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2년 5월 29일
장소: 전주 주 은혜(대언)교회
본문: 에베소서 6:1-4

기독교학술원 이사장 취임식
▲김명혁 목사. ⓒ크투 DB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 아담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 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18-25).

물론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가정의 행복이 깨어지기는 했지만 본래 성부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목적은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노년에 아들 이삭을 낳았을 때 웃으면서 즐거워하며 행복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창 21:5,6,8).

물론 아브라함이 애굽 여인 하갈에게서 나은 아들 때문에 잠시 가정에 불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아들 이삭을 바라보면서 행복해했습니다. 한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 사무엘을 낳았을 때 기뻐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1,2).

그러면 어떤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예배”와 “섬김”이 있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돌봄”과 “섬김”이 있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돌봄”과 “섬김”이 있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행복한 가정인 두 가장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죄인 중의 죄인인 저의 가정에 대한 간증 이야기를 하고 둘째는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손양원 목사님의 가정에 대한 귀중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죄인 중의 죄인인 저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허물과 죄가 너무 많은 부족하고 또 부족한 사람인데 평생토록 목회와 교수와 선교와 구제와 봉사에 전념하면서 살게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지만 아주 귀중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신앙의 가정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기도와 예배와 전도에 전념하신 할머니가 안 계셨다면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목회에 전념하시다가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가 안 계셨을 것이고, 순교의 제물이 되신 저의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그리고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신 저의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오늘의 제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나의 나 됨을 돌이켜볼 때, 오늘의 나의 나 됨은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형성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가족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로 하여금 목회의 길로 가게 하시고 부족한 저로 하여금 기도와 예배에 전력하게 하신 분은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서 처절하게 기도하시고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하시고 전도에 전력하신 친할머니의 귀중한 영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평안도 안주에 있는 할머니 집을 찾아가곤 했는데 수요일 저녁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먼 곳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할머니의 기도로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두 아들은 목사님들이 되셨고 한 아들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결국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 초청으로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를 하셨고 해방 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동안 목회를 하시다가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신의주에서 목회하실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경직 목사님이 세우신 교회의 목회는 물론 한경직 목사님이 세우신 고아원과 양로원의 고아들과 노인들을 돌보시는 “돌봄”의 사역도 하셨고 의사인 어머니는 집에 “애양원” 이란 작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교인들과 이웃의 병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신의주에 계실 때는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자주 붙잡혀 가서 감옥살이를 하셨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다고 자주 붙잡혀 가서 감옥살이를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감옥을 찾아가서 담장 밖에서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노래를 부른 다음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치면서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자주 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양 제5인민학교에 2년동안 다녔는데 일요일 날 학교에 오지 않고 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를 드린다고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서고 매를 맞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저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가 저에게 물려주신 순교 신앙의 유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충성됨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사시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의 신앙과 인격의 DNA가 저의 몸과 영혼에 그대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믿어 주시고 자를 칭찬해 주시던 그리고 제가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저를 남쪽으로 떠나 보내시던 저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스러운 기억이 저의 지, 정, 의 부분 부분에 그대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저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믿어 주시고 칭찬하시던 저의 어머니의 슬픈 사랑과 아픈 눈물이 저의 인격과 영혼의 DNA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지극히 사랑하신 나머지 저를 남쪽으로 떠나 보내신 어머니의 진하고 슬픈 사랑이 저의 슬픈 사랑이 되었고 어머니의 아픈 눈물이 저의 아픈 눈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는데 유학을 마치기 5년 전인 1969년 6월 7일 믿음의 여성과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 5년 후 어린 딸 혜원이와 어린 아들 철원이를 데리고 귀국한 후 지난 50여 년 동안 목회와 교수와 선교와 순회 목회 사역을 계속해 왔는데 저의 아내는 조용한 내조자와 동반자의 역할을 잘 해 왔습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 제 아내는 조용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잘 돌아보았습니다.

어린 아들 철원이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철원이는 태어날 때부터 뇌수종이라는 불치의 병을 지니고 극심한 고통을 몸에 지니고 살았는데 저는 철원이처럼 귀중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제가 제일 귀중하게 여기면서 제가 제일 많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철원이의 아름다운 고백들 몇 마디를 인용합니다. “아빠, 예수님은 나보다 더 아프셨지. 아빠, 아빠는 기도를 잘 해서 최고야. 아빠, 나하고 좀 놀아. 아빠, 아빠란 엄마란 같이 천국 가고 싶어. 아빠, 하늘이 보여, 예수님이 오셨어.”

4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지니고 살다가 천국 간 철원이는 저로 하여금 불행한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는 사랑의 힘이 되었고,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갈망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너무너무 귀중한 가정을 허락하시고 보배로운 어린 아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사랑과 섬김을 강조하면서 국내외의 불우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폈는데, 모든 것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부족은 자에게 베푸신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고 그리고 아버지와 신앙의 선배님들이 부족한 저에게 물려주신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신앙적 유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 아들로부터 묻어온 DNA는 저의 자녀 손들에게로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 혜원이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선교지를 향한 사랑을 품고 선교 훈련을 받은 다음 사위와 함께 필리핀으로 달려갔습니다.

만 여섯 살 난 손자 동혁이는 새벽기도를 하면서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지만 자기는 다섯 번씩 기도한다고 하며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필리핀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필리핀에서 지난 15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사위와 딸은 아주 귀중한 사역을 계속하고 있고 손자 동혁이와 수혁이와 손녀 지윤이도 아주 귀여운 손주들의 역할을 잘 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필리핀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둘째 손자 수혁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가 필리핀에 오셔서 정말 좋아요. 할아버지 지금까지 계속 오실 때마다 선물도 주시고 볼링도 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할아버지 지금까지 저희에게 잘 해 주셔서 감사해요.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할아버지세요. 왜냐하면 11살에 38선을 넘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는 정말 재미있어요. 할아버지는 뭐든지 잘 해요. 친구들과 장난도 치고 중국집 토마토도 따 먹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세계 최고의 할아버지에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용감해요. 심한 장난을 쳐도 (나처럼) 엄마한테 혼날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 정말 정말 사랑해요. ♡ ♡ 2째 손자 수혁 올림.”

셋째 손자로 늦게 태어난 손녀 지윤이는 어리광을 부리는 귀여운 손녀인데 전화를 걸고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누구를 제일 사랑해요?” “할아버지는 지윤이를 제일 사랑하지요.” “그렇지, 할아버지는 오빠들보다 지윤이를 제일 사랑하지요. 할아버지 나 할아버지 한데 가고 싶어요. 할아버지 나 비행기 타고 가고 싶어요.” “행복은 정말 가정의 품입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가정의 품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이었다고 생각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가정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을 지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손종일씨와 김은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손양원은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유산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아버지 손종일씨는 1908년경 이웃에 사는 형 뻘 되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상투도 자르고, 술과 담배도 끊고, 밤새워 성경을 읽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설날 아침 문중의 일가가 다 모여 조상의 묘에 절하는 도중 제사상을 뒤엎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한 후에는 매일 아침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손종일 씨는 장로로 김은순 씨는 집사로 칠원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한 번은 칠원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했는데 은혜를 받은 손 장로는 집에 돌아와 기뻐하면서 아내에게 논 다섯 마지기 중 세 마지기를 바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는 비 새는 교회당을 짓는다는데 두 마지기만 남겨 두어서 무엇 하겠느냐 하면서 남은 두 마지기를 다 바치자고 해서 결국 다섯 마지기를 다 바쳤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논밭이나 재물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후에 그의 세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은 순교자가 되었고 두 명의 손자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이었던 손양원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힘썼습니다. 손양원은 11살 때 칠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은 매일 일본 왕을 향하여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손양원은 동방요배를 거절했습니다.

어느 날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로 교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십시오.”

손양원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기 위해서라면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므로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7살 때 서울에 가서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을 하면서도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했습니다. 주일날 일 안 한다고 만두가계로부터 쫓겨나면서도 그는 주일을 지켰습니다.

“굶어도, 못 배워도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는 만두가계에서 쫓겨나서 이리 저리 일자리를 찾아 다니면서 그간 모아 두었던 돈도 다 써 버리고 삼 일을 굶어야 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손양원은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 70전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십일조였습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십일조 도둑은 안 돼” 하며 그 돈을 당시 그가 다니던 안국동교회에 바쳤습니다.

손양원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결국 손양원은 자라서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목사님과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이 자란 가정이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롭고 아름다운 그리고 행복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가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룬 가정도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롭고 아름다운 그리고 행복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가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은 19살 때인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중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1923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면서도 산 기도와 노방전도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22살 때인 1924년 귀국하여 19살의 정양순양과 결혼을 했고 칠원교회의 집사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1926년 3월에는 진주에 있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여기서 3년 동안 경남 성경학교에 다니면서 성경학교의 강사였던 주기철 목사님에게서 순교신앙을 배웠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5년 4월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7월에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 마자 경상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9년 7월부터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손양원 전도사를 연행해 갔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일경들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경성 구치소, 청주 구치소 등에서 8. 15 해방까지 5년 간의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 단심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전도사가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의 기도와 격려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양순 사모는 남편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아내였고 자식들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였습니다.

여수 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는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 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광주로 ...” 채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어머니는 숨겨 가지고 온 성경책을 펼쳤다. 반갑다고 인사나 나누고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남편의 육신의 삶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아버지가 당할 고초가 아니라 혹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서 우상 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손양원 목사님이 이룬 가정은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롭고 아름다운 그리고 행복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가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모님의 사랑과 존경과 격려를 받았고 자녀들의 사랑과 존경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어린 딸 동희양도 아버지의 “믿음”과 “사랑”과 “용서”와 “섬김”의 귀중한 영적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아무도 갈 수 없는 나환자들 “사랑”과 “섬김”의 길로,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죽도록 충성하는 일편 단심의 순교 신앙의 길로 그리고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 같은 사람 안재선을 끌어안는 “사랑의 원자탄”을 터뜨리는 길로 걸어갔고, 주기철 형님을 따라 “순교의 피”를 흘리는 “십자가의 길”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군들에게 끌려가며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48세에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을 당하므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너무너무 귀중한 “믿음”과 “사랑”과 “섬김”과 “충성”과 “헌신”과 “희생”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룬 보배로운 가정의 품과 그리고 사모님과 자녀들이 함께 이룬 보배로운 가정의 품에서 비롯한 귀중한 열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정말로 귀중한 가정의 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 모두에게, 사랑하는 전주 주 은혜(대언)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귀중하고 아름다운 행복한 가정들을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섬김”이 넘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행복한 가정들을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이 없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그리고 “섬김”이 넘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행복한 가정들을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행복한 가정”과 관련되는 귀중한 말씀들을 인용하므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1,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이 없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섬김"이 넘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행복한 가정들을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찬송가 “사철에 봄 바람 불어 잇고”(305, 559)를 함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