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기오염 환경오염 파괴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중국의 뿌연 하늘. ⓒKBS 캡처
성도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관계의 지평이 확장되면서, 주어지는 역할과 책임도 점점 커져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설교에 대한 책임감,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 개인적 종말 너머의 세계와의 다층적 사색과 기도가 간절해진다.

삶을 경험할수록, 신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들을 접하고 공부할수록, 그리고 세상과 현상들을 관찰할수록 이 우주는 광대하고 다차원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과 여기는 한 부분에 속하지만, 동시에 전 우주적으로는 다양한 차원들의 현실과 사건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고,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경계들이 붕괴되고 있으니, 경제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권력을 가진 자들은 훨씬 더 손쉽게 자신들의 설계를 현실의 세계에 적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기독교인이면서 목사이다. 그래서 나의 관계망들은 비기독교인들보다 기독교인들을 상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다.

그럼에도 재미난 사실들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세계관이 별로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세계관이 바로 ‘유물론적 세계관’이다.

철학이나 신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기독교인을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에 발끈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말은 반유물론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우선함을 과연 부정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한발 더 나아가, 유물론에 발끈하는 자들은 기독교도, 유물론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다. 맑스가 지적했듯이 유물론의 핵심은 세계의 구성 인자가 관념이나 물질이냐 같은 사변적 논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세계와 어떻게 대면하고 이해하며 구성할 것이냐에 대한 실천적 질문과 해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성경인 창세기도 하나님이 우주에 천체들과 지구와 그 모든 물질들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인간도 흙으로 빚으셔서 창조하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의 존재적 현실은 유물론적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물질이란 정신의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레닌의 말은 20세기 사회주의체계의 근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본주의 또한 이 뿌리 위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지금은 증강현실, 인공지능,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 세계의 현실화로서 물질과 정신의 세계가 점점 융합되고 있는 시점에 살아가고 있다.)

필자가 지금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현재의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는 소리를 자주 듣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는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욕구가 제한받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행정기관과 관료들의 비현실적 탁상행정의 문제들과 제도들의 허점들도 분명히 있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식의 비판은 지도자들의 입에서는 신중하게 나와야 할 언어들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기초한 나라이다. 그러나 평화가 없고, 평등이 없는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자유민주주의일까?

과연 유물론을 배제한 관념론(영성주의)이 건강할까? 소위 유물론을 배제한 영성주의를 기독교에서는 ‘영지주의’라고 지칭하며, 이단적 사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동반된 자신의 정당한 주장이 중요한 시점인 것 같다.

특히 지도자들의 말은 그 무게와 영향력이 다르기에 섣부른 말과 선동의 책임은 하늘나라에서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강도헌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초장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