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떼자듀합창단
▲샹떼자듀합창단.

합창 음악 전문 연주 단체 샹떼자듀합창단(Choeur Chantez à Dieu, 음악감독 김혜옥)이 오는 24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에서 수난절 기념 음악회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Johannes Passion BWV 245(요한수난곡)’을 연주한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뜻인 ‘샹떼 자 듀(Chantez à Dieu)’에서 이름을 따온 샹떼자듀합창단은 교회음악가 겸 지휘자인 김혜옥 연세대학교 은퇴교수를 중심으로 합창 음악에 열정을 지닌 음악인들이 모인 전문 합창단이다. 성악, 기악, 작곡, 합창 지휘 등 다양한 음악적 배경을 지닌 젊은이들이 모여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낭만 시대 작품들을 연구·토론해 콘서트로 선보이는 문화 예술 단체다.

합창단은 교회 음악은 물론 현대 음악과 창작곡들, 무반주 민요 합창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여러 시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주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매년 주요 시즌마다 수난절 음악회, 크리스마스 음악회 등을 통해 교회 음악 거장들의 마스터피스를 대중에 소개하고 있으며, 정기 연주회를 통해서는 이전에 소개되지 않았던 새롭고 다양한 합창 음악의 정수들로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지휘자이자 음악 감독을 맡은 김혜옥 교수는 The Juilliard School 학사·석사, Westminster Choir College 석사, Manhattan School of Music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립합창단, 솔리스트 앙상블 등 국내 최고의 주요 합창단에서 객원 지휘를 했다.

유럽 여러 연주회장에 초청돼 연주한 경험이 있으며, 수많은 합창 지휘 연주와 심사위원을 위촉받아 △스페인 Certamen Intermacional de Habaneras y Polifonia 지휘자 대상 2회 수상 △제54회 Concorso Intermazionale di Canto Corale ‘Seghizzi’ 그랑프리 △Best Program상 수상 △제65회 스페인 Certamen Intermacional de Habaneras y Polifonia 최고지휘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에서 교회음악과 합창 지휘 전공 교수, 대학 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역임한 김혜옥은 현재 샹떼자듀합창단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연주회도 김 교수의 지휘로 음악에 깊이를 더할 예정이다.

합창단과 함께 연주할 ‘Alte Musik Seoul(음악감독 강효정)’은 ‘옛 음악’이라는 뜻의 독일어 ‘Alte Musik’에 ‘Seoul’을 더한 이름이다. 옛 음악을 사랑하는 연주자들의 모임으로, 그 시대 음악을 당시의 음악 언어로 되살리면서 현대적 의미로 다시 해석해 이 시대에 어우러질 수 있는 연주법과 작품을 연구·발굴하고 있다.

이번 연주에서는 국내외에서 오라토리오 스페셜리스트로 인정받으며, 현재 국립 강원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테너 김세일이 샹떼자듀합창단의 2014년 요한수난곡에 이어 오랜만에 함께해 복음사가를 맡아 공연의 깊이를 더한다.

또 연세대 교회음악과 졸업 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을 최고 점수로 졸업, 런던 국립오페라 스튜디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졸업하고 스페인 비냐스, 런던 헨델, 독일 DEBUT, 스웨덴 스텐함마르 국제콩쿠르 등 다수 국제콩쿠르에 입상한 카운터 테너 장정권이 알토 솔리스트를 맡아 고전 음악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예수 역에는 연세대 성악과·독일 트로싱엔 국립음악대학에서 최고연주자 과정을 졸업하고, 2014 Iris marquardt 콩쿠르 1등을 한 바리톤 김현, 소프라노 솔리스트로는 2018·2019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축제 솔리스트, 독일 전역 극장 수십 편 오페라 주·조역 등 유럽과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윤지가 함께한다.

또 연세대 교회음악과, 독일 카를스루에 음대 석사, 뤼베크 음대 석사를 졸업하고 뤼베크 오페라 극장 오펀스튜디오를 거쳐 현재 독일 본 오페라 극장 정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테너 유종훈과 연세대 성악과,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 아카데미 객원 주역을 역임한 바 있는 바리톤 김우진이 솔리스트로 출연해 유럽 정통의 요한수난곡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이 밖에 연세대를 졸업한 뒤 파리 시립 음악원 Concertiste 과정 만장일치 수석 졸업, 리옹 국립 고등음악원 석사 수석 졸업, 파리 문화 예술 경영학교 MBA 졸업의 민혜원이 오르간으로 함께해 안정적이고 수준 높은 호흡을 맞추게 된다.

샹떼자듀합창단

◈좌절과 고뇌 속에서 빚어진 금자탑, 요한수난곡

바흐가 작곡한 요한수난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삶을 성찰하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중세 이래 유럽에서는 매년 사순절이 되면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음악과 함께 다양한 문화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이는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기리면서 ‘지금, 여기’의 삶을 감사하는 뜻에서 벌어지는 향연이다.

요한수난곡은 후기 바로크(1680-1750) 시대의 음악적 특징을 총결산하는 예술의 금자탑이다. 바흐는 1724년쯤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성금요일 예배를 위해 이를 초연했다고 전해지는데, 초연 당시의 상태를 담은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769년 바흐의 차남(次男)인 카를 필리프 에마뉘엘 바흐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면서, 아버지가 남긴 요한수난곡 일부를 활용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바흐 본인이 초연 이후 꾸준히 악보를 수정하고 보완해 가며 오늘날의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수난곡의 연주 전통은 기원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려주일 마태수난곡, 성 수요일의 누가수난곡, 성 금요일의 요한수난곡 성가가 독송(讀誦)되는 형태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 이후부터 독송에 음률이 붙으면서 단선율 성가가 다시 모테트풍으로 진화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多聲) 수난곡으로 점차 스타일이 섬세하고 다양해지면서 단순 예배용이 아닌 연주용 수난곡의 형태가 자리잡았다.

바로크 시대가 되면서부터는 오페라와 종교 극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오라토리오의 발전으로 수난곡의 규모가 커지고, 가사 역시 복음서의 말씀을 다양한 종교시로 각색한 버전으로 입체적 표현을 지향하게 된다.

바흐의 요한수난곡은 예수 그리스도의 배신·포박·(베드로의) 부인을 다루는 1부와, 심판·형(刑)의 집행·별세·장례를 다루는 2부로 구성돼 있다. 이런 틀 가운데 바흐는 당시 종교 시인이었던 브로케스, 포르켈, 하이제와 같은 인물들의 고백시(詩) 가사를 조합해 작품을 썼다.

◈전란의 시대를 산 작곡가 바흐

바흐의 요한수난곡은 라이프치히 시대가 시작되던 1723년 완성·초연된 작품으로, 한창 중년기의 완성도를 구가할 무렵 빚어낸 성과이다. 1708년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전문 음악인 경력을 시작한 바흐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음악적 환경을 찾아 계속 본거지를 옮겨 다녔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바이마르에서 화려·장엄한 음악 예술을 지향하는 쾨텐으로, 그리고 교회음악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프치히로 ‘과감한 이동’을 선택했다.

당시 음악가는 군주와 귀족의 고급 하인 개념으로 대우받았는데, 예술적 완성도를 지향하는 바흐는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작곡 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부단한 투쟁과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나는 배움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음악적 배움과 완성을 방해하는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바이마르 궁정 악단을 지휘하던 중 성의 없는 파곳 주자와 육탄전을 벌이려 했던 사건, 영주 빌헬름 에른스트가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자 항명(抗命)을 거듭하다 감옥살이를 했던 사건 등은 바흐의 강력한 기질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쾨텐으로 이직하려던 바흐가 감옥에서 연구·구상한 작품이 ‘무반주 첼로 조곡’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이후 쾨텐에서 세속곡과 교회 음악곡을 함께 쓰면서, ‘기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종합 예술인으로 성장했던 바흐는 1720년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를 지병(持病)으로 잃으면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영주 레오폴트를 수행해 카를스바트까지 출장을 다녀온 뒤 병으로 아내가 사망했음 알았다. 그때는 장례까지 마친 상태였다.

마침 쾨텐을 비롯해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등이 함께 벌인 다국적 ‘대(大) 북방 전쟁’이 펼쳐지면서 독일 지역 내 각 영방(領邦,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국가)들이 전비(戰費) 편성을 위해 긴축 재정을 펼치게 되고, 바흐가 소속된 궁정악단의 예산도 큰 폭으로 줄게 됐다. 또 레오폴트가 맞은 새 부인이 음악 예술에 대해 상당히 심드렁한 모습을 보이면서, 바흐는 궁정에서 다시 민간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2류 작곡가의 1류 작품’, 수난곡

바흐가 쾨텐을 떠나 라이프치히 교회 음악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과정도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유명 작곡가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 같은 인물을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뽑으려 했는데, 이미 독일 지역에서 유명한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이들이 라이프치히에서 낮은 연봉으로 일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작곡가들이 가장 많은 수입을 거둘 수 있었던 오페라 제작이 아니라 매주 예배에서 연주되는 칸타타(cantata) 합창을 쓰는 것이 핵심 업무였기에, 일류 작곡가가 라이프치히에서 일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당시 시의회는 ‘꿩 대신 닭’으로 바흐를 임용했노라고 무례한 평가를 남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작곡가는 그런 수모를 견뎌냈다.

거대한 전란과 개인사의 비극이 겹쳐 있던 시기에 실의(失意)를 딛고 만들어진 작품이 요한수난곡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바흐의 음악적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특히 작곡가 본인이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작곡 분야의 지식과 문학적 기량이 총괄적으로 결합돼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2류 작곡가’로 대우받았던 바흐의 ‘초일류 작품’이 요한수난곡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