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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증명? ⓒ픽사베이
본문: 요한복음 6장 61절

영생에 대해 말하는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소개합니다.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와 같지 않은 ‘영생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설명을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너무나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는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반응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본문을 배경으로 ’이 말이 걸림이 되느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이해하려고 하지 않느냐?
‘이해하기에 어려운 말인가?’라는 반문입니다.

61절에서의 ‘제자들’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열두 제자가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제자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추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는 ‘이해되지 않느냐?’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해(understanding)란 알게 된다는 지적 작용입니다. 그래서 이해에는 지식이 결부됩니다. 다만 이해에 대해서는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해와 관련하여 논리학과 언어철학에 정통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단어의 사용과 문맥에서 관련성을 식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를 아는 이해인 경우에는 ‘단순하게 안다’는 지식만으로는 가치가 없다는 시각입니다.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해에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이해하려는 의지를 가지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해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이해에 상응하는 지식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는 이해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적은 지식으로 파악하려 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는 말씀은 ‘왜 이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는 질타로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2.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느냐?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느냐?’ 하고 질문합니다. ‘마음에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어떤 말이 이해가 되든 이해가 안 되든, 일단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일단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 다음이 아닙니다. 공부한 다음에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일단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입니다.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이 비행기를 공부한 다음에야 타려고 한다면, 아마 평생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비행기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말씀을 일단 받아들이면, 지금은 깨닫지 못해도 나중에,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닫게 됩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필요한 경우로 인식한다면, 일단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것에서는 수용과 허용, 그리고 인정과 보증 등이 포함됩니다.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는 말씀은 ‘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반문입니다. 나아가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는 질타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일단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 믿으려고 하지 않느냐?
믿으려고 하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본문 61절 말씀은 단순한 질문을 넘어,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는 지적입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태도는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태도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는 상황이라도 믿으려 하는가, 아니면 믿지 않으려 하는가의 태도가 결정적입니다. 이는 발전으로 가는가, 후퇴로 가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과 주님의 육체에 참여하는 것이 영생과 동일시됩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불신앙입니다. 이는 메시아의 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주님의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나중에 십자가가 유대인에게 걸림돌이 된 중대 범죄로 간주합니다. 주님 말씀은 어차피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영적 원리를 일찍이 알았던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그리스 철학의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신앙은 논리가 아님을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논리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4. 정리

세상에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어, 영원한 생명을 축복으로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살과 피를 죄 사함의 증표로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