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방국제학교 학생들은 반기독교적 문학 작품에서도 ‘기독교적 메시지’를 찾아내 적용을 시도합니다. 학생들의 글쓰기 실력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독서감상문’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학생 소개에서 ‘가지’는 12-15개로 구성된 셀그룹을, ‘나무’는 여러 ‘가지’들을 모은 대그룹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편집자 주

데미안 갈매기 바다 조류 날다 파란 하늘 새
▲ⓒ픽사베이
1. 중남미 나무, 콜롬비아 가지 9학년 김OO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 나는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만방인의 정직 근면
예수님의 사랑 겸손
하나님의 지혜 지식

대상을 뚫어버릴 듯한 집중력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하는 주의력
계획을 반드시 이루는 성취력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분별력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무게감 있는 행실
당당한 걸음걸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자신감

꿋꿋한 의지가 서린 표정
영웅의 기개를 가진 눈빛
선한 말을 하는 입술
남의 말을 경청하는 귀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마음
원수까지도 포용하는 넓은 가슴
남을 적극적으로 돕는 손
악으로부터 멀리하는 발
비전을 새기는 근육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신에게 이르는 길
나는 나의 이상의 모습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알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파괴해야 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나’라는 존재의 파괴는
‘나’라는 존재의 죽음이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터이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할 터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분께서 내 안에 사실 때 나는 나의 이상의 모습에 도달할 것이다

데미안
2. 아시아 나무, 동남아시아 가지 김OO(10학년)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려는 것을 찾기 위해 계속 분투합니다. 이 책은 제게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내적 성장을 하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에밀이 반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부모님은 청소년기의 헤세를 성직자로 키우려고 했으나 헤세는 정신병 증세를 보이며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당시 본인의 마음과 이야기를 <데미안>에 담았는데, 이 때문에 주인공의 사상은 헤르만 헤세의 사상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별력 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구절은 데미안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다시 말해, 작가의 가치관이 가장 깊게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문장을 썼을까요?. 저는 저 문장에 “종교, 규칙에 매여 있지 말고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는 다음 문장이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압락사스’는 선악을 다 다스리는 신을 뜻하는데, 아마 작가는 주인공이 선악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구대로 사는 삶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즉 헤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은 없으며, 대신 자기 내면의 세계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문장은 왜 틀렸을까요? 저는 그 해답을 ‘기독교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교회에 나오는 것, 십일조를 내는 것처럼 남들에게 본인의 신앙을 과시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현대의 기독교가 흔들리고 있다고 했었습니다. 이는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 큰 소리로 기도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외우고, 이방인을 멀리하고 핍박하던 바리새인들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악한 내면을 꾸짖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책의 초반에 주인공이 기독교를 ‘기도와 찬양을 하고 규칙을 지키는 종교’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을 때, 헤르만 헤세가 기독교를 저 바리새인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인데 말입니다.

만약 작가가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 행동의 본질에 두었더라면, 기독교를 ‘나로서의 삶을 사는 데 있는 장애물’이라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헤르만 헤세의 저 문장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살짝 추가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우선 저의 해석을 말하자면, 알은 세상의 규칙과 세상의 것들, 예를 들어 돈과 명예 등 여러 가지 사람이 만든 가치들을 뜻하고, 그것을 깬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서 정한 ‘성공'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알을 깨고 ‘나'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그 알을 깨고 나온 사람들 중에서도 삶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유롭게 또 가치 있게 살까요? 또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신념의 가치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 역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높은 가치의 삶이란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삶, 즉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만이 ‘나’로서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정말 확실하게 하늘의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나안에 가야 했지만 하란에 미련이 남았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는 싶지만 동시에 세상의 것에 미련이 남는다면, 멀리 날지 못하고 빵 부스러기 같은 사람들이 흘린 음식이나 먹는 살찐 비둘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오직 하늘의 것만을 바라보는 정말 높은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도 꼭 세상의 것을 벗어던지고, 하늘의 것에만 마음을 두어서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멋진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3. 중남미 나무, 콜롬비아 가지 공OO(9학년)

데미안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나만의 ‘데미안’을 말하려 한다.

‘두 세계’에서 저자는 유년 시절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로 나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모두에게 선의 기준이란 다르다. 종교, 사상, 문화 등에 의하여 이 모든 선의 기준은 달라진다. 즉 나에게는 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선의 기준에 따라 남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이 정해놓은 법 또한 누군가에게는 공평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고, 억울하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 있을 수 없을까? 나에겐 이 질문들이 어렵게 다가왔다.

나에게 찾아온 대답은 이러하다. 어느 나라나 모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은 한 명도 없으며, 모두가 만족할 의견이 나오지도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자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의 증거이다. 우리의 생각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고 아무리 누군가 주의 은혜를 입어 완벽히 선한 말과 행동들을 하여도, 누군가의 눈에 있는 악의 면이 선을 악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선, 즉 크리스천의 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이가 깊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작은 깊이가 그들 가슴에 박힌다. 작은 파편은 모이고 모여 그에게 깊은 파편이 되어 그의 마음을 찢고 눈물을 나오게 하고 씻긴 눈으로 선을 보고, 그들도 그 선을 이루려 할 것이다. 그렇게 선이 전염되어 어느 법이든 공평해질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에서 저자는 ‘알은 세계다’라고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저자는 새가 알을 깨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알랍사스에게 간다고 표현한다.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 예수님께로 날아간다.

누구든지 각자의 알이 있고 밖에는 각자의 신념이 있다. 나에게 알은 무엇일까? 먼저 책 속 싱클레어의 알은 무엇이었을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고 삶이 점점 변해간다. 그는 점점 데미안 같이 변해간다. 결국 싱클레어는 데미안 그 자체가 되고, 데미안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란 것을 알게 된다.

싱클레어의 알, 그것은 데미안 그 자체였다. 데미안이란 알에 있을 땐, 데미안에 의해 움직여지고, 생각하고, 성취해 간다. 데미안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데미안을 부수자 그에게서 벗어나 그가 되기로 그는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알, 그것은 성공이었다. 성공이라는 알 안에는 두려움, 열등감, 좌절, 우울함 밖에 없었다. 나는 싱클레어가 데미안에 의해 움직여졌듯이 성공에 내 눈과 발을 향하게 하였다.

나의 두 세계 중 악이 컸고 말씀, 모두의 선한 행동에 의해 작은 파편이 쌓이고 쌓여 내 마음을 찢어 고백하게 만들었다. ‘주여 이제는 내 눈을 돌리시어 성공에서 주의 뜻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의 은혜 입어 완고해 보였던 나의 뜻에 허물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부수어 조각되어 사라졌다.

‘나 자신으로 이르는 길’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알랍사스에 의해 점점 자신의 본질과 가까워진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에게 다가갔다. 그는 알랍사스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였고 결과는 데미안이였다.

데미안 새 알 둥지 깨진 깃털 조류
▲ⓒ픽사베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란 알을 깼지만 알랍사스는 깨뜨리지 못했다. 그럼 진정한 ‘나’는 무엇일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같다. 하지만 각자의 사명은 다르고 그에 맞는 달란트도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다가, 자신을 잃어버린다. 내가 지금 각자 자신의 모습을 정의할 수 없다. 단 한 가지를 말해주고 싶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지속시켜라, 지금에 열중하여라, 그러면 너를 향한 주의 뜻이 보일 것이다.’

나도 나의 사명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의 본질, 주가 주신 뜻을 향해 달란트라는 램프로 길을 비추고 있다. 학업에 감사하며 충실함으로 한 발씩 더 나아가야 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순종하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많은 것을 생각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축복받을 사람이 될 차례다. 실천하며 이루어가자. 어려울 것이고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한 번만 눈 한번 감고 부수어 깨뜨려 보자. 그 기억이 나에게 믿음과 용기를 줄 것이다.

4. 아시아 나무, 중앙아시아 가지 임OO(10학년)

2021년 신년 목표로 매달 책 5권 읽기를 결심했다. 결심한 것처럼 잘 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16권 정도를 읽었다. 고전, 문학, 비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가운데 만난 책이 바로 ‘데미안’이다.

데미안하면 제일 유명한 구절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브락사스다”이지만, 내가 제일 사색에 빠졌던 구절은 바로 “인간의 생애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지향한 바에 도달하기 위한 길,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인 것이다”였다.

자기 자신의 길에 도달하는 여정 중에 있는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 데미안, 그리고 나에 대해 분석해 내는 것이 이 독후감의 목표이다. 분석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인생을 다룬 ‘데미안’이라는 책에 대해 나누고 싶다.

에밀 싱클레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왔지만 내면의 두 세계, 즉 기독교의 밝은 세계와 세상의 타락함을 품은 어두운 세계 가운데에서 방황하다 결국 기독교를 포기하고 새로운 신 아브락사스, 하나님의 선함과 사탄들의 악함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

데미안은 방황하던 싱클레어에게 큰 영향을 미친 친구였는데, 그가 싱클레어가 아브락사스라는 신을 믿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대화를 읽으면서 주의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은, 아무래도 반기독교적인 내용들이 행여 내 신앙의 토대를 흔들지는 않을까라고 걱정해서였는데 다행히 더 깊어지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싱클레어가 다다르고 싶었던 자기 자신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을 버리고 가족들과 떨어지면서까지도, 그는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정답의 하나님을 믿지만 또한 세상의 오답을 포기하지 못한 싱클레어는, 자신의 이중성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가 바로 데미안, 아브락사스를 믿게 한 친구이자, 싱클레어의 자신의 모습에 제일 가까운 존재이다.

그는 늘 고독함을 느꼈다. 내가 평가할 때, 싱클레어의 자신은 제일 저차원적인 것에 속한다. 설령 데미안과 그가 사랑하는 에바 부인과 지낼 때 조차, 고독함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싱클레어의 인생은 허무하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요즘 세상에는 싱클레어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많다. 흔히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들 부르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한 그들이 정말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런 사람들이 데미안을 읽으며 삶을 점검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데미안, 싱클레어의 정신적 지주의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없다. 그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신 아브라삭스에 대한 강한 확신이 전부이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찾음으로써 신념을 굳혀나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틀림없는 허점이 존재한다.

책을 보면 그는 하나님은 가장 자연적인 것이 이루어질 때 눈을 감거나 얼굴을 돌리지 않는 신을 만들어야 한다며, 하나님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지켜보신다. 욥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데도 고난받아 온몸이 문둥병의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함께 하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과도 함께 하셨으며, 고통을 나누셨을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내려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편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고난을 또 다른 기회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고난 가운데서도 고난이 끝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에도 늘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을 알고 또 느끼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색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좁은 시야와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편견으로 인해 잘못된 신 아브라삭스를 탄생시킴으로 그의 발전은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아직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나에 대한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도 있지만, 가장 정확하게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그렇다면, 남이 발견한 내 모습, 즉 나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느낀 사람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자의 인용구는 반 정도는 맞지만, 정확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전제 조건 속에서 바라보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나를 향해 말씀하실 수 있다. 내 가치관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을 다른 가치관을 가진 친구나 주변 사람들은 느낄 수 있는 게 있다고도 생각한다.

현재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자기 자신이란 단어는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어쩔 때는 내가 원하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가도, 내 욕심인가 싶어 조심스러워짐을 반복한다. 이번 JD 때 특히나 더 많이 신경썼는데,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네가 원하는 것이든지 네가 잘하는 것이든지 또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지 나는 모든 길을 예비해 두었단다. 강하고 또 담대하라’라고 이야기하셨다.

크리스천이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내 주체 되신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체되신 주님을 믿는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데미안이라는 책은 1919년에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신들이 자기를 믿으라며 아우성치는 현재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책인 것 같다.

사람들이 사는건 다 비슷비슷하다. 고독감에 몸부림치고,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다시 회개함을 반복한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에밀 싱클레어처럼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찾아가야 할 자기 자신은 주변 사람들을 함께 복음의 길로 인도해나가는 데 있다. 그렇기에 크리스천들이 나와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낼 수도 있지만, 혼란스러운 사회를 보여주는 데미안이라는 책을 보면서 다시금 기독교 크리스천의 토대를 점검하는 공통된 목표를 이뤄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