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이승만과 목회자 이명직의 반공주의 비교
공통점: 공산주의 반대, 기독교 신앙 핵심적 근원
러시아 적대, 인권과 평등, 자본주의 존중도 이유
방법론과 형성 배경, 기독교 국가론 등 차이 존재

강종진
▲강종진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연구소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박사) 제93회 정기세미나가 지난 19일 오후 비대면으로 개최됐다.

부소장 박창훈 교수(서울신대) 사회로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는 강종진 박사(별리교회)가 ‘이승만과 이명직의 반공주의 비교 연구: 1920년부터 1945년까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 발표는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을 지낸 대표적 정치인과 부흥사로 성결교회 초석을 다진 대표적 목회자를 ‘반공주의’라는 기준으로 비교해 관심을 모았다.

강종진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어진 6.25 전쟁, 이후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이승만과 한국교회가 견지한 반공주의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 이념”이라며 “한국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에 반대해 왔다. 해방 이후 좌우 갈등과 6.25를 거치면서, 반공주의는 한국교회에서 더욱 강화됐다”고 운을 뗐다.

강 박사는 “특히 이승만과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강력한 연대를 형성했다”며 “이와 함께 이명직은 1920년대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교회를 지키려 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교회 반공주의에 대한 연구는 비판적 시각이 주류를 이뤘다. 이는 독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라며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부각됐고, 이명직의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발표 취지를 전했다.

이를 지적하기 위해 강 박사는 먼저 이승만과 이명직의 반공주의를 비교했다. 먼저 공통점에 대해선 “기독교 신앙이 반공주의 사상의 핵심적 근원이었다”며 “이승만은 회심 후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 공산주의자들이 펼친 종교를 혁파하자고 주장했고, 이명직은 1920-30년대 반기독교 운동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의 무신론이 있음을 간파하고 무신론적 유물론에 근거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고 소개했다.

이승만
▲이승만 건국 대통령. ⓒ김현웅 씨 제공
적대적인 대러시아관(觀)도 동일했다. 그는 “이승만은 한성감옥기 형성된 러시아포비아(Russophobia. 恐露) 사상을 평생 견지했다. 이러한 적대적 대러관은 두 차례 대소 외교 실패로 더욱 강화됐다”며 “이명직 역시 10대에 겪은 러일전쟁의 상처가 있었고, 러시아 혁명 후 이어진 반종교정책으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박해 소식을 들으며 적대적 대러 인식을 드러냈다”고 했다.

이 외에 ③인권과 평등 존중 사상 ④자본주의 경제 제도 수용 ⑤유교적 성장 배경과 도덕적 영향 등도 공통점으로 꼽았다. 그는 특히 ⑤에 대해 “둘은 모두 유학을 공부한 학자로, 공산주의가 기존 도덕 질서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며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종교 혁파 주장에 반박했고, 이명직도 공산주의가 가져올 유교 질서의 붕괴와 도덕 무시에 우려했다”고 전했다.

강 박사는 “이승만과 이명직의 반공주의 사상의 기저에는 기독교 신앙이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두 지도자는 공산주의가 지닌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무신론 사유 체계를 간파했다”며 “그들은 공산주의 인간 이해가 유물사관에 근거해 인명(人命)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며 “둘의 유교적 성장 배경은 공산주의의 반인륜적 행태에 배타적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두 지도자의 반공주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먼저 “이승만과 이명직의 반공주의는 방법론이 달랐다”며 “이승만은 정치경제학적, 이명직은 성서해석학적 관점이었다”고 설명했다.

강종진 박사는 “이승만은 정치학자로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닌, 합당/부당한 것을 구분했다. 합당한 것은 인민의 평등 사상으로 봤다”며 “부당한 것으로는 재산 공동소유, 자본주의 경제제도 부정, 지식계급 철폐, 종교 혁파, 국가소멸론 등이라고 했다. 특히 나라의 독립보다 공산주의를 우선순위에 둘 수 없다고 했다”고 이야기했다.

강 박사는 “반면 이명직의 반공주의는 성서해석 방법론에 근거한다. 그의 성서해석 조명에서 러시아는 사탄이 일으키는 반기독교 운동의 중심지이고, 러시아의 반기독교 운동은 종말의 때를 보여주는 징조였다”며 “이명직은 사도행전 4장을 해석하면서, 성경이 공산주의를 인정한다는 일부 주장에 반박했다. 이명직에게 공산주의는 요한계시록의 적그리스도이며 붉은 용이었다”고 말했다.

또 “정치 지도자인 이승만에게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는 필요하다면 연대와 협력이 가능한 대상이었다. 어디까지나 독립의 방편으로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실제로 소련과의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이명직에게 소련은 결코 타협하거나 연대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이며 붉은 용이었다. 그는 신앙과 배치되기 때문에 공산 사상을 반대했다. 그에게 도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란, 인류를 짐승 같은 처지로 타락시키는 사상이었다”고 했다.

이명직 목사 전집
▲이명직 목사 전집. ⓒ크투 DB
기독교 국가 건설론의 차이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은 ‘문명의 진보’를 강조했고, 영미와 같은 기독교 문명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하게 했다”며 “반면 이명직은 ‘문명의 타락’을 강조하는 전천년설을 주장, 기독교 중심 국가건설론이 없었다. 이명직에게는 재림의 때가 더 중요했고, 그에게 소련과 공산주의는 재림 때 심판당할 적그리스도 세력”이라고 풀이했다.

반공주의 형성 배경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과 이명직의 반공주의 형성에는 미국 사회와 교회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이 미국 사회의 정치적 요인에, 이명직은 미국 교회의 신학적 요인에 각각 영향을 받았다”며 “이승만은 임시정부 내 공산주의 세력과의 갈등과 반목으로 반공주의가 형성됐고, 이명직은 러시아 혁명 이후 반종교 정책으로 인한 기독교인 박해와 1920년대 반기독교 운동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 전향 등으로 반공주의가 형성됐다”고 밝혔다.

또 “이승만은 자본주의 경제 제도의 모순점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명직에게는 그에 대한 비판이 보이질 않는다. 이승만은 부익부 빈익빈을 비판했지만, 이명직은 교회 내에도 빈부 격차가 있음을 시인하고, 이를 회개와 성결의 문제로 이해했다”며 “이명직은 빈부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계급과 빈부 문제를 회개와 성결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명직의 주장은,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을 파악했던 이승만과 대비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강종진 박사는 “일제시대인 1920-1945년 혼돈의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은 정치 지도자로 반공주의를 일관되게 견지했고, 이명직은 한국교회 지도자로 직접 전도와 구령운동에 중점을 두고 회개와 성령충만이란 방식으로 공산주의의 반기독교 운동에 대응했다”며 “해당 기간 둘의 반공주의는 동일한 면이 파악되지만, 전체가 동일하지는 않았다”고 정리했다.

논찬에서 정교진 박사(고려대 북한학)는 “발표자는 일제 하 한국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했다”며 “그 방법으로 이승만과 이명직의 비교를 통해, 두 인물의 반공주의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반공주의 실천에 있어 이승만과 이명직의 차이점 중 국가관 차이를 제시하면서, 이명직은 전천년설 입장에서 문명의 타락론을 수용해 국가건설론 사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며 “그렇다면 당시를 마지막 종말, 예수 재림의 시기로 봤던 이명직은 나라의 독립에 대해서도 큰 기대가 없었는가? 해방 정국 이후 이명직은 종말론적 관점 때문에 통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는가”라고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