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탑’ 그리는 시각장애인 김안나 선교사
어릴 적 부모 실수로 시각장애 얻어
최근 작고한 남편과 영상선교 활동
이주태 장로 권유로 달력 제작 참여
“작게라도 도움 되는 삶이라면 감사”
“실제로 만들어 세운 종탑보다 오히려 균형미가 뛰어나요. 뜻깊은 달력이 탄생할 것 같습니다.”
김안나 선교사(67)의 손끝에서 탄생한 십자가 종탑 그림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주태 장로의 말이다.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 소재한, 원로목회자들의 휴식처인 ‘목자카페’에서 만난 김 선교사는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드리우면 곳곳을 환히 밝히는 것이 있다. 붉은 조명의 십자가탑이다. 한국을 찾은 많은 외국인들이 “이 나라에 병원이 이렇게 많은가”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 밤 풍경의 주인공은 십자가였다.
세련된 건축 형태로 모습이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한국교회의 성장을 그대로 대변한 역사의 증거물인 십자가탑을, 김 선교사는 정성스레 그려나갔다. 한국원로목사총연합회는 김 선교사의 그림을 담은 특별한 달력을 올해 말에 발간한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지나치게 가까이서 캔버스를 들여다 보며 펜을 움직여나가는 김 선교사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했다. 알고 보니 5급 시각장애인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다는 그녀의 그림에는 일류 미술가가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원래는 건강한 몸으로 축복 속에 태어난 그였다. 하지만 한 돌이 채 되기도 전,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던 부모의 한순간의 실수로 신경에 심각한 손상이 왔다.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건 10살 때였다. 맨 앞에 앉아도 선생님이 칠판에 쓴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알게 된 병명은 안구진탕증. 한쪽 눈은 신경이 완전히 죽었고, 다른 한쪽 눈만 돋보기를 쓰고서야 책을 가까스로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마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계속 흔들렸다. 계속된 친구들의 놀림까지, 그때 벌써 죽음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와세다 대학을 나와 대한석탄공사를 지내고, 우리나라 최초의 지질학 박사로 불리는 김남길 박사다. 큰오빠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탕진했고, 둘째 오빠는 선천적인 질병으로 병상을 떠나지 못했다. 셋째 오빠 덕분에 같은 직장에서 불편한 몸으로나마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로 발령을 받았고 그렇게 영원히 이별했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 홀로 남겨질 어머니 생각에 스스로 생을 마칠 수도 없었다. 오빠의 소개로 다니던 직장에선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소질이 있던 그림 실력 덕분에 일러스트, 상업 디자이너로서 할 일이 있었다. “너는 할 수 있어”라는 오빠의 말 한 마디에 용기를 얻어, 열심히 공부해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었다.
하지만 워낙 좋지 않은 시력에 의존해 일을 하니 몸에 무리가 왔다.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두통에 복통까지 이어졌다. 저녁이 되면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곤 해서 안과에 찾아갔더니, 의사의 말은 “봉사가 되고 싶으면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식당 설거지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6, 70년대를 풍미한 영화 ‘맨발의 청춘’, ‘하얀 전쟁’,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오필연 촬영감독이다. 그는 지난달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한번 사랑의 실패를 겪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때 만나, 22년간 부부이자 동역자로 살았다.
오 감독 역시 사업 실패로 어려운 시기를 겪던 중 만난 김 선교사와 함께,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담긴 종로5가에서 카메라를 들고 인생의 제2막을 시작했다. 크고 작은 행사를 촬영하고 목회자들의 일대기를 다큐로 만들었고, 김 선교사는 그의 ‘조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사람이 故 한경직 목사였다. 김 선교사는 “무척 인자하신 분이셨다. 저를 수양딸로 여겨주실 정도로 따뜻한 사랑을 많이 주셨다”고 회상했다.
김 선교사 부부는 세상 욕심 다 버리고 영상선교의 길을 다짐,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다가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사례비를 주면 받고, 주지 않으면 그저 봉사라 생각했다. 쌀이 떨어지면 조금 참으면 됐다. 20년을 넘게 그렇게 사역해, 종로5가를 방문했던 목회자들치고 이들 부부의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문화선교사’라는 칭호도 그러던 중에 받았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이주태 장로와 만난 것도 어느덧 20년이 되었다. 지난달, 그렇게 한 곳을 함께 바라보던 오 감독이 작고한 뒤 슬픔을 달래던 무렵, 이 장로가 김 선교사를 불러냈다. 홀로 있지 말고 목자카페에서 틈틈이 봉사도 하며 삶의 이유를 다시 찾아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곳에는 오랜 기간 김 선교사를 딸처럼 여기는 많은 원로목사들이 있었다.
달력 제작은 영상사역자로 섬기는 동안 손수 분장도 하고 무대도 꾸미던 김 선교사의 손재주를 기억했던 이 장로의 권유로 시작됐다. 남편을 잃은 마음이 치유되기도 했지만, 자신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아직 또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더 큰 위로가 됐다.
불편한 몸에도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 위해 몸부림친 삶은, 오히려 보는 이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17살 때 주님을 만난 이후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 번도 마귀의 편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배고파 길거리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십계명에 반하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장애가 생긴 것이 아니기에 한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고 싶었다. 원로목사들을 섬기며 카페 한쪽에서 틈틈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안됐지만, 제법 훌륭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시 주어진 사명을 감사한 마음으로 붙들고 그려나가는 김 선교사의 작품은 올해 말 달력으로 접할 수 있다.
한편으로 김 선교사는 경증 장애인에 대한 복지 사각지대의 문제를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다. 김 선교사 본인도 주변의 도움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는 극심한 시각장애를 겪고 있지만 장애등급심사에선 정작 경증에 해당하는 '5급'을 받아 정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처지다. 그는 "스스로 중증 장애인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 인권 의식이 갈 길이 멀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