 삶이기에 모욕적 단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이 책은 읽는 이로서 나 자신의 과거의 신앙적 여정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빛이 드리운 자리’는 제목처럼, 은혜라는 이름 속에 드리워진 그늘의 이면을 보게 한다. 모태신앙과 전통적 기독교 테두리 속에서 겪었던 여러 그늘들을 기억하게 한다.

특히나 중고등부 때 일명 ‘노는 아이들’이 교회에 일부 들어오면서 벌어지던 빛과 어둠, 그리고 그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고 싶었지만 그 길을 속에서 방황하던 이들, 또 그들을 바라보던 교회 어른들, 빛과 어둠이라는 두 그늘 속에서 복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실천성을 갖는지를, 또 그 충돌을 보았던 나는―마치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두 세계의 충돌’처럼―이후 교회와 신앙생활에서도 계속 겪어왔고 청년부 때도 ‘잘 지냈어요’라는 인사 뒤에 숨은 그늘과 목회자가 된 이후에도 성도의 미소 뒤의 일그러진 얼굴을 종종 보곤 했다. 그러기에 지금도 그런 아픔을 보곤 하는 것일지도….

얀시의 이번 책을 읽으며 그의 전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꿈틀거린다. 아마 그의 책들을 다시 읽는다면 전작들에 언뜻 비치는 인생의 편린 속 고통과 고민, 방황들을 발견할 수 있을 듯 싶고, 그것으로 각각의 책들과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올 듯 싶기 때문이다.

2022년이 아직 6월도 끝나지 않았지만, 이 책은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책 중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듯 싶다.

문양호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