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인생
설교자의 인생

임종구 | 다함 | 220쪽 | 13,000원

하나님께서는 못나고 부족한 설교자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고 학위도 좋고 뛰어난 언변과 잘생긴 외모를 가진 자를 높이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겸손한 설교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겉으로 보면 유학 다녀오고 박사를 지내고 탁월한 사람을 쓰시는 것 같지만, 내면을 보면 하나님께 온전히 길들여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지녔고 한 공동체의 목사이기에 항상 말씀의 정점에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목사는 중세나 근대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가이고 선지자적 역할을 했던 자이기에, 많은 지식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수준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설교도 잘하게 해주시고 공부도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니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느 순간 빛을 받아 한 번에 설교를 써내려 가기도 합니다. 열심히 연구하다 주석에도 없고 주석보다 더 나은 나만의 통찰과 주제를 발견하여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구나 무릎을 치며 주님께 감사기도도 드립니다. 공동체를 아끼시고 나의 체면 또한 세워주시구나 하는 감동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강단에 서기 전, 절망을 가진 설교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언어와 하나님 말씀, 성립되지 않습니다.

유약한 인간과 유한한 언어로 전능한 하나님과 무한한 말씀을 풀어낸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경륜과 구원을 계시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는 먼저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내 입이 둔하다는 진실된 고백과 엎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광야생활을 홀로 오래하는 동안 언어가 퇴보하여 둔하다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나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이기에 자신은 불가능하다는 포기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보다 두려움과 경외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주님의 부르심에 자신이 인정받았다고 교만해져서 우쭐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 망하게 되었다고 깊은 절망을 경험합니다.

내 입술은 부정하여 내 입에 거룩한 말씀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회개합니다. 내 입은 나쁜 말을 많이 하고 살았기에 진리를 전하는 도구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좌절합니다. 유한이 무한을 담을 수 없듯, 인간이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임종구
▲임종구 목사 부부. ⓒ교회 제공
책의 저자는 책을 통해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설교 언어, 설교자와 목회자의 삶과 여가와 사모 등에 대하여 다양한 단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저자는 설교자의 절망과 탄식과 언어의 부재를 말하고 싶어합니다. 저자는 다른 생각과 주제를 강조하고 싶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설교자는 존재의 절망과 언어의 탄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강단의 타락은 교회의 타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저자는 강단 언어의 타락은 교회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선동과 거짓과 정치와 표적이라면, 하나님 말씀의 도구로 부적절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데, 그 표현매체인 언어가 비성경적인 것으로 조합되었다면 그 설교는 실패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듣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강단은 어떤지 점검해 봅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풀어주고 들려주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전달합니다. 회중을 적으로 여기는 설교자도 있고, 학생처럼 대하며 훈계만 하고 고객으로 여기며 서비스만 제공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강단이 학교 교양강좌와 세미나 수준으로 변질된 경우도 있습니다. 신성과 거룩과 성경은 찾아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고 경박한 언어로 도배된 곳도 있습니다.

더 기가 찬 것은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자신의 부하인 양 마음대로 부리는 설교자도 있습니다. 성령님을 자신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하인처럼 대하는 설교자를 어떻게 봐야 할지 두렵기만 합니다.

유행가를 부르는 자들도 있고, 욕을 시전하는 자들도 있고 상스럽고 야한 말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전부 오염되고 타락한 것이고 이미 타락한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강단을 거룩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하길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수어지고, 허물어져도 강단만은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곳의 주인은 하나님이니,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정련되고 검증된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강단의 수준은 교회의 수준을 보여주고 강단의 상태는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책을 통해 더 언어의 절망을 사모하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자는 말하길 “설교자는 비언어적 설교에 눈 뜨면 종착역은 이단의 교주나 사이비 또는 신비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대언하는 것이 버겁고 힘드니 카리스마를 발휘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언어라는 도구보다 이런 신비와 능력과 권위를 부리면 자극을 줄 수 있고 추종자들도 만들 수 있고 인간은 높아져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절망을 경험하고 겸손히 천식 환자처럼 목회하기보다, 이런 신비적인 능력으로 스타벅스처럼 목회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천식 환자, 스타벅스는 책에 나오는 저자의 표현).

설교자는 어떤 은밀한 힘과 요행으로 회중을 사로잡으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반면 설교자는 아프더라고 부정한 입술의 수술과 회복을 경험하고 주님의 어루만지신 손길의 언어로 강단에 서기를 지양해야 합니다.

끝으로 설교를 잘 하게 해달라기 보다 더 절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 모습이 진실한 설교자의 모습 같습니다.

필자는 책을 읽으며 다음 주에 전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준비가 안 되고 풀어지지 않아서 답답했는데, 내 언어의 한계와 절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보여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절망 그 자체로 엎드리는 것이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자는 대구에서 개척하여 단단하게 교회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강단을 지키고 있고,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한계와 절망을 느낄 때 성산포에 가서 바다가 전해주는 설교도 듣고, 히말라야에 가서 산이 들려주는 설교도 듣는다고 합니다.

자연이 들려주는 언어에도 귀를 기울이니, 참 낭만이 있고 멋이 있습니다. 언제 목회 고수이신 선배님 곁에 서서 그 소리를 같이 들어보고 싶습니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부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