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종교, 자연환경 절대 영향… 유일신 신앙은 유일
이스라엘 백성들, 가뭄 닥칠 때 하나님 전적 의지 못해
‘비’ 절실 필요한 가나안, 이스라엘 백성 기도할 수밖에
예루살렘 수도 삼았던 다윗, 물 부족 문제 없었기 때문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나안의 자연환경은 이스라엘에게 장점과 단점으로 동시에 작용했습니다. 장점으로는 가나안 땅이 두 거대한 문명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정치적으로 안정됐고,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두 강대국이 탐낼 정도의 경제적 가치도 적었습니다. 단점으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다 보니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자주 일어났으며, 따라서 늘 가난과 싸워야 하는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에서 류관석 교수는 구약성경에 주로 등장하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애굽), 메소포타미아(바벨론 등)이 각자 독특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으며, 이로 인해 신이나 우주, 인간과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고 설명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했던 가나안 땅은 크리스천들이 흔히 성경에 적힌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부르고 인식하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과 별개로 자연환경은 상당히 척박했다. 경제적 이익이 크지 않은 자연환경 탓에 강대국들의 상대적 무관심 속에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했지만, 강우량이 부족해 그들에게는 ‘물’이 매우 중요했다.

3천여 년이 지난 지금 성경을 읽는 만큼, 이러한 내용들이 배경에 깔려 있음을 인식하면 성경 ‘오독’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물’과 관련된 비유나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다음은 ‘우리의 눈’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는데 도움을 줄 류관석 목사의 두 번째 이야기.

구약성경 문화배경사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류관석 | CLC | 492쪽 | 24,000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관하셨다고 믿기에, 환경의 영향을 말하면 ‘믿음이 없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믿음과 환경 사이, 균형을 맞출 방안이 있을까요.

“인류문화사적으로 볼 때, 고대 종교가 자연환경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유일신 신앙은 인류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즉 환경에 영향을 받아 생긴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처하다 보니, ‘비’와 관련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였다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고 입술의 고백은 하였지만, 정작 생사가 걸린 ‘가뭄’이라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왔을 때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왔을 때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애굽으로 갔던 것처럼,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나의 존재의 근원으로 고백하였던 믿음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이를 ‘간음’이라고 자주 표현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부부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언약의 줄로 굳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왔다고 하나님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그 동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한다면,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그 신앙고백은 모두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환경은 수시로 바뀌지만, 하나님은 불변하는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가나안을 보통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는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환경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럼 우리가 떠올리는 ‘가나안’이라는 의미는 영적인 것인가요.

“하나님은 왜 하필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가장 살기가 힘든 가나안 지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을까요? 그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면 애굽의 태양신도 사라지고 메소포타미아의 마르둑도 사라졌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지금도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바로 가나안이라고 봅니다. 만일 물질적으로 풍요한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리를 잡았다면,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비’가 절실히 필요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바알에게 한눈을 판 적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물질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은 마귀의 유혹 수단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물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도들이 물질의 축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은 의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였던 다윗 왕 때 이스라엘은 역사상 최고의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가나안의 자연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주변 강대국들을 잠잠케 해주심으로 인하여 재물들이 이스라엘로 쏟아져 들어왔던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바벨론 지도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제작한 세계 지도.

-최근 한 글을 읽었습니다. ‘예수가 천국 비유를 할 때 길가, 돌밭, 가시떨기, 옥토를 구분했지만, 사실 모래폭풍에 모든 것이 덮여 있어 어디가 돌밭인지 길가인지 옥토인지 알 수 없다. 천국은 그냥 옥토만 생각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구별하지 않고 나누는 곳이다.’ 문화배경사적으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전체적인 문맥을 정확히 알 수 없어 함부로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점은 문맥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는 예수님의 놀라운 초기 사역에 저항하는 자들에 관하여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강화에서 제자들을 놀라운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또 기적의 장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례 없이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즉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은 목회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이후 모든 것을 비유로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씨의 비유는 바로 이 과정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선포하는 천국의 비밀은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제자들처럼 오직 선택된 자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는 농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대부분 돌로 이루어진 중앙 산지에 주로 거주했습니다. 돌이 많은 이 지역에 옥토는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빗물에 귀한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다랭이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더 수확을 거두기 위해, 씨를 뿌릴 수 있는 곳에는 조금도 남기지 않고 하나라도 더 뿌리고 싶었던 것이 농부의 마음이었습니다.

농부가 싹이 나지 않을 ‘길’인지 ‘돌밭’인지 모르고 씨를 마구 뿌렸다면, 그 농부는 지혜롭지 못합니다. 이 메시지가 말하는 것은 바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모든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신 예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제자)은 옥토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바리새인)은 돌밭처럼 전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농부들처럼 또 예수님처럼 조금이라도 더 수확을 거두고자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누가 선택되어 구원받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바알 아스다롯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

-이런 식으로 성경 속 환경을 잘 몰라 성경을 ‘오독(誤讀)’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산상강화에서 예수님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게 되고 따라서 길거리에 버려져 밟히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성경의 난제 중 하나로 꼽히는데, 학자들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저는 이 또한 이스라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소금은 절대로 짠맛을 잃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이스라엘 문화에 따른 문학적 비유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면 소금을 만드는 방법은 ①화목(火木)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거나 ②갯벌을 이용하여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에선 신안 염전에서 만드는 천일염이 유명한데, 이처럼 갯벌을 이용하여 소금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화목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데, 이런 이유로 소금은 매우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화목도 없고 갯벌도 없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소금을 얻었을까요? 다행히도 이스라엘에는 사해(死海)가 있었습니다. 지진으로 생긴 요단 계곡에 홍해의 바닷물이 밀려왔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계곡이 메워지고 또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갇혀 호수를 형성하면서 오늘날의 사해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해의 염분 농도가 올라가는 것은 해수면보다 낮은 이 계곡의 높은 온도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해의 수면이 점점 낮아지면서, 소금 알갱이들이 주변의 흙이나 돌들과 엉켜 소금 덩어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금이 필요하면 사해에 가서 소금과 돌들이 뒤섞인 덩어리들을 가져와, 물에 녹여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소금기가 다 빠진 돌덩어리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결국 길가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고, 제자들도 이런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문화를 모르는 우리에겐 이 가르침이 난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역이라기보다, 문화를 알면 더 잘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예도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37-38절에 ‘목마른 자는 다 내게 오라’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하신 때가 언제인지 알면, 이 본문을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이 설교가 그렇게 실감나지 않는 것은, 목이 말라 생사의 기로에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목마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년 겪어야 하는 삶의 과정입니다. 특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 동안, 가나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물 부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설교를 하신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8일간 벌어지는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로, 봄 절기 이후 6개월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물 부족으로 고통을 당해온 날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동물은 물론 식물들도 물이 없어, 모두 누렇게 말라 비틀어지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초막절에 제사장들은 매일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곧 시작할 우기에 이른 비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씨를 뿌릴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물이 간절할 때 목 마른 자를 찾는 예수님의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이 설교는 우기 때보다는 건기 때, 특히 물이 가장 부족한 초막절 절기 때 가장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설교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터널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수로 역할을 했던 히스기야 터널.

여러가지 요소가 뒤엉켜 있는 예도 한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경우 이 대화를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제겐 사마리아 여인이 억지 주장을 하는 유대인에게 도전하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언어 때문입니다. 한국어에는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반말을 쓰시고 사마리아 여인은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을 하니,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고 깍듯이 존대말로 응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존대말과 반말의 구별이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문맥입니다. 전체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부분만 읽다 보면, 억지 해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는 허풍쟁이 유대인(즉 예수님)을 향해, 도전적으로 줄 수 있으면 줘보라고 말합니다.

여인의 이런 도전에 대하여 예수님은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이 여인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이 때부터 비로소 여인의 태도가 변하여 예수님을 선지자로 부르면서, 평상시 자신이 가졌던 의문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이 여인이 하는 예배나 메시야에 관한 질문은, 바로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는 사마리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 여인은, 신명기 18장 15절(cf. 사도행전 3장 22절)의 가르침에 따라 메시야가 분명히 올 것과 또 메시야가 사마리아인들이 행할 모든 일을 알려주실 것을 믿고 지금까지 메시야를 기다려온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되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조금의 논리적 비약이 없는, 매우 생생하고 아름다운 복음 이야기가 됩니다.

-책 속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한 번도 수도로 정하신 적이 없었다’는 구절을 읽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이 왕이었던 곳이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 다윗이 백성의 숫자를 계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로 전염병이 돌 때 제사를 지냈던 타작마당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마음에도 이 도시가 이미 만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이곳에 성전을 짓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더 기쁘셨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전쟁을 통하여 흘린 피로 인하여 솔로몬이 대신 성전을 짓게 되지만, 여기저기 떠도는 하나님의 법궤를 보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다윗의 그 마음이 하나님은 한없이 기쁘셨을 것입니다. 성전을 짓고자 했던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불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매우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알았던 것입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은 현실적인 가치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빗물을 모으는 지형으로 기혼 샘이 존재할 수 있었고 또 많은 물웅덩이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나안 지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이스라엘의 어떤 도시도 가지지 못한 최고 장점입니다. 이후 예루살렘 인구가 폭발하였지만, 물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브온 물웅덩이
▲기브온의 물웅덩이(삼하 2:13).

뿐만 아니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이어주는 교통 요지에 위치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처럼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습니다. 아마 이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었을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더 실감나고 은혜롭게 접하기 위해 추천할 만한 배경사나 관련 도서들이 있으신가요.

“그동안 역사를 취급한 배경사 관련 도서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연환경에서 출발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근거하여 분석한 보다 근본적인 문화 배경사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마 연구 자료 부족으로, 이러한 접근법을 통하여 손에 잡히는 실체를 밝혀내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쓴 책도 완성된 것이라기보다 하나의 새로운 시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오고 많은 목회자님들이 보여준 뜨거운 관심으로 보아, 이 분야에 대한 미래가 매우 밝음은 분명합니다. 이 분야가 제대로 자리잡으면 이제 성경 읽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문화 배경’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책을 추천한다면 <성경문화 배경사전(생명의말씀사)>을 들고 싶습니다. 출간된 지 5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출판 때부터 화제가 되었고 아직도 많이 팔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전이기 때문에 한계는 보이지만, 문화 배경을 공부하는 첫걸음으로 매우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이런 책들을 토대로 앞으로 보다 체계화된 많은 연구서들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의 연구 계획이나 비전이 궁금합니다.

“저는 신약을 전공으로 하는 주경학자입니다. 완벽한 성경 해석이 제 궁극적 목적이지만, 하나님의 도움 없이 제 지혜만으론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방향을 향하여 매일 쉬지 않고 나아갈 뿐입니다.

성경 해석에는 많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원어에 대한 연구, 성경 배경에 대한 연구, 성경 본문의 문학적 분석 등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일종의 종합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혼자 다 하기는 불가능하고, 집단지성이 모여 하나하나 노력하다 보면 한 걸음씩 하나님이 의도하신 성경의 의미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구약성경 문화배경사> 후속으로 <신약성경 문화배경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무대는 구약과 또 다릅니다. 자연환경의 영향이 많이 줄어들고, 초강대국인 그리스-로마 제국이라는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다윗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결국 로마 제국도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복음 앞에 항복하고 말지만, 그 과정은 매우 험난합니다. 이 책도 이번 책처럼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쉬운 언어로 쓰고 싶은데,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또 성경 주석 작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기존 출간된 <기적의 장(마 8-9장)>과 산상강화(마 5-7장)>에 이어, 마태복음 전체 주석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제 박사학위 논문 주제였던 ‘삼단 강조법’이라는 문학기법을 활용하여, 마태복음 전체의 구조와 주제, 그리고 마태 신학에 대하여 나름 체계적인 주석을 내놓고 싶습니다.

이 문학 기법의 특징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입니다. 난제로 여겨졌던 마태복음의 많은 본문들이 이 방법으로 설명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원어 연구가 많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된 이유는 원어를 배우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원어는 영어처럼 회화나 작문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어려운 문법들을 줄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짧은 시간 내에 원어 문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신학 공부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