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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8편 강해


요절: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2절)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전형적인 시 중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약속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만나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말씀을 통해 감사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씀이 하나님보다 높다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아멘.

1. 말씀이 모든 이름보다 높은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1-2절).

다윗은 온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주님께 감사합니다. 며칠 굶은 사람은 전심으로 먹을 것을 찾습니다. 목이 타는 사람은 전심으로 물을 찾습니다. 간절히 감사를 원하는 사람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다윗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주의 성전에는 주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예배를 통하여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느끼며,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사랑이 한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다윗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많습니다. 여호와 이레(예비), 여호와 닛시(승리), 여호와 살롬(평화), 여호와 라파(치료), 여호와 로이(목자), 여호와 삼마(함께 하심), 여호와 올람(영원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말씀을 이름보다 높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말씀을 떠나서 환상이나 계시나 전통을 통해 하나님을 찾다가 거짓된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떠나서 환상을 따르면, 신비주의(영지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말씀을 떠나서 전통을 따르면 율법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높이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 자신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높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일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의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2. 간구하는 날에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3-5절에 보면 시인은 연약함 중에서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시인이 간구하는 날에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다윗의 가장 큰 기쁨은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응답하여 물질을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윗에게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에 말씀으로 힘을 주어 그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였고, 하나님은 말씀을 주사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다윗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왕들이 주님께 감사합니다. 다윗에게 주신 말씀을 듣고 다른 왕들이 여호와의 도, 곧 여호와의 말씀을 노래합니다. 내게 주신 말씀의 은혜가 크므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윗은 내가 감사하는 것을 듣고 모두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큰 감사 제목입니다. 주님 말씀에 지혜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크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의 영광은 세상 왕의 모든 영광보다 매우 큽니다. 왕들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크신 영광을 보고 주님께 감사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노래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25년 동안 얻은 것이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주신 말씀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굽어 살피십니다

6-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높이 계십니다.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멀리 계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망한다고 하나님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높은 데서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 안에 오셔서 내재적으로 계십니다. 우리의 내면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누가 교만한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아실 뿐 아니라 겸손한 자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존재를 떠나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도 교만이고 열등감도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옷이 없어 사람을 못 만난다고 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된다고 하는 것도 교만이요, 안 된다고 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근심 걱정도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원리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겸손한 척 하는 사람에게 속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개인을 보나 단체를 보나 나라를 보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시면서도 교만한 자를 보십니다. 원망 불평은 교만에서 옵니다. 돈이 없다고 실패했다고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했을 때 원망 불평하면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을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원수들이 다윗을 핍박하여 다윗은 환난을 당합니다. 원수들이 다윗에게 분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고난을 굽어보십니다.

다윗이 환난 중에 다녀도, 주님은 다윗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주의 손을 펴사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십니다. 주의 권능의 오른손이 다윗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연약하고 낮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겸손한 다윗을 구원하십니다.

4. 여호와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십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보상하여 주십니다. 다른 성경에는 주님께서 다윗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주신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뜻을 두셨습니다. 각자에게 사명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십니다.

여호와는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다윗은 주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지으신 다윗을 버리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존재합니다.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없다’고 하여도, 부모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면 받을 수 있고 능력 주시면 할 수 있고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효도가 따로 있습니까? 부모님이 계셔서 그 은총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효입니다. 내가 불쌍한 부모를 먹인다고 생각하면 불효입니다. 아무 일도 못해도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부모의 가르침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내 생각 의지를 다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피조물이니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셔서 자신에게 두신 목적을 다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본전을 뽑으려면 나를 일으켜야 되지 않습니까?”

오요한 시편 역경 속에 피어나는 찬양의 꽃
▲오요한 목사.
오요한 목사
천안 UBF(말씀사랑교회)
성경 66권 유튜브 강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