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랏산 아르메니아 Armenia Ararat Landscape Mountain Turkey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는 터키 아라랏산. ⓒ픽사베이
1. 청년들에게 약속했던 것이 있습니다.

내 상황이 어찌됐든, 모든 예배에 최선을 다해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제가 어떤 상황이 돼도,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 박 목사님 설교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해답은 동행이었습니다.

노아가 선택받은 이유는 그가 당대에 완전한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동행함에 있습니다. ‘같이’의 ‘가치’ 말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큰 착각 중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선택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내 마음이 변화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준이 하나님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뭘까요?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 천국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3. 왕이 없어서 문제라 여겼던 사사 시대, 하나님은 갑자기 룻기를 통해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룻기에는 룻이 곧바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엘리멜렉이라는 남편이 등장합니다. 엘리멜렉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입니다.

왕이 없어 각자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에 그런 이름을 정했다는 것은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왕이야.”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자 베들레헴을 떠납니다. 그리고 온 가족과 함께 모압으로 향합니다. 가족 공동체가 하나 된 것입니다. 그 순간은 아름다웠겠지만, 소유를 쫓아간 결과는 무소유였습니다. 무소유, 즉 죽음입니다.

4. 나오미는 달랐습니다. 나오미는 소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면서 “너희들은 그냥 마음대로 가라”고, “그러나 나는 나 혼자 가겠다”고 말입니다. 가족들과 헤어질 것을 결단합니다.

쉬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나오미는 “내 삶은 마라와 같다”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의 자리를 회복합니다.

그런 나오미를 선택한 사람이 룻입니다. 나오미의 선택이 룻과 그 후손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5. 5월 가정의달의 시작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했습니다. 어린이를 섬기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이에게 우리는 ‘천국’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천국의 모형을 설명합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사자가 소처럼 풀을,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장난하며”.

달꿈학교 학생에게 이전에 말했습니다. “천국 가면 믿음의 선배들을 다 만날 수 있다”고요. 그랬더니 “외할머니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할머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보고 싶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이 대답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하지만 천국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이 가족이 아닌 거겠죠. 그냥 거기선 우리 가족만 가족으로 보이지 않을 거 같아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시니까, 우리 모두가 한 가족처럼 그때 알거 같아요. 그래서 혈통으로 신앙생활하지 말라고 했던 걸 알겠네요. 그러니까 어떤 가족이 보고 싶다 이런 생각 조차 안들거 같은데요?”

질문을 하더니, 대답을 목사보다 더 기가 막히게 합니다. 보기 좋게 한수 배웠습니다.

6. 맞습니다. 천국은 함께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삶입니다. 그런데 ‘누구와 함께’인지 알게 됩니다.

이리 가족 공동체가 아니라,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있습니다. 어린양 입장에서 끔찍했을텐데,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있습니다.

소가 사자처럼 될 수 없습니다. 양이 이리처럼 될 수 없습니다. 독사굴에 독사가 새끼들과 놀지 않고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을 칩니다. “우리 집에 왜 왔어?” 나무라지 않고 뒤섞여 놉니다.

7. 누구와 함께인지 알았다면, ‘어떻게 함께’인지도 알게 됩니다.

그곳이 천국인 이유는 사자가 양이 먹는 풀을 같이 먹어준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자기의 권리와 힘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곳, 바로 그 현장이 천국이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천국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 비유에 이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14절에 “또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가르라는 등위접속사로,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 이어 나오는 양과 염소 비유와 같은 천국 비유를 말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현실에서 주어진 능력을 어떻게, 누구에게 사용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줍니다.

주인이 사람들을 모으더니, 왼쪽 오른쪽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왼쪽 그룹 사람들에게 “너네는 나한테 잘 못해서 천국 못 가”라고 말하고, 오른쪽 사람에게는 “너네는 나한테 잘해서 천국 가”라고 말합니다.

두 그룹 모두 어안이 벙벙하지만, 못 간다고 이야기를 들은 그룹은 반발이 심했겠지요. “어느 때에 주님이 배고플 때나 나그네 됐을 때나 병든 것이나 옥에 갇힌 것 보고 공양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여기나온 ‘공양’은 ‘디아코네오’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중요 요소중 하나인 섬김과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따지며 “내가 왜 못 들어가냐고,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기가 막힌 답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8. 중요한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극히 작다고 표현된 ‘엘라키스토스’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공동체에서 만났던 사람들이거나, 같이 생활을 잠깐이라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못 본겁니다.

눈에 안 보여서입니까? 아닙니다. 선택적으로 그들을 못본 척 했습니다. 선택적으로 못본 척 했다는 것은 선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면서 못본 사람들이 생겨났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대답과 질문을 통해, 이 곳 사람들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지금 주인되신 하나님은 너희들이 교회에서 일 열심히 했다는 것이나, 가족에게 잘 한 것이나 불쌍한 자들을 잘 돌봐주지 않았다고 나무라신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그 현장에서 같이 있는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에게 행했던 삶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들이 놓쳤던 것은 바로 그들이 함께 지냈던 형제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겁니다.

9. 한국교회처럼 하나님을 믿기 힘든 곳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못보고 지내는 형제 자매들은 누구겠습니까?

첫째로 유교 사상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진 겁니다.

신앙을 하나님과 나, 맡겨준 자와의 관계로 보지 않고 혈통 중심으로 봅니다. 교회 공동체라는 놀라운 천국 모형을 목사들이 가족에게 넘겨주고 함께 신앙생활하고자 하는 것을 ‘세습’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에 얼마나 뿌리 깊게 혈통주의 신앙이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잘 되새겨 봐야 합니다.

둘째는 친구입니다. 한국은 친구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참 ‘끼리끼리’가 잘 형성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한테 잘 맞는 사람끼리 앉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곁이나, 궁금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 사람 곁으로만 갑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소외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사람한테 다가가지 않습니다. 안 보이는게 아니라 선택적으로 안갑니다.

오랜만에 모여 반가운 사람들이 일주일만에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놀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모이지 못한 지체는 외롭지 않을까?

셋째는 사역을 생명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으로 여깁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한국 문화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의 섬김도 그저 ‘일’로만 여깁니다. 섬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일처럼 여기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심리가 있습니다. ‘보상’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만큼 일했으니 나를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했는데, 모든 일을 내가 인정받기 위해 합니다.

내 일을 다했다 생각하니, 그 일에 방해되는 사람은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소외된 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만족으로 주일이 마무리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역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넷째는 신앙생활을 감정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감정적으로 신앙생활하니 늘 새로운 곳, 혹은 먼 곳을 향해서만 선의가 생깁니다. 가까운 곳에 한 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지체들이 여전히 있음을 모릅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법 중 하나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숙제입니다.

‘매일 만나는 이웃에게는 악의를, 멀리 떨어진 미지의 사람들에게 선의를 품게 하라.’

그러니까 감정의 동요가 없는 자리는 떠납니다. 새로운 자리로만 향합니다. 그곳은 설레임은 있지만, 감정일 뿐임을 나중에 깨닫습니다.

10.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 그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소영 작가는 어린이 독서 교실을 운영하며 어린이에게 배운다고 했습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어른들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텐데, 어떻게 된게 매번 어린이에게 배운다. (중략) 우리 곁에는 어린이가 꼭 있다. 어린이를 생각해야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

어린이를 생각하고 바라보면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묵상했습니다. 작가의 생각을 반추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습니다.

어린이가 작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천국을 놓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장 작은 것을 보려면, 어린이를 봐야 합니다.

11. 어린이는 작습니다. 그런데 작아서 안 보이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작은 것을 안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만 보다보니 낮은 곳에 귀한 생명이 있음을 못봤습니다. 어린이는 그런데 늘 올려다 봅니다. 어린이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존대말을 합니다. 그 어린이에게 존대를 가르치는 어른들은 존대를 잊었습니다. 존대말을 잊은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함을 잊은 탓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키는 커졌는데 언어는 작아졌습니다.

어린이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제가 휠체어를 탔다고 어려워하는 어린이는 못 봤습니다. 달꿈학교 9살 어린 학생의 꿈은 20살이 되어 제 휠체어를 밀어주는 거랍니다.

횡재했습니다. 휠체어로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 교회 교우들은 다 압니다. 내년에 졸업 예정인데 어느 학교 갈 거냐고 물었더니, 20살 때까지 달꿈예술학교 졸업 안 할 거랍니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감동입니다. “목사님 도와줘야 돼요.”

아이의 눈에는 제가 보이나 봅니다. 다행히 휠체어를 타고 있는 제 눈에 아이와 눈높이가 맞아 행복합니다. 내 이동을 돕겠다는 어린이가 있어 행복합니다.

어린이는 보상이 단순합니다. 큰 선물 주지 않아도 동물 피규어 5천원 짜리에 감동하고 1주일을 살아갑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주기만 해도, 동물을 오려주기만 해도 하루가 행복합니다.

어른들은 더 큰 보상을 쫓아 사는데 왜 늘 술에 취해 흥청망청하면서 행복하지 않다 할까? 단순한 것에, 지극히 작은 것에 감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언제나 배웁니다. 어린이는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언제나 가르치려 듭니다. 배운 게 얼마나 된다고 남을 가르치는지, 때로 부끄러운데 부끄러움을 잊은 채 원래 내가 알았던 것인 양 훈수를 합니다.

언제나 배우는 어린이들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살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무서워집니다.

“No Kids Zone(노 키즈 존).”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편히 있고 싶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요? 작가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하는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들은 잊고 있나 보다. 어른들도 한때는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12. 아이들은 봅니다.

들었던 것과 다른 삶을 말입니다. 마치 고백과 다른 삶을 살았던 엘리멜렉처럼 말입니다.

입으로는 언제나 정의와 사랑을 가르치는 어른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내 가족만 내 친구만 내 편의만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삶을 봅니다. 그렇게 천국은 이 땅에서 사라집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만드는 세상은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고, 분리시키며 우리끼리만의 세상을 만들지는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왕이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는 않을까 무서운 요즘, 5월을 맞이했습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작은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천국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가르침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같이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같이 풀을 먹음으로, 아름다운 천국 공동체를 일구어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권할 수 없는 어른들의 모든 삶은 범죄와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술과 담배를 권할 수 없다면, 여러분부터 끊어내셔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너희 한 가족이야”라고 말했다면 여러분부터 혈통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왕이라고 가르쳤다면, 여러분부터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를 살아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서로 싸우지마. 싸웠다면 용서해”라고 가르쳤다면, 여러분부터 혐오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천국을 소유하는 가정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