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없는 곳에서 가득히 모였다 상상해서 설교도
메타버스 시대 도래시, 비대면 예배 활성화 가능성
설교자, 자신을 잘 알고 청중을 더 깊이 이해해야

지혁철
▲지혁철 목사는 “설교자는 하나님께 굴복하는 사람, 성경에 굴복하는 사람, 교회에 굴복하는 사람”이라며 “목사는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고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게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전했다.

<설교자는 누구인가>를 펴낸 지혁철 목사는 1편에 이어 부교역자로서 설교에 대한 책을 펴낸 이유부터 시작해 설교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저자 지혁철 목사는 고신대학교 기독교 교육학, 고려신학대학원 신학 석사(M.div), CFNI School of Worship Techinical Art에서 예배의 실제를, Dallas Baptist University Worship Leadership M.A 과정에서 예배 역사와 이론에 바탕한 서번트 리더십을 공부했다. 2021년 Fuller Seminary KDmin에서 ‘현대 청중을 깨우는 이벤트 설교: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하여’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린 시절 생사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돌아온 저자에게 아버지는 “보너스처럼 다시 살게 된 인생, 하나님을 위해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목회자의 길에 올랐지만 수백 수천 번 솟구쳐오르는 ‘나는 아니라는 생각’과 날마다 씨름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 치열한 내적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은 거룩한 욕심이 꽃송이처럼 피어올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열망은 더 깊어지고 확고해졌다.

설교자로서 겪었던 많은 실패와 실수, 날 선 비판과 모진 굴욕이 디딤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실패와 실수를 딛고 일어나 쓰임받은 다윗, 베드로, 바울에게 매료된 저자는 자신의 열망과 실패와 실수를 바탕으로 『설교자는 누구인가』를 집필했다. 다음은 지 목사와의 두 번째 일문일답.

-지난 2년 비대면 설교를 해보니 어떠셨고, 대면 설교와 같은 효과(?)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힘들었습니다. 성도 한 명 없는 곳에서, 성도가 가득히 모였다고 상상하고 설교한 적도 있었습니다(큰 예배당에 단 한 명의 성도도 없었습니다).

비대면 설교를 통해, 대면 설교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깨달았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는 동안 저뿐 아니라 모든 설교자가 대면 예배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대면 예배를 통해, 설교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도와 적극적인 소통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대면 설교의 장점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 방편이 되었지요. 앞으로 인류는 바이러스와 계속 싸울 것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언제고 다시 바이러스가 찾아온다면 지금보다 더 쉽게 더 빨리 비대면으로 전환할 것이며, 이번 경험을 살려 더 좋은 예배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방 주사를 맞았다고 봅니다.

메타버스(Metaverse) 시대가 온다면, 비대면 예배가 더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비대면 예배에 대한 인식이 더 확대될 수도, 깊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메타버스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렇다 해서 비대면 설교가 대면 설교와 같은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대면 예배가 회중이 한 자리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성찬을 나누는 공동체 예배를 오롯이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대면 시대를 준비하되, 대면 예배의 아름다움을 지켜가기 위해 더 힘써 노력해야 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부교역자이신 걸로 압니다. 설교에 대한 글을 첫 저서로 내는데 용기가 필요하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 광주은광교회라는 아주 좋은 교회에서 선임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목회학 박사 코스웍(Coursework)을 마치고 논문을 쓰다가, 광주은광교회 부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논문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면 결국 논문을 마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논문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틈나는 대로 설교학 책을 읽고 논문 뼈대에 맞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설교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그때 짧게 정리한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었습니다.

종종 설교자로서 길을 잃을 때가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힌트를 저에게 주고 싶어, 저 자신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글이 모이고 쌓였습니다. 이 글을 출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여러 출판사에 문의하고, 추천사를 써주신 목사님과 교수님께 보내드리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샘솟는기쁨 출판사를 만났고, 책이 나오게 됐습니다.

숨겨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평소 독자의 선택을 받고, 독자 손에 들려 읽히는 책을 쓰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글쓰기 관련 책을 규칙적으로 읽으면서 필력을 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출간의 길이 어렴풋이 보이면서부터,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앞뒤 재지 않고 쓰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책 출간 후 부목사가 책을 쓰는 것이 흔하지 않다는 것과, 부목사가 설교 관련 책을 내는 일은 더욱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몰라서 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저는 광주은광교회 위원회조정실을 맡아, 교회 전체 살림과 흐름을 파악하고 진행하고 조율하는 사역을 맡았습니다. 저희 교회는 각 위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바른 신앙 회복과 전수를 위해 애쓰는 가정사역위원회와 복잡하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 건강한 청년회를 세워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일 낮 설교, 남녀노소 누구도 이해할 수 있어야
쉬운 설교? 오히려 수준 높고 탁월한 내용일 것
한국교회 설교 횟수 너무 많아, 양질 설교 어려워

-주일 낮 예배에서 설교자 앞 청중은 수준이 제각각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설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요.

“저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사역했던 교회나 지금 사역하는 교회나, 대학교수에서부터 팔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청중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저는 설교는 직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호하거나 중의적이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설교를 지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듣고 쉽게 이해하는 설교라면, 쉬운 설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쉬운 설교는 수준이 낮은 설교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책은 읽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볍지 않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 가슴에 들리는 설교야말로 좋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설교라면 그야말로 높은 수준의 설교요 탁월한 설교이겠지요.

주일 오전 예배는 제각각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설교자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대중적인 설교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을 더 깊이 파고드는 설교나 어려운 설교는 수요일이 가장 적합한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대중적인 설교, 쉬우면서도 성경에 충실한 설교, 청중의 가슴에 무언가를 남겨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설교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설교자가 몸살을 앓는 이유기도 하고요.”

-한국교회에는 설교도 설교자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또 특정 몇몇 설교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됩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시고, 지역교회 ‘평범한’ 설교자들은 어떤 차별점을 둘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는 설교 횟수가 너무 많습니다. 시골 교회나 작은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은 주일 오전과 오후, 수요일, 경우에 따라 금요일, 새벽기도, 주일학교까지 설교하셔야 합니다. 줄잡아 한 주에 10회 이상입니다.

양질의 설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집중해야 할 설교와 조금은 가볍게 넘어가야할 설교가 무엇인지 판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교회나 개인마다 상황이 다를 수 있어,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설교자는 누구인가

대형교회에는 설교자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전 성도 앞에서 설교하기도 어려운 구조이니까요.

설교는 수영과 같아서, 이론만으로는 배우기 어렵습니다. 실전이 필요합니다. 수영을 제대로 배우려면 물도 먹어 봐야 하고, 두려움도 맞서보아야 하고, 체력도 길러야 하고, 깊은 바다에도 뛰어들어 보아야 하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수영하면서 적합한 요령도 익혀야 합니다. (제가 통영 바닷가에서 자라서 잘 알고 있습니다.)

설교도 비슷합니다. 이론만으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설교해 보면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물도 잔뜩 마셔보기도 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맞서보기도 하고, 맷집고 길러야 하고, 다양한 청중 앞에서 설교하면서 요령도 익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형교회는 부교역자들이 설교를 연습하고 배우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설교 기회가 조금 더 많은 교회로 사역지를 이동해 보시는 것도 설교자로 성장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목받는 설교자 존재, 배아플 일 아닌 고마운 일
청중과의 관계, 지역 교회 목회자들만 갖는 특권
이찬수·송태근 설교보다 ‘우리 교회 목사님’ 최고

특정 설교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쥐고 사는 세상에서는 자연스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찬수 목사님이나 송태근 목사님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설교자가 있다는 것, 탁월한 설교자가 있다는 것은 배 아플 일이 아니라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 탁월한 설교자가 많아지면 목회자에게도 성도에게도 유익한 점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탁월한 설교자가 끝까지 말씀에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 부분을 지나치게 신경쓰거나 배 아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청중과의 관계는 지역 교회 목사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조금 부족해도 우리를 위해 수고하고 눈물과 땀을 아끼지 않는 목사님을 모신 성도라면 행복할 것입니다.

가끔 이찬수 목사님이나 송태근 목사님 설교를 들을 수 있겠지요. 그렇다 해서 우리 교회 목사님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최고지요.

좋은 식당을 찾는 외식 문화로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종종 외식을 즐깁니다. 맛있으니까요. 분위기도 근사하고 서비스도 좋지요. 역설적이게도 외식이 좋은 건, 집밥 때문입니다. 결국엔 또 집밥으로 돌아갑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시는 목사님들의 설교도 종종 들으실 수 있지요. 맛있고, 근사하고, 탁월하니까요. 그래도 결국 우리 교회에서 우리를 위해 열심히 밥 짓는 우리 목사님의 설교로 돌아갑니다. 집밥이 최고거든요.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탁월하지 못해서, 뛰어나지 못해서, 주목받지 못해서 하나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설교자, 그 못생긴 설교자가 교회를 지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못 생긴 설교자 때문에, 잘 생긴 설교자가 더 부각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설교자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는 못생긴 설교자로 사는 것도 예수를 닮아가는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스포트라이트 안 받아도 되고,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이찬수는 이찬수! 송태근은 송태근! 지혁철은 지혁철! Be youself!”

-신학교는 궁극적으로 설교자를 길러내는 곳인데, 커리큘럼이나 실습 등에서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신학대학원을 졸업한지 20년째입니다. 지금 신학교들의 커리큘럼을 잘 모릅니다. 동역자 전도사님과 강도사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제가 공부했을 때보다 더 친밀한 관계 속에서 더 잘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각 신학교마다 좋은 목회자, 좋은 설교자를 배출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목회자, 좋은 설교자를 배출하는 것은 신학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책임도 상당합니다. 교회와 신학교가 좋은 관계를 맺고 상호 협력하는 것이 좋은 목회자, 좋은 설교자를 배출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AI 가수 그대로 흉내… 설교까지 하는 시대 올지도
서로 눈 바라보며 말씀 나누는 것 비교할 수 없어
설교의 미래, 설교자에게 달려… 좋은 설교자 필요

-AI가 목회자들의 목소리를 연습해 성경을 읽어주는 시대입니다. ‘설교’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AI가 고(故) 김광석 씨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너무나 비슷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감정을 전달하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더군요. AI가 더 발전하면 그 부분도 채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AI가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를 두루 섭렵하고 정보를 축적해서 설교하는 시대가 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일종의 비대면 예배가 되겠지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대면 예배가 가진 힘이 있지만 설교자와 청중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말씀을 나누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설교는 일방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소통이 일어납니다. 좋은 설교자라면 설교 시간 청중과 함께 무수히 상호 작용하는 설교자입니다. 설령 일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운다고 하면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일은 AI가 할 수 없는 지점이자 영역입니다.

설교의 미래는 설교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설교자가 많이 필요한 이유이고,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이유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으신가요. 추가 집필 계획도 궁금합니다.

“좋은 목사, 목사다운 목사 되는 것이 꿈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담임 목회지를 위해 기도하고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에서 교회를 잘 섬기고 싶습니다.

성도들과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교회, 하나님 말씀으로 든든히 서가는 교회, 지역사회를 끌어안고 변화시키는 선교적 교회를 세워가고 싶습니다.

다음 책을 여러 각도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설교학이라 부를 수 있는 책을 첫 책으로 출간했으니, 설교 관련 책을 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첫 책 <설교자는 누구인가?>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책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출간 후 몇 차례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 시간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잘 준비해서 독자의 선택을 받는 책을 한 권 더 출간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설교란 무엇이고, 설교자란 누구인가요.

“‘설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수많은 책과 글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책에서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전하고 나누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을 설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설교자는 그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겠지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말처럼 타고난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만들어지고 빚어지는 설교자도 있다고 봅니다. 설교라는 무거운 영광과 책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설교자.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고 넘어지고 자빠져 찢기고 깨지는 설교자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 설교자입니다.

놀라운 점은 넘어지고 자빠져 깨지고 찢어진 그곳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 ‘상처 입은 치유자’를 빌려, ‘상처 입은 설교자’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