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2장 1-2절
날짜: 2022년 4월 17일
장소: 강변교회

윤학자 탄신 100주년 김명혁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저는 제가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를 은퇴한 다음 지난 14년 3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강변교회는 주로 일년에 두 번씩 와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은퇴한 다음 28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저의 삶과 사역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수환 목사님과 강변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선 서론적인 말씀을 한 마디 드립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 평생을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거짓되고 게으르고 나태한 온갖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 중의 죄인으로 살아오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제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인 동시에 신앙의 선배님들이 부족한 저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1.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첫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물려주신 귀중한 신앙의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북한의 신의주와 평양에서 목회의 길과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부족한 저에게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몸에 지니고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북한 신의주 제이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를 하셨고 그 다음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 가서 2년 동안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는 신의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가시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셨고, 공산 시대에는 평양에서 공산 정치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가시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목회에 전념하셨고 그리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가셨기 때문에 제가 자주 친밀하게 만나 뵙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잡혀가 계시는 감옥을 이따금씩 어머니와 함께 찾아가서 감옥 밖에서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라고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예수님을 바로 믿고 목회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감옥에 잡혀가는 고난과 핍박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제가 11살 때인 1948년 7월 평양 사동 탄광 감옥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여기서는 주일 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겠어요. 저 남쪽으로 가겠어요.”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면서 “나는 너 없이는 못살아”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던 저의 어머니는 제가 남쪽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다음 달인 1948년 8월 어느 날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에 가서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는데 우리들은 모두 인민군들에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저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서지 않고 혼자서 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밭을 달리고 강은 건너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청년이 저 보고 어디를 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서울로 간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어떻게 가냐고 물었습니다. 같이 오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 모른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기차를 태워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천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서울역에 내린 다음 제 주머니에 넣고 오던 이모님 집의 주소인 중구 을지로 3가 7번지로 걸어서 찾아가서 이모님을 만나게 되었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2. 주일학교 선생님들

둘째로 제가 평양 서문밖교회에 다닐 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귀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분명하게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은 저에게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이 가장 귀중한 신앙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또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주일을 성수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고 새벽 기도에도 빠지지 않았고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평양 제5인민학교에 2년 동안 다녔는데 일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감옥에까지 가셨는데 나는 정학을 당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주일 성수의 신앙과 이성봉 목사님

셋째로 제가 월남한 다음 서울과 대구에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1948년 8월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지만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기도와 예배를 마음껏 드리면서 감사와 기쁨을 몸에 지니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주일 성수와 예배는 물론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수요일 저녁 예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방산국민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 했고 놀기도 열심히 잘 했습니다. 제가 방산국민학교에 다닐 때 내가 평양 사투리를 쓴다고 나를 놀리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나와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많이 몰려와서 우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과 “이제부터 싸우자” 라고 말하고 그 학생을 때려 눕혔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반에서 인기를 더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월남한지 2년 후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대구로 피난을 가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했는데 신앙 생활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그때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시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하면서 너무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정성껏 들었고 성경 아무 곳을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찾지도 않고 암송해서 읽었고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너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몇 번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하시면서 안수기도를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기도와 은혜 사모와 성결과 청빈과 재림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가난과 고난의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 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모님과 함께 5명이 조그만 셋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잠그지도 않고 교회로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 셋째였습니다. 제가 2000년 5월 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4. 김치선 목사님

넷째로 제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와 헌신의 귀중한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 서울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니면서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와 헌신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 기도회 때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사”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하셨는데, 저는 은혜와 감동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후에 남산으로 올라가서 나무 아래서 3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산 기도회에는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까지 찾아가곤 했습니다. 대구 주암산 기도회 때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저는 그 가사에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고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떻게 피를 흘리셔서 교회를 사셨을까?” “나는 교회를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제 옆에 있던 어떤 어른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 있어?” 라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제 옆에서 기도하던 김치선 목사님의 아들 세창이가(나보다 4살 어린) 저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해서 내가 기도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며 사랑했고 김치선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너무 많이 쏟아 받았습니다.

한 번은 김치선 목사님께서 관악산에 기도원을 짓는데 교인들이 모두 산 아래에서 큰 돌을 열 두 개씩 산 위로 메어 나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귀찮게 생각하고 듣지 않았지만 저는 제 몫으로 큰 돌 열두 개를 나른 다음, 저의 어머니 몫으로 열두 개를 더 날랐고 그리고 저의 아버지 몫으로 열두 개를 더 날랐습니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김치선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을 날랐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에게 “들을 귀”와 “순종하는 마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무엇보다 회개를 강조하시면서 설교 시간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했고, 가정을 다스리는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사참배의 경력을 인정하며 그 죄의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고 사랑했는데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2만 8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즉 2만 8천 여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서울고등학교 3학년 학생일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에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어서 주일날 들판에서 예배 드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처에 있는 학교의 교실 서너 개를 빌려서 학생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고 3때는 공부에 전념하여야 하는데 저는 고 3때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저에게는 여전히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 셋째였습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합격하여 역사를 전공하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좋은 목사가 되려면 역사를 전공하는 좋다고 저에게 말씀을 하셔서, 제가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한양제일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달았습니다. 아이들 60여 명과 어른들 40여 명이 모였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 엄마 교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양 제일 교회가 제일 좋아요.” 제가 주일 오후마다 대학생 교복을 입고 천막교회 근처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어떤 교인이 보고는 “천사가 전도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랑과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의 목사님을 저의 신앙의 스승님으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듣는 귀와 순종할 수 있는 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립니다.

5. 손양원 목사님

다섯째로 제가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함께 희생적인 섬김과 순교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서울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여름 어느 날 아침 남대문 네 거리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을 사서 들고 제가 새벽기도 후에 날마다 올라가서 기도하곤 하던 남산 어느 숲 속으로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의 원자탄」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있는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점심을 먹는 시간에 아이들이 자기들을 너무 많이 사랑하시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나병에 걸릴까 봐 자기들끼리 따로 앉아서 점심을 먹는데 손양원 목사님께서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아이들의 점심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서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고,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기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양 아들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서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고 제일 사랑하고 제일 닮고 싶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저는 한 평생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강의와 설교를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데 자만큼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강의와 설교를 많이 하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믿음의 사람” 이시고 “사랑의 사람” 이시고 “소망의 사람” 이셨는데 손양원 목사님께서 평생토록 사랑으로 섬기시던 애양원의 나환자들애 대한 순수하고 간절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고백하셨습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소망의 사람” 손양원 목사님께서 옥중 생활을 하시면서 힘들고 지치실 때마다 자주 부르시던 손수 지으신 “주님 고대가”가 너무너무 귀중한 간절한 기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고대가”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 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선생으로 죽음을 소원으로” 삼으면서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6. 한경직 목사님

여섯째로 제가 1살 때부터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친밀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기도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가난과 고난과 화해와 평화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월남 후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동안에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정성껏 사랑으로 돌아보시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린원,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우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기독교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 상을 받은 다음 날 상금 전부를 북한 동포들 돕기에 사용하도록 기증하기도 하셨습니다.

은퇴 후 남한산성의 아주 작은 집에서 26년 동안 불편하게 사셨는데 3무 4무 5무의 가난과 고난과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남한산성을 제일 많이 찾아가곤 했는데, 한경직 목사님을 마지막까지 돌아보시던 백운경 장로님이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이 오면 제일 좋아하지요”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과 도우심을 너무 많이 받고 살았는데 그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사셨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을 가리켜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 이라고 부르면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 이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템플턴 재단은 1992년 한경직 목사님에게 템플턴 상을 수여하면서 “20세기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목사” 라고 평했습니다.

시인 고훈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을 가리켜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 라고 목이 메어 불렀습니다. 한 마디 더 하면 한경직 목사님은 집과 재산과 통장을 지니지 않은 삼무 사무 오무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이 그분의 청빈을 조금이라도 본 받고 지니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결어

이것으로 “신앙의 선배님들을 통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라는 제목의 간증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온갖 죄와 허물로 가득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제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죄인인 저에게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고, 그리고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께서 부족한 죄인에게 사랑과 도움과 가르침과 기도와 축복의 손길을 펴 주셨기 때문이라는 간증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우리 죄인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가르침과 축복의 손길을 펴신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진정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본 받아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조금씩이라도 펴면서 살아가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귀중한 말씀 한 마디를 인용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 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헌 곳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 36, 40)”.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