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소리’ 들을 줄 알아야, ‘복된 소리’ 들을 수 있어
내가 말씀 읽는 것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을 때까지
설교는 해설 아닌 ‘해석’… 그 내용 기승전결 삼아야
본문 내용 설명만 하면, 오늘 우리의 삶과 관계 없어

왕대일
▲왕대일 교수는 “성경 본문을 그 시대의 말씀이 아닌, 오늘의 말씀으로 새기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설교의 들머리(도입)를 오늘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책에서 말했다. ⓒ이대웅 기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생기를 품은 그릇이라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다 해를 품은 달이 됩니다. 내 처지가 달이라고 푸념하지 마세요. 내가 해를 품은 달이라면, 세상은 나를 통해서 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나를 통해서 해를 느끼게 해야 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기가 온 누리에 퍼져가게 해야 합니다.” (창세기 설교 중)

“희망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소망은 땅에서 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세상의 혼란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재단하지 말고, 하늘 아버지의 섭리로 세상의 어지러움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진정 보게 하는 힘입니다. 그 힘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신앙입니다.” (요한계시록 설교 중)

왕대일 목사는 전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인문학적 콘텐츠로 설교를 시작하고, 우리말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대패질을 하기에 앞서 대팻날을 갈아야 합니다(여호수아)’, ‘삶은 고단하면서도 고상하고 고귀합니다(마태복음)’ 등 동사형 설교 제목도 인상적이다. 신학대 교수 출신으로서 목회하는 이야기와 성경 읽기 등에 대해 더 들어봤다.

설교로 풀어쓴 성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왕대일 | 대한기독교서회 | 568쪽 | 29,000원

-(전편에서 계속) 반대로 신학자로서 교회 현장을 경험하셨을 때 교회나 성도가 고쳤으면 하는 점이 있나요.

“신학교 사역 중, 10년간 교수 4인이 공동 사역하는 교회 대표를 맡아 헌신했던 적이 있습니다. 감신대, 장신대, 서울신대, 한신대 교수 4인이 함께하는 서울 가락동 새바람 커뮤니티 교회를 9년 6개월 간 대표했습니다. 10년 동안 성도들과 호흡한 바 있기에, 신학교 강단을 떠나 설교 강단에 서는 일이 낯설진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주일예배 중심이었고, 1주일 내내 모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교우들의 삶을 직접 보니, 이론과 현실이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교인들이 많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있음을 신학교 교수들은 잘 모릅니다. 이는 목회자들만이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를 느낄 수 있어 한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교회에도 자영업자들이 있습니다. 힘들어하는 분도 계시지만, 오히려 더 경기가 좋은 분들도 있습니다.

또 한국교회 성도들이 고령화되고 있는데, 시니어들의 가장 큰 아픔이 건강과 질병, 장례의 문제입니다. 한편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결혼 문제도 있고요.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의 전체 라이프 사이클과 함께하는 경험은 처음이라 맞춰 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 2년 지나서 이전처럼 두렵진 않지만, 교우들의 정서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강단에서는 교인들의 생태계를 알 수 없었기에, 교인들의 삶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겪으면서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제가 더 성숙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읽는 것과, 인문학을 성경으로 읽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인문학을 배우고 익히는 시각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창조신앙이 신학적 지평선에 우뚝 서 있고,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에 대한 구속사 신앙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인문학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성경과 대화할 때, 구약 성경의 창조 신앙이 소통과 대화가 가능하고 서로 수용 가능한 매개체가 된다. 그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인다(로마서 1:20)’고 했고,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지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만물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 안에도 하나님의 솜씨가 감춰져 있다는 측면에서, 인문학을 하나님의 뜻과 솜씨를 드러내는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특수한 텍스트입니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분들은 인문학 속에 성경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박준서 박사님이 한국구약학회 회장 하실 때 총무로 도우면서 한국연구재단의 학제간 편제 조정 과정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대·중·소 카테고리에서 ‘중’ 그룹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불교학은 별도로 있었는데, 기독교 신학은 인문학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일반 학계에서는 신학을 인문학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신학이라는 분야 속에 인문학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인문학으로 불리는 소위 문·사·철(문학·역사·철학)뿐 아니라 예술도 중시합니다. 렘브란트와 반 고흐도 많이 읽고, 책에서도 거론했습니다. 고흐는 신학 훈련도 받은 사람 아닙니까.

로마서 1장 말씀처럼, 문·사·철과 음악, 미술, 무용 예술 안에 하나님의 심성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접근하면, 설교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인문학을 읽고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요.

왕대일
▲목회자로 사역중인 왕대일 교수는 “그리스도인의 생존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것에서 이뤄진다”며 “그래서 저는 늘 성경 본문을 해석 대상으로 삼기 전에, 먼저 성경 말씀을 받아먹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제가 먹은 양식을 회중과 나누는 시간이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책에서 말했다. ⓒ이대웅 기자
-책에서 ‘길(way)’이 자주 등장합니다.

“30년간 강의하면서, 성경 해석학의 세계를 경학(經學)이라는 말로 바꿔 정의했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차원에서, 해석학의 지평을 재정의해 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읽은 책들이 다산 정약용과 다석 유영모인데, 거기서 배운 것이 ‘길’이라는 은유입니다.

책에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시작된다’고 썼습니다. 도로로서의 길(road, 路)이 끝나는 곳에서 말씀으로서의 길(way, 道)가 시작된다. 말씀에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세상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구원의 길, 성도의 길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려면 길이 끝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하나의 ‘화두’로 쓰고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도 ‘모든 벽은 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시작되려면, 벽의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이 했던 표준 설교 43편이 있는데, 오늘날 웨슬리 학자들은 이를 ‘하늘 가는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길에 대한 은유가 전반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삶이 길을 걸어가는 것인데, 그 길은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야 하는 차원에서 ‘신앙적 도전’입니다. 이렇듯 ‘길’을 화두로 많이 풀어 보았습니다.”

-목회자들이 잘 설교하지 않는 본문이 있다면, 그만큼 읽기 어렵기 때문일텐데요.

“신약은 모든 분들이 설교하고 계시고, 글말 자체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생경한 말이 많고, 복음의 차원에서 보면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약이 복음(福音)이라면, 구약은 정음(正音)이다.’ 정음, 바른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복음, 복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복된 소리 속에 바른 소리가 있고, 바른 소리가 이어지면 복된 소리가 됩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자, 가르치자, 설교하자’고 합니다.

레위기를 비롯해 신명기도 12-26장이 법전이고,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과 열두 소선지서, 욥기나 잠언 등은 많이 외면당하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를 읽고 배울 때, 교우들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어갈 때까지 말씀의 세계에 신실하자’.

그런 준비만 돼 있으면, 어려운 본문이나 쓴소리도 새김질하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내용이 충분합니다. 바른 소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리까지 이어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본문들은 우리 삶에 적용이 힘들어서 잘 읽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때와 오늘날은 문화가 다르고 시공간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적·복음적’이라는 이름으로 본문 내용을 되풀이하는 설교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설이지, 해석은 아닙니다.

설교는 해석의 결과를 내용의 기승전결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 내용을 설명만 하면, 오늘 우리의 삶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문화과 풍속, 세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깨달음과 바른 소리, 복된 소리가 됐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그 문화와 풍속과 그들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말과 경험으로 바꿔서 전달하려 노력한다면, 구약의 말씀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희생제사 제물로 동물을 드립니다. 그래서 18세기부터 레위기는 원시 종교와 율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퍼링(offering)이라는 ‘드림’의 의미를 넣어, ‘드림이 있어야 꿈(dream, 드림)을 꿀 수 있습니다’로 바꿔줄 수도 있습니다.

설교로 풀어쓴 성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렇게 고운 우리말의 두운과 각운 등을 많이 활용하면서 본문의 세계를 두드리고 깨우치고 말씀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드림(offering)’의 내용이고, 하나님의 드림(dream)이 ‘내가 너희 속에 들어가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드림(offering)이 드림(dream)을 이룬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문화와 풍속에 갇힌 본문의 말과 글이, 오늘 우리들의 글과 말로 충분히 새김질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설교자들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강단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한자도 많이 활용합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말 중 70%는 한자 표기가 가능해서, 설교 중 한자를 많이 풀어줍니다. 예를 들면 미가 말씀에서 ‘속량’이 나왔는데, 현실에서 안 쓰입니다. 바칠 속(贖)에 좋을 량(良)으로 된 속량은 조선 시대 용어로, 상민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재물을 드려 양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풀이해 줍니다.

두운은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자’, ‘감사하고 감격하고 감동하자’ 등으로 활용합니다. 기대와 기도는 다 한자말이지요. 이런 식으로 우리 말의 넓이와 깊이를 많이 전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목회 계획이 궁금합니다.

“2019년 말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2020년 초 코로나가 시작됐습니다. 코로나가 걷히고 나면 한국교회 전반적 생태계가 어떻게 달라질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간 성도들이 비대면 예배에 익숙해졌습니다. 비대면 예배가 현재 대면 예배와 함께 드려지는데, 비대면에 익숙해진 젊은 교인들이 코로나 후 얼마나 회복될까 하는 궁금증도 있습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국교회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인구 감소는 국가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신학대에 있을 때 피부로 느꼈습니다. 고3 입시생이 6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감소했고, 곧 30만대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재편성되어야 할까요.

또 하나는 1970-1980년대 한국교회 부흥기에 원색적인 복음이 선포됐습니다. 그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받은 사람들이 지금 50대 이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반면 다음 세대는 ‘다른 세대’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어떻게 나눠주고 전해주고 품게 할 수 있을까요. 보다 거시적으로 의논하고 가슴앓이하면서, 개교회 차원에서부터 쏟아붓는 일들이 시작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