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선교사들 “조미조약, 한국 선교 절호의 기회”
조미조약, 미국과 수교뿐 아니라 선교 관계 수립해
역사교과서, 개항 서구 제국주의 침략 과정 설명해
실제 위협 일본·러시아, 극복 위해 미국·서양 접근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크투 DB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 제26회 영익기념강좌가 ‘조미수교 140주년 기념 특별강좌: 한미관계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3월 30일 오후 온라인 개최됐다.

한미수교 140주년 한국기독교기념사업회(이하 한미사) 주최로 열린 이날 강좌에서는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정과 그 의의에 대한 재고찰’을 제목으로 강연했다.

총 14조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우리나라 역사상 서양 국가와 맺은 첫 조약이며, 1882년 5월 22일 미국 로버트 슈펠트(Robert Shufeldt, 1822-1895)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申櫶)·김홍집(金弘集)이 제물포(인천)에서 체결했다.

조약 체결과 이후 조선 정부가 파송한 보빙사(報聘使) 미국 방문 이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이 한국을 대거 찾으면서, 한반도 복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美 감리교 해외선교위원회와 美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rank F. Ellinwood, 1826-1908) 등 선교 전문가들과 일본·중국 주재 선교사들은 조미조약 체결이 ‘한국 선교를 착수할 절호의 기회임을 입증한다’고 판단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슈펠트 신헌
▲(왼쪽부터)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미국 슈펠트 제독과 한국 신헌 전권대신.
조미조약 내용에 종교와 선교 관련 내용이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지 않은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지만, 미국과의 수교뿐 아니라 선교 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례로 최초 의료 선교사인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외교관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도 1909년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1882년 조미조약에 의해 문호가 개방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박명수 교수는 “조미조약에 대해서는 수교 50주년이던 1930년대 선교사 2세들이 연구했고, 1982년 100주년 전후로 관련 영문 연구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후 한반도에서 반미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렇다 할 업적이 없었다”며 “하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한반도에서 한미 관계의 중요성이 재고돼, 학자들이 좀 더 깊은 연구를 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우선 필요한 것은 조미조약 체결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밀히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박 교수는 “현재 역사교과서는 개항을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으로 이해하고, 한미 관계를 그런 틀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조미조약 체결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위협을 느꼈던 것은 서구 제국이 아니라 반대로 주변의 일본과 러시아였고, 이들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 접근한 것”이라며 “아울러 가장 가까웠던 중국이 오히려 과거의 중화질서를 배경으로 서구 식민지 질서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고 풀이했다.

영익기념강좌 26회
▲강좌가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박명수 교수는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을 읽은 고종은 조미조약을 맺기로 결정하고 1880년 말 사람을 보내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논의는 중국의 이홍장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며 “1881년 7월 슈펠트가 미국에서 천진으로 와 논의가 구체화됐지만,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882년 봄 이홍장의 겨울 관저인 중국 보정(保定)에서부터였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1882년 봄, 일차로 이동인의 조선 정부안, 황준헌의 하여장 안, 마건충의 이홍장 안을 종합해 하나의 조선측 안이 마련되었고, 슈펠트와 홀콤브는 미국 측 안을 마련했다. 1882년 3월 25일 두 안을 놓고 양측 토론 결과 4월 1일 슈펠트가 제1차 수정안을 만들었고,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뜻하는) 속방 조항이었다”며 “중국 측은 속방 조항을 넣기를 원했고, 미국 측은 반대했다. 4월 11일 2차 수정안이 제출됐지만, 결국 이 조항은 제외하기로 하고 나중에 조선 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속방 문제를 별도로 조회하기로 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미국은 별도 조회는 미국과 조선의 내부적인 일로, 국제법상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 조미조약은 중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조선 두 주권국가 사이에 이뤄졌다”며 “처음부터 조미조약을 맺으려 시작한 것도, 주도한 것도 중국이었으나, 만국공법에 의해 미국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미조약에서 중국의 위치는 불분명해졌다. 결국 조미조약을 통해 종주권을 인정받으려 한 중국의 시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은 종주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조미조약 체결 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만들어 종주권을 확인하려 했다. 결국 조선이 종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다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입장에서 조미조약은 서구 열강과 관계 맺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미국과 조약을 맺은 다음 영국,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가 뒤따랐다. 결국 이 조미조약을 통해 한국은 서구 세계와 만나게 됐고, 이 통로를 통해 서구민주주의와 근대 과학문명이 들어왔다”며 “조선은 기독교 선교를 거부했지만 결국 이 조미조약을 통해 기독교가 들어왔고, 이것은 한반도를 대륙 문화에서 해양 문화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미조약은 중화질서가 무너지고, 한반도가 새로운 질서로 진입하는 첫 출발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에는 140년 전 조미조약에 대한 평가를 시도했다. 첫째로 조미조약 체결 배경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근거해 조미조약은 러시아의 위협에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과 미국이 연대하기 위해 체결됐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이 조미조약을 추진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며 “중국은 한편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여장의 비밀문서를 통해 조선을 서구 유럽식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주한 미국대사관
▲초기 미국대사관. ⓒ주한 미국대사관 홈페이지
둘째로 “조미조약 체결 과정에서 중국의 위치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중국 정부는 조미조약 모든 단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1880년 가을 작성한 하여장의 <주지조선외교의>는 조선을 전통적 중화질서를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서구 제국의 식민지 질서 형태로 편입시키려 했다”며 “이홍장이 만든 조미조약 초안에는 조미 관계를 외교관계가 아닌 영사관계로 제한해 중국주재 공사의 지휘를 받게 하려 했고, 조미조약 자체도 중국 예부의 인준을 받게 하려 했다. 이는 미국의 거부로 좌절됐지만, 중국이 조미조약을 통해 얻으려 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셋째로 “조미조약 체결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도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에 자신을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로 소개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주권을 인정했다”며 “이 같은 미국의 입장은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고, 외교권을 가지려는 중국 입장을 반대하게 만들었다. 조미조약에서 속방조항이 삭제된 것은 오직 이런 미국의 입장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1858년 미국과 맺은 북경조약에는 거중조정 항목이 있었고, 이홍장은 이 거중조정 항목을 조미조약에 포함시켰다. 이는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좋은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며 “이홍장이 다른 서양 국가들보다 미국과 먼저 조약을 맺은 이유는 거중조정 외에 미국이 프랑스처럼 종교를 강조하지도, 영국처럼 아편을 수출을 강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미조약의 출발은 미국에 대한 긍정적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고 전했다.

넷째로 “조미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주장은 다시 한 번 제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미국은 서구 여러 국가들처럼 중국·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었지만, 이를 수정해 왔다(1880년 일본, 1881년 중국). 그리고 조미조약에도 반영했다”며 “실제로 미국은 일본과 달리 조선이 요구하는 관세주권을 인정했고,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도 보다 엄격하게 규정했으며, 5년 후 이런 불평등 조약도 국제법에 합당하고 평등한 조약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조미조약은 서구 열강과 맺은 어떤 조약보다 불평등 요소가 감소됐으며, 불평등한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도 사실 이홍장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고 했다.

다섯째로 “조선은 조미조약을 통해 미국의 거중조정 역할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원산 개항으로 수많은 외국 배들이 조선해안에 나타났고, 이리에는 중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극동에서 출구를 차지하려 했다. 특히 일본인의 등장은 일본을 견제할 다른 세력을 요청했다”며 “1882년 인천 개항을 앞두고, 조선은 미국이 먼저 와서 일본을 견제해 주기를 원했다.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말한 연미(聯美)는 바로 이런 미국의 거중조정 역할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박 교수는 “실질적으로 중국은 미국에게 단순한 거중조정 역할을 넘어 조선에 대한 공동보호국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극동에서 이런 과도한 부담을 지지 않으려 했다”며 “북경조약 정도의 거중조정은 반대하지 않고 수용했지만,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슈펠트는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주한 미국대사관
▲1904-1905년 美 공사관저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고든 패독 서기관, 에드윈 모간 공사, 윌러드 디커먼 스트레이트 부 총영사(둘째 줄). ⓒ주한 미국대사관 홈페이지
여섯째로 “조미조약에서 1880년 전후 조청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은 비밀리에 조선의 외교에 깊숙이 관계했고, 조선도 외교에 있어 중국에 크게 의존했다”며 “조선은 조미조약에 중국의 속방임을 명시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권유에 의한 속방 조항 삽입에 동의했다. 중국은 조미조약 체결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상실할까 염려해 마건충과 정여창을 파송해 감시하도록 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신사척사운동으로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 조선은 중국 황제에 칙령을 내려 개항을 독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며 “1880년대 이후 조청 관계는 전통적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서구 식민지 질서를 모방하려 했다. 필자는 당시 조선은 전반적으로 만국공법과 중화질서가 서로 마찰되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곱째로 “조미조약에서 조선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기독교의 유입이었다”고 거론했다. 그는 “조선이 개항을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가 들어와 유교 문명을 붕괴시킬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며 “1880년 부산에 온 슈펠트는 조선 왕에게 ‘미국은 자신의 종교를 조선에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에서도 미국은 프랑스와 달리 정치와 종교가 분리돼 조미조약을 맺는다 해도 기독교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 유림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1881년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이런 가운데 만들어진 조선 측 조미조약 초안에는 ‘기독교 금지’가 들어 있었고, 이홍장에게 이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미국은 조미조약에서 선교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며 “이홍장은 기독교 선교 불가를 조약에 명시해 미국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 보다, 아예 종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 종교를 거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미조약은 통상만 언급하고, 선교는 언급하지 않은 특별한 조약이 됐다”고 밝혔다.

여덟째로 “조미조약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조일조약으로 자주국이 된 조선에 대해, 중국은 조미조약을 통해 조선을 중국의 속방으로 선언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1876년 조일조약을 통해 조선이 완전히 독립국이 됐다고 생각해 조미조약을 맺으려 했다”며 “미국과 중국은 조일조약을 두고 다른 생각을 가졌으나, 결국 조일조약의 정신을 이어 조약을 체결했다. 조미조약은 조일조약에 이어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분리시켰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이렇게 미국이 중국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에도, 중국이 미국을 조미조약에 끌어들인 이유는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며 “만일 중국이 조미조약을 중재하지 못하면 미국은 일본을 거중조정자로 내세울 것이고, 당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영국보다는 보다 중립적 위치에 있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보빙사 조미수호통상조약 민영익 홍영식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고종은 이듬해인 1883년 민영익·홍영식 견미(遣美)사절단 11명을 미국에 파견했다.
아홉째로 “조미조약을 체결에 있어, 이홍장과 슈펠트 두 인물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홍장은 중국 양무운동의 핵심으로, 동북아 외교의 중심이었다. 그는 조미조약 체결을 통해 중국 동북부의 안전과 함께 조선을 중국의 속방으로 유지하려고 했다”며 “슈펠트는 미국 해군으로서 미국이 나갈 길은 태평양의 제국이 돼 상업을 개척하는데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는 “슈펠트는 원래 중국을 좋아했다. 이를 안 이홍장은 슈펠트에게 조미조약을 중재하겠다고 약속했고, 동시에 중국 해군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이런 제안을 추진하지 않았고, 이것은 슈펠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며 “이는 당시 미국에서 강하게 일어나던 중국이민제한법과 맞물려 확대됐다. 조미조약 마지막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필자는 슈펠트가 속방조항에 강하게 반대한 것은 이런 개인적 감정도 관련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창훈 교수(서울신대) 사회로 진행된 강좌에서는 김도형 박사(청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가 논찬했다. 제2발표에서는 박용규 박사(총신대 명예교수)가 ‘1882년 조미수호조약과 한국선교의 연관성’을 발표하고 김명구 교수(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가 논찬했다.

앞선 예배에서는 박창훈 교수 사회로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원로)가 ‘하나님의 계획(렘 29:10-11)’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한미사 사무총장 허문영 박사(평화한국 상임대표)가 축사했다. 영익기념강좌는 연구소 설립기금을 기증한 故 김영익 집사(장충단교회)를 기념해 1997년부터 매년 봄 열리는 학술강좌로,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운동의 최근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