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사랑하는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부교역자로 청년 사역을 하고 있는 노재원 목사의 글을 연재한다. 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Div), 연세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졸업(석사)했으며, 현재 ‘알기 쉬운 성경 이야기’, ‘기독교의 기본 진리’, ‘영화를 통해 읽는 성경 이야기’, ‘대중문화를 통해 읽는 성경 이야기’ 등을 유튜브를 통해 연재하고 있다.

규빗으로 지은 집
노재원 목사의 <성경으로 공간 읽기> #14

노재원 목사 제공
ⓒ노재원 목사 제공
1미터(meter). ‘빛이 진공 중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이동한 길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합니다. 미터는 전 세계에서 똑같이 사용되는 단위입니다. 물론 미국은 미터보다는 인치(inch), 피트(feet), 야드(yard), 마일(mile)을 주로 쓰고 있죠. 미터라는 단위를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 간에 정확한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대 혼란이 일어나겠죠. 그런데 미터란 다분히 추상적인 척도입니다. 빛이 진공 중에서 2억 9천9백7십9만 2천4백5십8분의 1초 동안 이동한 길이라니, 피부에 와 닿지는 않죠.

이에 반해 인체와 관련된 단위는 친밀하고 직관적입니다. ‘야드’는 가슴 한가운데부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1야드는 91.44㎝입니다. ‘피트’는 말 그대로 사람 발 길이에서 비롯된 단위로 1피트는 30.48㎝이며, ‘인치’는 엄지손가락 길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2.54㎝입니다. ‘허리둘레가 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인치로 대답합니다. 고대 중국도 인체를 기준으로 단위를 정했습니다. ‘한 치’, ‘한 자’ 이런 단위도 사람의 손과 팔을 기준으로 하는데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퍽 익숙합니다. ‘한 마지기’는 논이나 밭의 넓이를 가리키는 단위로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뜻합니다. 서양의 에이커(acre)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1272~1307) 때 정해졌는데요. 마찬가지로 농부 한 명이 하루에 갈 수 있는 땅의 크기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친화적인 치수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용되어 왔습니다. 다소 주관적인 것 같지만 친숙할뿐더러, 가늠하기도 쉽기 때문이죠.

인체의 크기를 기준으로 길이를 정하려는 시도는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에 이르러 빛을 발합니다. 그는 서 있는 사람의 키를 183㎝로 잡고 여기에 자신이 고안한 황금비율을 적용해서 ‘모뒬로르’(Modulor)라는 새로운 치수체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인간의 크기에 비례하는 치수체계를 만들어 내서 이것을 건축이나 기계의 크기를 정하는 단위로 삼고자 한 것이죠. 그는 실제로 자신이 설계한 건물들의 치수를 이 모뒬로르를 토대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까지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지요.

서양에서 가장 유서 깊은 단위는 ‘규빗’(cubit)인데요. 규빗 또한 인체의 길이에서 비롯된 단위입니다. 규빗은 성인 남자의 가운뎃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하는데요. 1규빗은 약 50㎝지요. 규빗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위인데요. 그 유명한 노아의 방주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법궤, 구약시대 장막, 솔로몬이 지은 성전, 그 밖에 여러 건물과 기물들이 모두 규빗이라는 단위로 그 길이와 너비, 높이가 규정되었습니다.

어떤가요? 이 규빗이라는 단위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소 부정확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당시 건물이나 물건들은 오차 없이 튼튼하고 견실하게 만들어졌을 겁니다. 방주가 비가 새었을 리 없고, 솔로몬 성전의 기둥과 보가 아귀가 안 맞았을 리도 없죠. 다소 주관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인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치수는 지금까지도 굳건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편, 대한민국 『계량에 관한 법률』은 계량의 기준을 정하여 계량을 적정하게 함으로써 공정한 상거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정단위를 규정하고 있는데요. ‘길이의 측정단위는 미터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미터법을 사용하는 오늘날 우리의 건축물들이 그 옛날 규빗이나 척을 사용했던 건축물보다 더 정교하고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건축이나 기계에서 도면은 미터도 아닌, 밀리미터 단위로 표기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부실 건축물, 부정확한 기계들 틈에 둘러싸여 있지요.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가 지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될 정도의 걸작인데요. 미터법에 기초한 도면이 없이도, 너무나 훌륭하고 정교하게 지어졌습니다.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잠언 11:1, 새번역).
“너희는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에바와 정확한 밧을 써라” (에스겔 45:1, 새번역).

정확한 도량형을 사용할 것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건 길이를 미터 단위로 하느냐, 규빗 단위로 하느냐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