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로 中 민주화? 백번 물어도 ‘가능’ 답할 것
중국 인민들의 민주화와 자유, 누구도 못 막아
33년 전 6.4 천안문 사태, 사상인 동시에 ‘역사’
한국교회, 공산당 핍박 중국 교회 지속 교류를

우쩐룽
▲우쩐룽 작가는 “한국은 나에게 글쓰기의 자유, 발표의 자유, 행동과 표현의 자유를 제공했다. 아시아에 이런 자유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자유와 민주를 위해 피흘려온 나라 한국이 14억 중국의 자유와 민주를 위해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대웅 기자

“자유의 나라 한국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흔드는 북한과 북한 핵무기의 근본적 해결책은 중국 민주화이다. 중국 민주화는 한반도 통일의 지름길이다. 한국인들이 이 점을 깊이 인식해 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중국 민주화 운동과 중국 민주 인사들을 지지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우쩐룽(武振荣) 작가는 1949년 3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진시황 무덤과 병마용이 있는 섬서성 함양시에서 태어났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 두목으로 활동하며 열병식 때 마오쩌둥(毛澤東)을 가까이서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지금은 망명자로 한국에 있다. 2년 전에는 <도망자: 중국 민주 자유를 위한 간절한 외침>을 한국어로 펴냈다. 지난 2002년 홍콩 한 출판사에서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도서를 출간하려다 발각돼, 그 길로 한국에 건너온 지 20년째다.

우쩐룽 작가는 한국에서 중국 민주 인사로는 최초로 2008년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최황규 목사가 2003년 한족을 위한 서울중국인교회를 창립할 때부터 구성원으로 참여한 신자이기도 하다. 2005-2007년에는 중국 대륙 지식인들이 모이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표 지식인 200명 중 한 사람에 선정됐다. ‘우쩐룽 사상’은 해외에서 자주 인용된다.

6월은 우리나라에서 실질적 민주화를 이룬 6.10 민주항쟁이 있었던 달이자, 중국 6.4 천안문 운동 33년째가 되는 달이다.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하다. 지금도 한국에서 중국 민주화를 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는 우쩐룽 작가에게 중국 민주화와 중국 내 기독교 상황에 대해 청취했다.

-중국에서의 삶과 요즘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알려 달라.

“한국 식으로 중학교 때 문화대혁명(문혁)이 일어나서 참여했다. 문혁 이후 고등교육 기관이 사라져,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1968년 인민해방군에 들어갔다. 연대급 부대에서 정치교관 일을 맡으면서,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됐다. 1974년부터 비밀리에 혼자 중국의 민주와 자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년 복무 뒤 1987년 전역하고 산시성의 한 기계연구원 간부로 취직했다.

이후 1989년 5월부터 중국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중국 대학생 만세’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때문에 공안에 의해 반정부 활동 기록이 남았다. 퇴직 나이 전인 1996년 연구원 일을 그만두고, 모든 시간을 중국의 민주와 자유를 위한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 후 출판하려던 글이 발각돼 2002년 11월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탈출하게 됐다.

한국에서는 예전처럼 계속 인터넷 상에 글을 쓰고 있다. 미국에 본부가 있는 중국민주논단, 북경의봄 등 해외 웹사이트에 탈출 이후 현재까지 500여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

2003년에는 중국민주운동 해외연석회의 한국지부장을 맡으면서, 33년 전 천안문 학살 사태에 대한 항의집회 또는 시위를 조직하고 활동 중이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2005년 집회에서 중국인 150여 명과 일본에서 건너온 민주운동가들까지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한 것이다. 이 밖에 중국의 미래와 민주화에 대한 강연도 하고 있다.”

-글을 쓰는 것으로 중국 민주화가 과연 가능한가.

“백 번 물으신다 해도, 백 번 모두 ‘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1989년 천안문 학살 후 33년이 지난 현재까지, 중국 인민들은 가혹한 압제에 눌려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들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매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행동과 항의 집회가 열린다. ‘나는 역사를 잊는 것을 거절한다’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비록 33년 전 사건이지만, 우리 중국인들은 이 6.4 사건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33년 전 전 세계는 6.4 사건을 주목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단식하면서 항쟁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던 시민들은 부대원들과 싸워가면서 대학생들을 지지했다. 그 중에는 70세 넘은 노인들도 있었다. 당시 왕웨이린(王維林, 가명) 씨는 홀로 탱크가 올 때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므로 중국 인민들의 민주화와 자유 실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는 실패했고 유혈 사태가 일어나 중국이라는 국가는 이후 도태됐지만, 6.4 정신과 피 흘린 역사는 말없이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고무하고 격려해, 다시 위대한 운동을 일으키게 하리라 확신한다.

중국 공산당이 왜 인민들에게 6.4의 역사를 잊게 하겠는가? 가장 큰 이유는 6.4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은 중국 공산당의 가장 야만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인민들을 보호해야 할 공산당 인민해방군은 당시 인민들을 짐승처럼 도살했다. 살아있는 인민들을 탱크로 밀고 가면서 짓밟았다.

당시 방정이라는 청년은 인민해방군 탱크에 깔려 두 다리가 절단됐다. 몇 년 전 그가 미국으로 망명했고, 지금은 의족을 달고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자 야만적인 공개적 도살 행위였다. 이런 행동들은 공산당을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33년 동안 압제하고 있는 이유이다.

지난 33년 간 장쩌민(江澤民)부터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習近平) 등 지도부 모두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3년 전 천안문 사태에 대한 글을 썼는데, 제목이 ‘6.4는 일종의 사상이다’였다.

6.4 사태 전, 중국 인민들은 광범위하게 민주와 자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 5월 12일부터 북경 대학생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중국 관영 CCTV와 라디오 등이 생중계로 보도했다. 인민들은 ‘왜 당국이 대학생들과 대화를 허락하지 않는지’ 의문을 갖게 됐다. 전국 인민들은 이를 보면서 리펑 당시 총리가 퇴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쩐룽
▲우쩐룽 작가가 한국 망명 후 거의 매일 적은 일지. ⓒ이대웅 기자

이후 중국 전역에서 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비록 민주화 운동은 실패했지만, 전 인민들은 민주와 자유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단식해야 하나. 인민들이 대학생들의 단식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 것이 무슨 죄인가. 대학생과 인민들은 죄가 없다. 죄가 있는 사람은 덩샤오핑(鄧小平)이다. 그는 중국 역사의 반동분자 독재자 전체주의자다. 그의 개혁개방 공로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6.4는 일종의 사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6.4는 오늘날 사상일 뿐인가.

“6.4는 사상인 동시에, 역사다. 모든 인류는 역사 속에 살고, 각 민족도 개인도 고유한 역사를 갖고 있다. 6.4 운동도 마찬가지로, 중국 인민들의 이후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6.4에서 인민들이 요구한 민주와 자유는 시간이 지나도 다시 분출할 수밖에 없다. 오늘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중국의 민주와 자유의 가능성은 희망이 있고, 그렇게 되리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21세기 인류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 운동이 중국 민주화 운동이라고. 현재 14억 명의 중국 인민들이 6.4 때와 같이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6.4 실패 후 새롭게 발생한 사상을 ‘도망 정치’라 부르고 싶다. 처음 도망한 사람은 팡리지라는 과학자였다. 이후 문학가들이 도망갔다. 가오싱젠, 류빙옌 등 지도자급들도 ‘정치범’이라는 이름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쉬원리(徐文立) 선생이고, 저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2021년부터는 홍콩 사람들이 도망가고 있다. 표면상 도망처럼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이다. 현재 해외로 도피한 분들이 역량을 기르고 있다. 중국 민주화가 다가오면 함께 다시 들어가 민주화 운동을 촉진하고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민들은 생존에 바쁘고, 기억은 잊혀진다.

“33년 전 발생한 6.4 운동은 지금도 중국 인민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6.4 운동은 전 세계인들이 알고 관심을 갖는 국제적 사건이었다.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신사고 운동을 시작했고, 발트 3국은 독립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광부들은 파업했다.

1980년대 초 한국 ‘서울의 봄’이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듯, 중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구소련은 해체됐고, 발트 3국도 독립했다. 한국은 직선제를 쟁취했고 민주사회가 됐다. 오직 중국만 민주화에 실패했다.

지금도 이것이 너무 비통하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체격도 커지고 강대국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그렇지 못하다. 6월 1일 중국 허난성 시민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봉쇄 정책에 반대해 항의 시위를 했다. 상하이 지역에서도 시민들이 정부와 충돌하고 있다. 중국 톈진 시민들도 항의에 나섰다. 지금 중국 시민들의 불만은 점점 수위가 올라가고, 언젠가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이다.

시진핑이 주석에 오른 이후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시진핑은 헌법을 바꾸려 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처럼 ‘종신 주석’을 꿈꾸고 있다. 때문에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시진핑의 야욕에 대한 반대 기류가 형성됐다. 현재 시진핑 반대파 세력의 세기가 점점 커지고 있다. 중국 민주화의 큰 희망을 보게 된다.”

-중국의 기독교 핍박에 대해 들으신 바 있는가.

“시진핑이 주석이 되기 전에는 한국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동북 지역에 대량으로 들어가 선교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 집권 이후 한국 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당했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선교하는 한국인들은 지하로 숨거나 비밀리에 선교하고 있다. 현재 중국 당국은 시진핑의 초상을 삼자 교회 예배당마다 걸도록 하고 있다. 지하 교회나 가정 교회는 폐쇄당하고 있다. 시진핑은 기독교 탄압뿐 아니라, 모든 활동과 행동을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중국 민주화나 중국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국에 와서 이해하게 된 것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이다. 중국에는 헌법에 명목상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가 없다.

1950년대 중국은 삼자애국회를 만들어 기독교 등 종교를 공산당 산하에 뒀다. 1960년대 혁명의 시기에는 기독교의 완전한 말살을 시도했다. 문혁기에는 중국 모든 기독교가 정지 상태였다. 당시 불교 승려들도 대부분 환속해야 했다.

이후 1980년대 종교활동과 예배를 허락했고, 승려들도 절로 돌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중국 승려들은 사원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삼자 교회는 중국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수족 같은 존재다. 예배는 드리지만,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없다. 한국으로 오고 나서야 진정한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됐다.

우쩐룽
▲우쩐룽 작가의 <도망자>.

한국교회가 삼자 교회까지 포함해 공산당의 핍박 아래 있는 중국 교회와 지속적으로 교류해 주시면 좋겠다. 한국교회 선교 역량은 실질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국 하층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다. 중국 인민들의 종교와 신앙생활은 미래의 자유, 민주화와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시진핑 주석의 퇴행적·역행적 행동과 정치, 예를 들어 사람이 죽든 말든 ‘코로나 제로’로 몰고 가는 무자비한 봉쇄 정책이 얼마나 인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좀 더 수준 높고 깊은 중국 민주화 관련 서적들을 써서 출판하는 것이다. 해외 중국인들뿐 아니라 내부 중국인들도 제 여러 글들을 SNS를 통해 공유하고 있다.

제 몸은 지금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중국에 있다. 항상 중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돌아가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키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