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래 목사(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성경에는 악인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며, 특히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북이스라엘(B.C. 922년) 여로보암 왕부터 시작해 호세아 왕까지 총 19명의 왕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B.C. 722년에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멸망)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백성들은 왕들을 잘못 만나 모두가 멸망당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한 목회자로서 마음이 참담합니다.

지난 토요일 날 아내와 점심을 위해 식사를 주문하고 잠시 기다렸습니다. 옆자리에 3명의 여성분이 음식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분이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교회를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욕하는 모습들이 싫습니다. 말은 사랑 이야기들을 하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앉으면 사랑하기는커녕 남을 미워하고, 파벌도 심하고, 당사자가 없는 가운데 허물을 들춰서 이야기하는데도 그 누구 하나 그런 말을 제재하지 않고 똑같이 동참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하나도 배울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위선자처럼 보여서 이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세 분 다 나이가 많은 권사님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날 때 마음이 참담합니다.

오랫동안 친분 있는 권사님께서 필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교회에서 30년 이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동안 원로목사님과 후임 목사님의 분쟁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를 많이 떠났습니다. 강단에서 수십 년 동안 사랑과 용서, 화목을 설교한 목사님들의 행동을 보면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그런 정도의 일로 그렇게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권사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제가 봐도 교회는 장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젊은이들은 없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뿐이며, 앞으로 10년 20년 뒤쯤이면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주간 동안 이런저런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참담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서 울고 또 울어야 할까? 교단과 교회마다 미래를 걱정하고 개혁을 말합니다. 각 기독교방송국에서도 한국교회의 내일을 걱정합니다. 그런 캠페인과 부르짖음이 먼저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신앙인들의 본질을 바꿔야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의 개혁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지도자들의 삶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교회와 교인들은 더이상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지도자들이 먼저 행함으로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교인들과 후배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기독교는 행함의 종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은 분명히 행함을 수반하고, 그 믿음을 통해 교회와 신앙이 든든히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개역 약 2:22)” 교회 부흥과 전도도 총동원 주일과 전도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고 말씀합니다.

결론

지난 주간은 해외(스리랑카) 목회자 세미나(영상)가 있었습니다. 제2기 목회자대학원생들을 모집하는 오리엔테이션 세미나였습니다. 4박 5일 동안 “설교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참석한 모든 목회자와 사모님들이 간증하셨습니다. “그동안 목회를 잘못했습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그 정의조차도 모르고 목회를 했습니다. 돌아가서 교인들에게 정식으로 회개를 하겠습니다.” 눈물로 간증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강연과 설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훈을 주는 좋은 강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강사들의 강연을 통해 감동도 주고, 많은 깨달음도 줍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설교는 인간의 잘못된 성품과 기질, 습관 등 본질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설교는 세상 강연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먼저 믿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특히 본인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세상 강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비롯해 제자들의 설교로 수많은(삼천 명, 오천 명) 사람들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이 기독교 역사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사건으로 믿고 순종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교회와 가정 사회에 본이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본이 되지 않는 지도자(목사)들의 설교를 누가 믿고 순종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3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북이스라엘의 왕들처럼 이 시대가 그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는 강단에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강연보다, 사람이 만든 명품설교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외치는 설교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기독교의 희망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은 말로 하는 설교에 이제는 더 속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내가 먼저 믿고, 실천한 설교만이 미래의 희망이며, 기독교의 희망입니다. 이 문제를 붙들고 교회는 베옷을 입고 울고 또 울어야 합니다.

국제국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