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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신학자 28인 선언문 작성에 주료 참여한 이정배 박사(감신대 은퇴). ⓒ크투 DB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제목의 신학자 28인 선언문 작성에 주로 참여한 이정배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면, 불교나 유교나 도교 등 다른 종교보다 유독 무교(무속)에 대한 반감적 심리가 현저히 드러난다.

한국에서 무속은 이미 주류 언론 매체를 비롯해 대중의 정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채 확산되어 온지 오래지만, 무속엔 이른바 고등종교의 요건인 인간 윤리의 보편성을 담은 체계화된 교리가 부재한 탓인지 아무 때고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면 표리부동한 세간의 이중적 잣대에 의해 미개한 주술적 신앙이란 질타와 질시의 눈을 감수해야 하는 수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외에도 무속에 대한 유난스런 편견은 이 박사의 전공이 본시 유교의 주류 학파인 성리학(주자학)이었던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기독교인이라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외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으며, 불교나 유교나 도교나 무속 등 어떤 종교들도 우열을 가릴 것 없이 우상숭배의 범주 안에 드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어도 목사나 신학자라고 하면 기독교 신앙인의 윤리적 양심에 따라 인본주의적 관점의 기준을 넘어서는 성경적 진리에 준해 합당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 교회 사회에 덕을 끼친다고 본다.

한편 유의미하게 인상깊은 점은 요즘 무속에 대한 경계를 선언하는 사람들마다 유독 ‘정치 권력화’라는 수식어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된 기독교인의 시각이라면 무속 이슈와 관련된 후보 부부에 대해 정치 권력과 결탁된 무교란 관점보다는, 후보 부부의 영혼에 대한 염려-구원의 이슈가 앞설 것인데 말이다.

이 박사가 목사로서 후보 부부를 자연인이 아닌 정치 권력가로만 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나 그가 속한 집단이 정치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기엔 물론 상당 부분 무속 이슈가 개입되었던 전직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이 그러한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독신 여성으로서 고립되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정황을 현재 야당 후보의 정황과 연결짓는 것은 너무도 지나친 억측이고 과도한 예단이다.

이미 해당 후보와 소속 정당은 선대본부 산하 조직을 전격 해체함으로써 무속인 논란에 대해 나름 행동으로 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 문제가 가라앉지 못하도록 사그라진 불씨를 계속 살리는 역할을 통일교 관련 신문이 미심쩍게 해왔다.

필자는 어쩐지 통일교와 도올을 비롯한 기독교계 내 친중국(동양) 사상계 인사들과 모종의 연합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을 빙자한 이들이 무속 이슈를 빌미삼아 자신들 진영의 정치력을 장악하고자, 반성경적인 시위를 하는 듯한 느낌을 충분히 받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무속 내지 영적 이슈로 세상 언론에 시위와 선언을 하면서 특정 정치인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행위는, 기독교 진리와 기독교계 내의 영적 혼란상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는 마치 한국 기독교가 세상에 대해 무력으로 협박성 전도를 하는 것처럼 비칠 것이다. 이런 행위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기독교의 정신이란 한 마디로 옛사람이 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영적 이슈에 해당되는 수개월 전 녹취록 내용이나, 후보와 정당이 개전의 정을 보인 지나간 사건들을 계속 현재적·미래적 이슈로 되살리며 공격하는 것은, 세상 정치인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위 아니겠는가?

◈유교과 무교

신앙이 자유로운 요즘 같은 시대엔 무속뿐 아니라 어느 종교든 정치인과 연계될 수 있는데, 유독 무속을 터부시하는 데는 국정농단 사건 외에도 성리학과 무속의 역사적 배경도 한몫 하지 않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무속의 기원은 고조선 제정일치 사회에서 제사장, 즉 무당(Shaman)으로서 제천 의식을 행했던 단군왕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근본 없는 미신처럼 무속이 박대를 받고 있지만, 애초 족장이나 제사장으로서 권력과 밀접했던 무교는 삼국시대와 통일 신라,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제천 의식과 예언적 기능을 수행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그러나 유불도라는 외래 종교가 들어옴에 따라 무속은 쇠퇴하면서 유불도에 융합된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자 도가와 불교의 팽배로 인한 망국론을 주장하며, 성리학이 정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성리학은 유교 윤리주의와 제례를 중시하며 불교와 도교를 핍박하고, 무속과 같은 토속신앙 의례를 ‘무허가적’ 음사(淫祀)로 규정한다. 또 갖가지 제도와 장치를 통해 노골적으로 무속인을 탄압하여 천민으로 전락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허가와 무허가’ 규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등종교의 자리매김엔 권력과의 결탁 또한 중요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이후 성리학은 본래 유교 정신과는 다르게 점점 도그마화된 권력 통제 수단이 되어, 명나라와 조선에서 위력을 떨치게 된 것이다.

근래 무교는 재조명되기 시작한 천부경의 붐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천부경에 나오는 환인(천제)와 환웅(천왕), 단군(왕검)의 3신을 섬기는 삼신교 등의 선교(仙敎) 측에선 오늘날 구전되어온 무교의 교리를 정리해 경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했다.

양탁현의 ‘샤머니즘 철학’ 서두엔 무속이 한국 문화의 구성요소이고, 문화를 형성하는 사상을 함축하는 철학적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무속엔 신앙적 기능과 마을 굿 축제에서 보듯 주민들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오락적 기능과 더불어, 원시 시대부터 종합예술적 기능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양탁현은 타종교 문화와 교섭을 꾀하고 양식을 수용함으로써 내용을 풍부하게 해온 굿 문화의 생존방식이 한국인이 선호하는 문화적 향유태도라고 풀이한다. 한국의 유불도 신자들이 예외없이 무속 친화적인 것은 무속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명풀이는 공동체성을 띄고 생활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한국인 정서에 맞고 굿 문화의 전승력으로 작용했다며, 한국인의 신바람 문화와 한국 미학의 근원으로 샤머니즘을 승격시킨다.

결국 성리학은 귀신론에 있어 귀신의 초월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능력까지 덧입고, 치유와 예언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나대는 무속에 비해 수가 낮다.

생각하건대 유교보다 무교가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믿기에, 비기독교인들에게는 훨씬 끌리는 면이 있다. 이는 미신 타파 운동 후인 현대에 오히려 무속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이로 보건대, 무교가 불원장래에 고등종교의 위상을 갖추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두 종교 사이 헤게모니 다툼이 일어나는 느낌조차 받는다.

◈제례 의식의 핵심

필자는 무속 신앙을 문제삼는 측에서 옹호하는 유교의 제례의식 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예전 <장신논단>에 실린 배요한 교수의 글을 참고했다.

영혼불멸을 토대로 한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하는 주자학의 신관을 먼저 살펴보면 천(天)은 만물의 운행 법칙이고, 유한한 인간에 대비해 초월적인 만물의 운행자인 상제(上帝)로 표현되기도 하며, 귀신(鬼神), 신(神)으로도 불린다.

이로 볼 때 유교의 ‘귀신’이란 세인들이 생각하듯 오싹하고 불길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모시는 대상이 된다.

천지만물을 음양의 기(氣) 작용으로 보는 유교에서 ‘귀신’은 자연 현상에 있어서 귀(鬼/屈 :움츠러듬)와 신(神/ 伸 :펼침)의 음양 조화이다. 낮이나 비가 오는 것은 ‘신’이고 밤이나 비가 그치는 것은 ‘귀’가되는 식이다.

그런데 이 음양의 작용이 사람에게는 어떻게 작용할까? 만물의 구성을 본질인 ‘이(理)’와 현상계의 ‘기(氣)’로 보는 유교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기’가 흩어지는 것이고, 이는 120년 동안 점차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엔 하늘의 요소인 ‘혼’(魂氣)과 땅의 요소인 ‘백’(形魄)이 있어 사람은 죽은 후에 ‘혼백’이 되는데,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는 무엇인가? 제사란 천신과 땅신(天神地祇)과 사람 귀신(人鬼), 즉 조상귀신(祖上神) 모두를 대상으로 드려지는 종교적 의례이다.

그러니 본래 제사(제례)는 조상신만이 아니라 해달별인 천신과 산천초목 모든 자연만물 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바치며 기원을 드리는 귀신들과의 교류, 귀신 교감적 심포니인 셈인가?

공자가 제사에 대해 잘 정리한 논어의 「팔일편」(八佾篇)엔 제례 절차와 그 각각의 의미가 기술돼 있다. 즉 인간이 귀신을 맞이하고(迎神), 제물과 술잔을 귀신에게 올리고, 귀신이 제물을 흠향하고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고(降福), 인간이 받은 복을 간직하며(飮福), 귀신을 전송하는(送神) 절차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교의 제사 의례를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제사 과정 자체가 ①각 절차의 단계마다 제관(祭官)이 신에게 고하는 말씀이 있든지 ②신이 제관에게 알리는 말씀을 축관(祝官)이 축문(祝文)을 읽거나 하사 (신이 축복을 내리는 말씀)를 읽는 형식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의 의미는 단순히 가족들 간의 통합이나 유교의 핵심 사상인 예를 좀 더 잘 계승하기 위한 기능적이고 사상적인 의미 이전에,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핵심 사상을 중심으로 진행됨을 잘 볼 수 있다.”

이런 실상을 알고 나면, 여지껏 제사에 대해 가족적 회합의 미덕을 끼치는 의례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적 표현대로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이라도 날리는 심정이 되지 않을까?

공자가 제사를 지낼 때 ‘정성(誠)’이 지극하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을 보게 되고(必見所祭者는 誠之至也), 제사를 받는 신이 인간에게 감응하여 복을 내린다고 말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귀신과 인간의 만남과 감응’을 조상 제사의 핵심으로 강조한 것이다.

미혹의 영은 천지만물의 신으로 군림한 것도 모자라 죽은 사람의 신으로까지 행세하며, 사람의 감정과 영혼을 사로잡고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 소천, 즉석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를 위해 기도하는 교계 지도자들
▲즉석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를 위해 기도하는 교계 지도자들 ⓒ송경호 기자

◈유교식 도덕적 복의 정체

매우 놀라운 것은 이 논문 저자가 예외적으로 특이한 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왜 기독교는 매우 도덕적인 차원의 복을 추구하는 유교 제사관의 핵심을 모르고, 현세기복적인 무속적 제사관으로 오인하느냐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도덕적인 차원의 복 또한 유교의 제사에 근거하고 있다.

“안으로는 내 성심을 다하고 밖으로는 도리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충신은 이것을 가지고 그 임금을 섬기고 효자는 이것을 가지고 그 어버이를 따르니, 그 근본은 같은 것이다. 위로는 귀신에게 순종하며 밖으로는 군장에게 순종한다. 안으로는 어버이에 효도하니 이렇게 하는 것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어진 사람이 갖출 수 있는 것이며, 능히 갖춘 후에야 능히 제사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의 제사는 그 성신과 충경을 다하여, 제물로써 받들고, 예로써 인도하며 악으로써 편안히 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즉 유교적 도덕적 차원의 복이란 위로는 귀신에게 순종하고 인륜을 잘 지키는 어진 사람이 이렇게 갖춰진 자세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귀신에게 받는 복이다. 저자가 억울해 하는 것은 이런 유교식 ‘도덕적 복’ 사상이 제사가 관습화되고 조선의 유교가 타락함에 따라 무속적 ‘현세기복적인 복’ 사상과 습합돼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결국 유교적 윤리주의의 모든 중심은 지극정성의 제례 정신에 쏠려 있고, 도덕적 복이란 그런 제례 정신 함양을 위해 정성을 들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전제로 한 복을 의미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도덕적 복’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제사의 초점인 ‘신과 인간의 만남과 감응’은 곧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고, 이는 인간의 수양적 노력에 있다. 수양을 통해 ‘내(인간)’가 하늘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수양을 한다는 이러한 학문의 목표는 제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현실 속에서 많은 재물과 복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신을 달래서 노여움과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인간이” 신과 교류하기 위한 종교적 요구에서 성립하는 것이 제사인 것이다.”

결국 저자의 말은 귀신을 기복의 대상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교류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현세기복적 복을 추구하는 무속적 사상과 다른 유교 식의 도덕적 복이란 주장이다.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주장에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한 마디로 귀신과 혼연일체가 되다시피, 귀신을 즐기고 귀신으로 충만한 상태가 아닌가?

이정배 교수는 이를 보본추원(報本追遠, 근본에 보답하며 선조를 추모함)을 중시하는 제사라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다시금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다.

이 교수는 그것도 모자라는지 “조선 패망 후 1세기도 더 지난 지금도 유교식의 조상 제사가 여전히 활발하게 드려지고 있다는 것은 조상 제사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며, 신학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라는데 도대체 필자는 글쓴이가 어떤 의미에서 신학적 이슈를 거론하는건지 의아하다.

필자는 이 교수가 가족중심주의나 성실한 실천적 삶의 태도를 마치 유교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을 볼 때, 과연 그가 기독교적 가치에 대한 일말의 이해라도 있는지 실로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 교수는 유교의 제사를 단지 기독교식 추도예배(예식)로 치환하는 것은, 본질은 외면한 채 형식만 바꾼 꼴이라며, 유교적 제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라는 뜬금없고 부조리한 코멘트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무속보다 유교적 귀신이 어떤 면에선 더 체계적으로 골수 깊이 자리잡은 귀신인 것이다.

◈인터뷰 내용 진단

“조상신에게 절한 것은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이다. 저도 예배 안에 포함해서 절을 하고 있지만, 그 절은 조상신 숭배와는 다르다”며 조상에 대한 예의를 표하면서 예배 의식 속에 제사를 드리고 절도 하고 기도도 하고 하나님께 조상과 더불어 기도하는 일들을 하는 것… 숭배로 몰아가는 것은 이 보수 기독교의 하나의 이념일 뿐, 우상숭배가 아니다. 유교인들 중에서는 우상숭배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보편적 정서는 보편적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고, 보편적 문화는 과거의 정책에서 자리잡게 된다.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는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 하에서 조상 제사를 민간에 널리 장려하면서 자리잡은 제례 문화에 기인한 것이다.

조상신 숭배와 조상신에 대한 예의적 차원에서의 절이 다르다고 하지만, 유교의 ‘예’라는 것의 근본은 지극정성의 ‘제례정신’이고 이것은 ‘귀신과의 교감’이다.

한국 전통적 제사의 뿌리가 고대 중국 상나라의 토착신 숭배 대신 고안한 조상신 숭배 제도에 있으며 조상신을 숭배하면 복을 받고 제사를 끊으면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제사의 역사와 핵심정신을 볼 때 아무리 오늘날 혹자가 제사와 연관된 조상신 숭배 사상을 민족정서니 예의니 하면서 희석하며 말바꾸기를 하려 해도, 분명 제사엔 귀신의 영과의 교류인 조상신 숭배 사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실례로 성경을 충실히 읽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영적 분별력이 생기면, 제사나 조상신 등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하셨다(창 12장).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영’을 떠나 오로지 ‘성령’ 하나님의 영과 교제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전진하고 헌신하는 자들이다.

제사나 명절문화는 앞으로 몇 세대를 거쳐 내려가면서 모습을 감추고, 결국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세세토록 살아있는 영원 불변의 진리이다(벧전 1:24-25).

“조상신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해선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하고, 그 아버지 어머니가 있으려면 또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그 2-3천만 명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는 것”이라며 “오늘의 나를 있게 했던 육체적 근본이고 더 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라고 답했다. … 또 “조상신을 숭배한다기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육체의 존재 근거가 조상이기 때문에 예를 표하는 것이기에… 절이라는 것은 ‘나를 줄인다, 작게 만든다’. … 이는 자기의 근본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추구”라고 주장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했던 육체적 근본이고 더 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라는 이 박사의 말은 너무도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근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출 3:6)? 또 주님께서 이를 다시 거론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부언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마 22:32)?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종족과 가문별로 자신의 부친과 조부와 증조부의 이름을 들어 개개인 이름들의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하였을까?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하셨을까?

이 모든 사례는 기독교인들이 우선순위로 관심을 두고 준해서 살아가는 지침적 가치의 주체는, 조상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이며 경배 대상 또한 하나님 한 분이시다는 함의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2-3천만 명의 조상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지탱해 주셨던 분은 하나님이시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오늘의 나의 존재는 2-3천만 명의 육체적 계보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 크리스천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라고 성경은 밝히 말씀하신다(요 1:12-13).

우리가 믿음의 부모와 조부모와 증조부모를 두었다 하더라도, 김아무개의 부모와 조부모와 증조부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성경에 따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그렇게 밝히셨고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요(출 3:5, 마 22:32),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전 인류적 구속의 언약을 기억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속죄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드리신 한번의 제사로써 영원하고 온전한 마침이 되었기에, 크리스천에게는 더 이상 어떤 제사도 필요치 않다(히 10:12-14). 요컨대 우리 근본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추구 대상은 조상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한 분이시다.

“권력을 탐한 무속인들을 질타한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런 측면도 있다”면서도 “본질로부터 벗어난 무속이 권력의 도구와 시녀가 되고, 나아가 권력을 탐하는 비본질적인 면을 질타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한 기독교 보수권 대형교회 목사들의 작태”라고 했다.”

참 선뜻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역사적으로 무속이 권력과 결탁했을 때는 고조선 시기를 제외하곤 특히 조선 시대 이후로 줄곧 박해를 받아온 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종합하여 영세교를 만들었다는 사이비 교주인 최태민의 후계자인 최순실 씨를 염두에 둔 질타인가?

이재명 조상 절
▲이재명 후보가 지난 12월 10일 경주 이씨 시조 발상지에서 조상에게 절하는 모습. ⓒ유튜브 온마이크 캡처

또 본질로부터 벗어난 무속이라며 무속의 본질성 회복을 촉구하는 듯한 주장은 무속학자라면 몰라도, 신학자와 목사로서의 정체성에 부합되지 않는 발언이라 생각된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이 기독교 보수권 대형목사들”이란 주장은, 대권 후보를 위한 목사들의 안수기도를 염두에 둔 발언 같다.

사실 필자는 예배 후 목회자들이 후보를 위한 축사기도를 하는 것인지 회심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는 것인지 여부를 알 수 없으나, 다만 불신자 후보에 대해선 영접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신자라도 절이나 사당에 들어가는 것과 교회에 들어가는 것은 느낌이 다를 것이다. 절보단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에 자주 들어와서 말씀을 듣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주님께로 인도받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세인들의 눈엔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이 표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각 종교의 문턱을 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만일 당사자 속에 깊은 영적 갈구가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신다면, 처음 설교를 듣는 중이라도 부지불식간에 성령께서 그의 영혼을 매만지실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후보가 예배에 참석한 후엔 목회자가 후보에게 개인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마련해,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권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들의 꿈에까지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전격 회심케 하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바른 신앙’이라는 포장 아래 불신자로 여겨지는 정치인에게 안수한 목사들을 비난하면서 그 정치인의 앞날을 저주하다 못해 영혼 없는 개에게 안수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었다.

그럼 예수님은 지구상에 숱한 영혼이 없는 개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일까? 불신자든 신자든 사람의 영혼은 주님이 보시기에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 성경의 문자에만 사로잡혀 뭇 영혼에 대한 연민이 없는 상태야말로, 그런 비유에 적합한 게 아닌지 실로 반문하고 싶다.

“무속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근본적으로 하늘 경험과 종교적 경험을 끊임없이 가져다 줬기 때문에 부정하진 않지만, 실행하는 사람들이 주술인이 되어 그걸 매개로 사람을 사사화하고 욕망화하고 정치적 술수로 만들어 사람들을 이리저리 꼼짝 못하게 만들고, 정치가들이 그 놀음에 따라 건물도 옮긴다는 식의 이야기가 명료한 대명천지에 음으로 양으로 오간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했다.”

무속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바울처럼 영적 연민을 가지고 전도를 위해 종교성이 많다고 격려한다면 몰라도, 무속 자체의 긍정적인 면을 수용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처지라면, 종교학자 아닌 적어도 신학자나 목사로서 대중에게 자신을 소개해선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하늘 경험과 종교적 경험을 끊임없이 가져다준 것을 무속의 공로로 인정하는 정도라면, 기독교 또한 능히 그런 선상에서 무속과 대등한 공로를 가진 것처럼 간주할 수 있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를 결코 유·불·도와 회통할 수 있는 고등종교 중 하나로 취급할 수 없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신앙이다.

또 주술인들이 후보 부부를 사사화하고 욕망화하고 정치적 술수로 사람을 옭아매고 조종한다는 주장은, 마치 그들이 무속인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인격을 폄훼하는 매우 무례하고 부적절한 발언이다. 만약 후보 부부가 접촉한 상대가 무속인이 아닌 다른 종교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심지어 무속인들은 자신들의 신으로부터 희생적으로 상대를 지키고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노라 주장하는 마당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상대를 성심껏 사랑으로 전도는 못할망정, 공격적으로 타인의 인격을 훼손해서야 되겠는가?

필자의 느낌엔 사람들 배후에 역사하는 무속적 영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유교적 영 사이의 세력다툼인 것만 같다. 그것도 기독교 이름의 허울을 쓰고서….

기독교인으로서 조상에 절하는 것과 신사참배와의 차이에 대해선 “신사참배야 일본의 권력 앞에서 우리가 한 것이지, 조상이 무슨 권력인가”라며 “질문이 옳지 않고, 정당한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 예의도 아니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는가”라고 질타했다.

이 박사는 “신사참배는 일본의 권력 앞에서 사람들이 강제로 굴종하는 것이고, 조상들 앞에서는 자발적으로 예를 표하는 것”이라며 “자발적으로 하는 건 괜찮다”고 했다.

이에 ‘자발적 신사참배’는 괜찮은지 묻자 “신사참배를 누가 자발적으로 했는가? 일본이 시키니까, 총칼 앞에서 했다. 몇몇 친일파 외에 누가 자발적으로 했겠는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가”라며 “일본에서는 자기네 권력이니 자발적으로 했겠지만, 그걸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교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항의했다.

이 박사의 위와 같은 동문서답은 기독교에 대한 몰이해에 연유한다. 질문자는 기독교인의 영적 분별에 대한 이슈를 제기한 것인데, 그는 외적 상황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 불행한 역사에서 신토 비종교론에 근거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전혀 어긋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교계 차원으로 신사참배 의결을 강제로 밀어붙였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이 박사의 말대로라면 “조상 제사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의식이므로, 우상숭배를 금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전혀 어긋날 것이 없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때는 차라리 강제적으로 굴종이 강요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더구나 누구나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인지감수성, 즉 영분별력이 없으면 축복기도나 새벽기도나 기도회도 무조건 무속적으로만 해석하게 된다.

물론 어떤 이들 중엔 영권이 있다면서도 인격적 갖춤 없이 위상이나 타이틀, 집단파워 등 세상적 가치에 편승해 조야하게 행동하는 경우도 더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 살아계신 주님 한 분만은 그런 세상적 걸림돌에 의해 함부로 여김을 받으셔서는 안 되는 분이심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너도 나도 영적 잠에서 깨어,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열왕기하 17:33-34)”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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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