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실한 복음주의자, 교회의 선교적 사명 중시
기도의 사람, 성령 역사 의지, 편지 많이 남겨
한국 대부흥운동 신학적 토대 상황 맞게 조우
세대주의와 부흥회식 예배 의식엔 문제 의식

한국개혁주의연구소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교수) 주최 ‘선교사 사역 탐구 시리즈 강좌 1’이 3월 25일 오후 서울 유나이티드재단 더글라스홀에서 ‘마포삼열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1부 예배에서는 오덕교 박사 사회로, 안명준 박사(평택대 명예교수) 기도 후 현창학 박사(합동신대 은퇴교수)의 설교 ‘기도와 응답(시편 3:1-8)’, 정효제 목사(대한신대 전 총장)의 축도 등이 진행됐다.

이후 2부 학술발표에서는 강덕영 장로(유나이티드문화재단 이사장)의 환영사 후 이상규 박사(백석대 석좌교수)가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 선교: 평양지부의 개척, 평양신학교의 설립, 한국 장로교의 건설자’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상규 교수에 따르면 ‘마포삼열(馬布三悅)’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은 한국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자 조선 교회의 아버지였다. 동료 선교사였던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은 그를 “한국교회를 낳은 아버지”라고 불렀다.

1890년 1월 25일 자신의 26번째 생일날 내한해 46년간 서울(1890-1893)과 평양(1893-1934)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당시 선교사 정년인 70세 되던 해인 1934년 1월 25일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2년간 평양에서 체류하다 1936년 9월 24일 한국을 떠났고, 3년 뒤인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주 몬로비아(Monrovia)에서 7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한 후 첫 3년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조선어를 공부하고, 후일 경신학교로 발전한 예수교학당 책임자로 일했다. 이 기간 서울 이북지방을 순회 전도하다 평양을 관서지방 선교거점으로 인식해 1893년 평양으로 옮겨, ‘사랑방 전도’를 시작으로 장대현교회를 비롯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장대현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첫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인 조선야소교장로히(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해 24년간 교장으로 섬겼고, 평양 숭실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숭의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선교사로 활동했다. 1907년 독노회장을 비롯한 장로교 치리회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한국 장로교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3.1운동 때도 지원·후원을 하는 등 만세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예장 고신 악법동향세미나 이상규 교수
▲이상규 교수. ⓒ크투 DB
마펫의 주요 사역을 정리한 이상규 교수는 “마펫은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좀 더 광의로 말하면 건실한 복음주의자였다”며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설을 신봉했고, 역사적 기독교 혹은 장로교 전통을 따라 기독교 기본 교리를 고수했고, 성령의 주도적 역사를 신뢰했다. 특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중시했는데, 이런 신학적 견해는 매코믹신학교 전통을 추수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십자가의 도’는 그가 늘 강조했던 가르침과 설교의 중심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체류하는 45년 동안 십자가의 도를 전한 선교사였다”며 “그는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를 건실한 보수주의 신학의 토대 위에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마펫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역사를 믿고 의지하고 그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많은 편지를 남겼다. 실로 그는 ‘편지 쓰는 선교사’라고 불릴 만큼 많은 편지를 썼다”며 “은퇴 후에도 평양에 거주하던 마펫은 1936년 7월 3-14일 소래로 휴가를 다녀온 후 열사병에 걸려 언어장애가 왔고, 요양차 9월 24일 말없이 한국을 떠나 돌아오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상규 교수는 “마펫 선교사는 내한했던 1,55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자신의 큰 키(183cm)만큼이나 한국교회를 위해 크게 기여한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실제 기초를 놓은 인물”이라며 “그의 다섯 아들 중 3남 사무엘 휴 마펫(마삼락) 목사와 4남 하워드 마펫(마화열) 의사는 2대 선교사로 한국에서 선대의 유업을 계승했다”고 소개했다.

마포삼열
▲마포삼열 선교사. ⓒ크투 DB
셋째 아들 휴 마펫(Samuel Hugh Moffett, 1916-2015)은 마삼락(馬三樂)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6년 평양에서 출생해 휘튼대학과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으나, 1951년 1월 공산당에 의해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갔고, 1955년 11월 아버지를 이어 제2대 한국 선교사로 내한해 안동선교부에서 잠시 일하다 서울로 전임돼 1981년까지 장신대 교회사 교수로 활동했다.

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초대 학장, 연세대학교와 숭실대학교, 대한성서공회 이사 등으로 봉사했다. 1981년 한국에서 은퇴한 뒤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임명돼 1986년 은퇴할 때까지 아시아교회사, 선교 등을 가르쳤다. 2015년 2월 9일 미국 프린스턴에서 9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 살 어린 넷째 아들 하워드 마펫(Dr. Howard F. Moffett, 1917-2013)은 마화열(馬和烈)로 불렸는데, 1917년 8월 16일 평양에서 태어나 미국 휘튼대학과 노스웨스턴대학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1948년 12월부터 1993년까지 45년간 대구 동산병원 의사로 봉사했다. 6.25 전쟁에 미 해군 군의관으로 참전해 9.28 서울 수복에 참여했다.

하워드 마펫은 1993년 은퇴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카핀테리아(Capinteria)에서 노후를 보내다 산타바바라 사마르칸트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중 2013년 6월 2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아들 토마스 피시 마펫(Thomas Fish Moffett)도 휘튼대학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돼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한국개혁주의연구소
▲박응규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마포삼열과 한국 장로교회의 부흥

이후 박응규 교수가 ‘마포삼열과 한국 장로교회의 부흥’을 발표했다.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을 논할 때,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구조적 틀을 조성한 마포삼열의 역할과 공헌을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마포삼열은 1907년 안식년을 맞아 설교자로나 주역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 영적 각성의 신앙적 기반을 조성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박응규 교수는 “마포삼열은 평양 지역 교회 개척과 성장의 기틀을 확립해,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북한 선교의 선구자’로 간주됐다. 그는 경건주의적 열정을 지녀 ‘거리의 선교사’로 전도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개혁신앙과 장로교적 특성을 선명하게 유지했다”며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영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교회의 성장과 영적 각성을 도모할 수 있는 신앙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은 현지에 적합하고 토착적 교회와 지도자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적용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 특히 서북지역에서 대부흥운동과 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는 기반 역할을 했다”며 “철저한 성경공부 제도를 근간으로 자립, 자전, 자치를 지향하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한국교회 성장과 부흥을 가능케 한 기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포삼열은 한국에 적합한 사경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들을 창안하여 효과적으로 적용했다. 대부흥운동 직후인 1908년부터 한국교회에 시행되기 시작한 제도들 중 날연보와 권찰제도가 있었는데,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해 전국으로 널리 확산됐다”며 “날연보 제도를 통해 마포삼열은 전도의 열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정신을 심었다. 또 ‘권찰(leader of tens)’ 제도는 마포삼열이 미국의 존 워너메이커가 봉사했던 필라델피아 주일학교를 본받아 교회 모든 교인을 10명 단위로 나눈 후 권찰이 각 그룹을 관장하도록 하는 제도였다”고 했다.

박응규 교수는 “마포삼열은 한국 대부흥운동의 신학적 토대, 즉 개혁신앙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준수하면서, 개혁주의적 경건주의를 한국 상황에 맞게 조우시킴으로써 영적 침체와 위기를 극복하는 토대를 제공했다”며 “그의 사역을 통한 영적 각성의 불꽃은 대중 집회가 아닌, 교회라는 테두리 속에서 타올랐다. 그런 면에서 시대 변화와 선교지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정리했다.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

끝으로 이승구 교수(합동신대)는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그는 “마포삼열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기본적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좋은 복음주의적 토대를 마련해 한국 장로교회가 성경에 뿌리내리고 좋은 복음주의적 토대를 가지게 했다”며 “학교를 통한 성경적 신학을 전파한 것과 교회 중심의 실천적 신학을 제시한 것도 높이 산다”고 밝혔다.

이승구 교수는 “한국교회에 대한 마포삼열 목사의 큰 기여를 생각할 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적 복음을 전해주고, 모든 것에 대한 성경의 토대를 분명히 한 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라며 “하지만 세대주의와 부흥회식 예배에 대해선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사들은 사역할 때 교회 전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사역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교수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선교사들은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하고,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들이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게 온전하고도 바른 신학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며 “잘못하면 부실한 신학적 토대 위에 교회가 상당 기간 있으면서 잘못을 극복하는 과제를 가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런 문제가 덜한 사역을 했다면, 한 나라의 교회가 더 든든한 토대에 서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