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 개척예배와 주일학교 거의 동시 착수
처음부터 복음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토대 구축
장로교·감리교 주일학교 연합운동, 발전 주 요인
193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성장, 1938년 해체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학회 참석자들 모습.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조현진 교수)·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박경수 교수) 공동 학술대회가 26일 오전 서울 한국성서대학교에서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 한국주일학교연합회 100년’을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박용규 명예교수(총신대)가 ‘주일학교 운동과 조선주일학교연합회’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박용규 교수는 “1922년 결성된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 선교가 시작된 이후,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선교 사역에서 중요한 책무로 생각했다. 그들은 주일학교를 중시하는 미국의 신앙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선교부 개설 후 개척예배와 주일학교를 거의 동시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 선교사들은 선교보고에서도 ‘교회와 주일학교’ 현황을 동시 보고했다”며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을 1884-1905년, 1905-1938년, 1945-1960년, 1960년 이후 등으로 크게 분류했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시작된 성경 중심 주일학교는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 안에도 견고하게 자리잡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며 “한국주일학교연합회(The Korea Sunday School Association)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 복음화를 위해 협력해 왔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남감리교선교회는 설립 당시 서울과 송도에 각 1개씩에 불과하던 주일학교가 1903년 11개, 1905년에는 34개, 1918년 138개, 1930년 359개로 급성장했다. 학생 수도 1900년 80명에서 1903년 440명, 1905년 1,770명, 1918년 5,911명, 1930년 13,303명으로 급증했다.

평양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면서, 이 지역 주일학교는 서울을 넘어섰다. 1897년 ‘주일학당’도 총 121곳 중 평양이 89곳으로, 31곳이던 서울에 비해 세 배 이상이나 많았다. 주일학교 수뿐 아니라, 주일학교 재학생 수도 1901년 북장로교 전체 8,668명의 중 서울이 1,450명, 부산이 52명인 데 비해, 평양은 7,166명에 달했다.

박용규 교수는 “한국에서 주일학교운동이 교파 초월 연합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한국교회가 대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였다. 부흥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주일학교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며 “1905년 9월 장로교 선교회 4곳과 감리교 선교회 2곳이 함께 한국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Protestant Missions in Korea)를 결성하고, 그 안에 주일학교위원회(a Sunday School Committee)를 두었다. 위원회는 만국주일공과와 성경강론월보 등 성경교재를 출간했다”고 전했다.

이후 1911년 4월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 for The Korea Sunday School Association)’가 조직되면서, 세계주일학교협의회(the World’s Sunday School Association)의 협력과 지원 속에 한국 주일학교는 발전을 거듭했다.

2년 후인 1913년 4월 19일, ‘미국 주일학교 대표단(American Sunday School delegation)’이 한국을 찾은 가운데 최초로 ‘조선주일학교대회’가 열려, 서울의 거의 모든 주일학교 학생과 교사인 1만 4,700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는 한일병탄으로 인한 민족적 슬픔 가운데 있는 민족 가운데, 수도 서울에서 교파를 초월한 일체감을 심으면서 한국 주일학교를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박용규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박용규 박사는 “한국교회 주일학교 운동은 단계적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고 밝혔다. ⓒ크투 DB
박 교수는 “또 한 번의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은 1919년 3.1운동 이후 진행됐다. 사회계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장로교가 진흥운동, 감리교가 세기운동을 전개하면서 주일학교 운동이 사회계몽운동 일환으로, 한국교회와 선교회 차원에서 연합으로 추진됐다”며 “1910-192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 연합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높이 평가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을 가져다준 주 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블레어 선교사 등의 노력으로, 1920년 한 해에만 주일학교가 4천 곳 증가했다. 당시 성경구락부의 90%, 하기아동성경학교의 30%, 주일학교의 20%가 믿지 않는 아동을 대상으로 하면서, 불신자와 접촉점을 제공하고 복음전파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을 심어 어린이들이 기독교 이상을 삶 속에서 실천에 옮길 전기를 마련했다.

장로교의 전진운동과 감리교의 세기운동, 1920년 동경 제8회 주일학교대회, 1921년 전국 주일학교대회 등을 계기로, 1922년 11월 10개 단체 대표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이하 연합회)가 결성된다. 이후 강제 해체된 1938년까지는 연합회의 ‘황금시대’였다. 1928년에는 미국 LA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1930년 9월에는 ‘만국연합회(세계주일학교협의회)에 가입했다.

박 교수는 “연합회는 주일학교 교육 관련 문헌들을 출판하고,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단을 파송해 지속적으로 호흡을 같이 했으며, 한국에서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했다”며 “이 세 가지 사역 중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주일학교 교육 관련 문헌들을 출간하는 일이었다. 연합회는 <만국통일공과>를 도입해 전국 교회에 보급했고, 여러 수준 있는 서적들을 출간했다”고 전했다.

그는 “하기아동성경학교가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22년이었는데, 3년만인 1924년 94개 학교가 열렸고, 1만 1천 명이 등록했다”며 “당시 하기아동성경학교의 교과과정에는 성경뿐 아니라 체육, 음악, 세계위인전, 수공, 사회봉사 등이 포함되어 있어 하기아동성경학교가 단순히 직접선교만이 아니라, 복음의 접촉점과 더불어 교회와 신앙을 세상과 사회에 연결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소개했다.

또 “1922년 11월 연합회가 결성된 후, 주일학교와 하기아동성경학교가 꾸준하게 증가했다. 주일학교는 변화하는 사회 속의 어린 생명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 있는 이들에게 기독교 정신과 바른 가치관을 심는 역할을 감당했다”며 “1918년부터 주일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위한 잡지와 참고서가 출판·보급됐고, 1925년 연합회가 간행한 <주일학교잡지(主日學校雜誌)>는 단순한 소식 차원을 넘어 한국 주일학교 교육을 한 차원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희생활>을 비롯한 수많은 주일학교 저널들은 복음에 목마르고 교육에 목마른 많은 청소년들의 갈증을 채웠다. 성경구락부 역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채널이 됐다”고 했다.

그는 “1921년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에 이어, 이듬해 1922년 11월 1일 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주일학교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1920·1924·1928·1932년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를 파송하고, 세계주일학교협회에서 간행하는 만국통일공과를 주일학교 교재로 채택하고, 수많은 주일학교 관련 서적들과 잡지들을 간행해 주일학교를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며 “1921년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한 후 1925년 2회, 1929년 3회, 1933년 4회 대회를 열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주일학교운동을 전개했다”고 풀이했다.

박용규 교수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갈등에도, 1930년대 후반까지 한국교회 주일학교는 꾸준하게 성장했다. 1935년 ‘한국주일학교연합회 노트’가 6만 3천 권, 1936년 6만 8천 권, 1937년 7만 2천 권이 인쇄됐다”며 “이처럼 강력한 주일학교운동 가운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나타났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식민정책 강화 속에 큰 시련을 맞았고, 감리교 엡웻청년회, 장로교의 조선면려청년회(CE),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와 더불어 1938년 6월 21일 강제 해체를 당하고 말았다. 연합회가 ‘일본 군국주의 압력으로’ 세계주일학교협의회에서 탈퇴해 일본주일학교연합회에 강제 가입한 것인데, 이는 쉽게 정부 통제 산하기관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전했다.

박 교수는 “1945년 해방 후 1947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재건되면서, 주일학교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경직 목사가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재건이 시작됐다”며 “이후 1948년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이하 협회)로 개칭돼, 단순히 주일학교만이 아니라 기독교학교를 포함한 기독교교육 전반으로 지평을 넓혀 세계적 흐름과 국내의 요청에 따랐다”고 말했다.

전킨 선교사
▲전킨 선교사의 부인 레이번 선교사와 주일학교 여학생반 학생들. ⓒ크투 DB
그러나 연합운동으로 진행된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59년 예장 합동과 통합의 분열, 감리교와 성결교의 분열로 위기와 변화를 맞았다. 그 결과 1960년 이후 한국주일학교운동과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았다”며 “협회가 여전히 연합운동 기구로 존속했지만, WCC 찬반 노선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 방향에서 기독교학교 운동을 전개했다. 협회는 1960년대 변화되는 상황에 맞춘 <기독교교육>을 창간, 국내 유일 교사지로 전국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협회는 결국 한국교회 분열로 반쪽만의 연합체가 됐고, 그나마 1968년 성결교가 독자적인 주일학교 공과를 출간하고 1972년 예장 통합이 그 전철을 따르면서 입지가 상당히 축소됐다”며 “그 결과 1930년대의 강력한 위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변화 속에 1969년 기관지 <기독교교육>을 국내 유일한 교사지로 탈바꿈시키고 주일학교 교사 중심의 연합기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2015년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다”고 정리했다.

이후 김웅기 박사(성서대)가 ‘일립 강태국의 교육사상이 기독교 학교 교육에 주는 적용점 연구’, 이영식 박사(총신대)가 ‘초기 한국교회 주일학교 연합활동의 발전과 장로교 사례’, 박경수 교수(장신대)가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의 저항과 항변’, 배정훈 박사(고신대)가 ‘천국에서의 영광을 바라보며’, 전광수 박사(국제신대)가 ‘개혁신학자들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김은하 박사(장신대)가 ‘20세기 초 팬데믹 시대에 움튼 여성들의 우정’을 각각 발표했다.

앞서 열린 개회예배는 조현진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회장 사회로 박형신 교수의 기도, 박영실 교수(총신대)의 설교, 강규성 한국성서대 부총장의 환영사, 김요섭 총무의 광고, 박영실 교수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