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도 대중가요에 시편 말씀 가사 붙여 부르게 해
성 프랜시스도 유행하던 노래 속 복음 입혀 전달해
김덕현 교수 “현대사회와 소통 위한 설교학적 가치”

새에덴교회 보랏빛사랑 초청주일
▲소강석 목사가 지난 2020년 ‘보랏빛사랑 초청주일’에서 양각나팔을 불고 있다. 이 ‘보랏빛사랑 초청주일’도 가수 임영웅 씨가 미스터트롯에서 불러 화제가 된 가수 설운도 씨의 ‘보랏빛 엽서’를 모티브 삼아, 코로나19로 출석하지 못한 성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크투 DB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자신의 소위 ‘광대적 설교’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소개했다. 그는 설교 도중,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 멜로디에 기독교적 가사를 얹어 부르며 성도들의 이해를 돕는 방법을 즐겨 사용한다고 한다.

소 목사는 21일 SNS를 통해 “제가 설교시 이따금씩 대중가요를 개사하거나 적절할 때 한 소절을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당연히 오해할 만도 하다. 제 설교가 모델이 되고 표준이 될 수도 없고, 강단이 세속화돼도 안 되기 때문”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이것만은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칼빈도 쥬네브 찬송을 만들 때,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민요나 대중가요에 시편 말씀을 가사로 붙여 부르도록 했다는 사실을”이라며 “성 프랜시스도 거리와 시장, 광장에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할 때 평민들에게 익숙한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혀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고 함께 노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학자 바빙크 역시 설교를 하나의 연극 행동이라고 가르쳤다”며 “사실 ‘광대적 설교’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조심해야 할 부분도 많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그런데 칼빈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하시는 김덕현 교수님께서 제게 위로와 변호가 담긴 글을 보내오셨다. 좀 어렵고 길지만 전문을 소개한다”고 밝혔다.

김덕현 교수의 글을 요약하면, 신학교에서 공부한 설교학의 기준들로 소 목사의 설교를 비판할 수 있으나, 현장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소 목사의 설교는 그 설교적 페르소나가 풍성하고 다양함을 추구하며, 역사적 배경을 가지면서도 현대 사회와 소통 가능한 설교학적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또 소 목사의 설교가 ‘강해 설교’가 아니라는 주장은 칼빈의 성경 해석을 너무 좁게 이해한 것이며,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어 사건이 실행하는 강해적(講解的) 설교란 그 말씀이 가진 운동력의 궤적을 가지고, 설교자가 강해적 행위를 준비하는 과정 동안 설교자를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전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조엘 비키 역시 그의 역작 <설교에 관하여>를 통해, 성경 강해 과정에서 성령을 경험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설교자가 마음에 담긴 내용을 논리와 명제의 옷을 입은 글로 진술한다면 그것은 아직 주석 작업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는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유재석의 부캐릭터 유산슬의 트로트곡 ‘사랑의 재개발’ 중)’를 예로 들면서 “원곡은 사랑 노래이지만. 본문의 ‘의미수반 발화행위’가 기대하는 ‘효과수반 발화행위’에 충실한 설교학적 페르소나에서는 기존의 사랑 노랫말도 하나님의 경작 방식을 통해 자신의 마음 밭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변화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구원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신앙고백의 진솔한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시청한 기독교인이라면 ‘이산’과 ‘성덕임’의 사건 가운데 신학자 헤라르뒤스 판 델 레이우가 말한 ‘가장 오래된 드라마, 곧 세계를 지배하는 드라마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드라마’라는 표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며 “더 이상 그 드라마의 OST는 왕과 시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덕현 교수는 “설교자가 곡조 있는 예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신학적 명제에 담긴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교리에 담긴 은혜가 표현된 순간”이라며 “교리의 근본이 된 말씀의 운동에너지가 은혜라는 열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열에너지가 설교자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기에, 증인이 시인 되고 증언이 노래가 된다. 설교의 예화에 곡조(曲調)가 담기고, 이때 청중은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광대’라고 말한 성 프란시스의 설교는 들짐승과 새들까지도 그의 설교에 집중했다지만, 정작 그의 언어는 시장 언어가 많았다”며 “노래 역시 평민들이 익숙하게 알던 당시 민요에 복음적 내용을 담아 찬양도 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심각하게 서로 반목하던 주교와 아시시의 영주가 노래하며 춤추는 성 프란시스의 광대 설교 후 극적으로 화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소개했다.

현대 설교학 사전에서 성 프랜시스의 소위 ‘광대 설교’는 “복음을 선포할 때 제스처와 상징적 행동을 사용함으로써, 프란시스의 설교는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아 메시지가 청중의 마음을 관통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청중의 전 인격체가 메시지와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게끔 하였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끝으로 “저는 글로만 배우고 연구했던 프란시스의 설교적 페르소나가 목사님의 설교 시연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하고 싶다”며 “목사님의 설교적 페르소나가 코로나의 겨울 가운데 다시금 한국교회 부흥의 전설을 정월대보름의 들불처럼 번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소강석 목사가 소개한 김덕현 교수의 글 전문.

남진 소강석
▲과거 남진 장로 콘서트에서 축사하는 소강석 목사. ⓒ크투 DB
목사님, 최근에 목사님의 설교와 관련되어 온라인상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내용은 목사님의 설교가 본문 말씀만 전하는 강해 설교가 아니며 설교 중 대중가요만 부르는 경박스러운 설교라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설교학의 기준들을 가지고 현재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는 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일반적인 목사님들은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의 우아함이나 품격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세련되게 전달하는 모습이 한국교회 설교자의 모습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설교학 교수로서 생각해 볼 때 소강석 목사님의 설교적 페르소나가 추구하는 풍성하고 다양하며, 역사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현대 사회와 소통 가능한 설교학적 가치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이 짧은 이메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목사님의 설교는 강해 설교가 아니라는 주장과 설교 중 사용되는 곡조 있는 예화로써 대중가요를 개사해서 부르는 것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강해 설교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목사님이 이해하신 강해 설교의 의미는 설교학에서 말하는 강해적 설교와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칼빈이 말하는 설교의 강해성이 본문에 담긴 의미의 내용이나 ‘빅 아이디어’ 혹은 신학적 주제가 설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칼빈의 성경해석을 너무나도 좁게 이해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성경해석과 관련되어 칼빈 이전의 종교개혁자들은 명제 중심적이었고 칼빈 이후의 종교개혁자들은 지나치리만큼 상황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기록된 말씀의 내용과 성령의 내적 증거를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음으로 진정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한 것입니다. 이 같은 칼빈의 이해는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어떤 도전을 줄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설교자가 사용한 방법론에 따라 추출된 ‘빅 아이디어’나 ‘핵심 문장’을 기본으로 해서 강의적(講義的)인 설교를 준비할 수도 있지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어 사건이 실행하는 강해적(講解的) 설교는 그 말씀이 가진 운동력의 궤적을 가지고 설교자가 강해적 행위를 준비하는 과정 동안 설교자를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인 성령님의 의도가 강해되어 드러났다면 설교자의 마음은 뜨거워집니다. 이 같은 현상은 지극히 성경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설교학자며 조직신학자인 조엘 R 비키(Joel R. Beeke)는 자신의 40년 설교의 경험을 가지고 집필에만 20년의 세월을 사용한 《개혁주의 설교(Reformed Preaching)》 책의 내용을 통해 강해적 설교는 설교자의 마음에서 회중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명확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성경 강해 과정을 통해서 성령을 경험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에 담긴 내용을 논리와 명제의 옷을 입은 글로 진술한다면 그것은 아직 주석 작업입니다. 그러나 설교란 그 주석한 내용과 함께 그 과정 가운데 성령이 변화시킨 설교자 마음의 내용, 감정의 변화, 언어의 온도가 시공간 가운데 펼쳐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빙크는 100년전 캄쁜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할 때 설교를 하나의 연극 행동이라고 말하고 가르쳤습니다. 바빙크는 설교단은 학교의 강단이 아니며 교회는 학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빙크에 의하면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을 성도가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 저의 설교학적 사견은 설교 가운데 곡조 있는 예화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곡조 없는 예화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차이입니다. 곡조 있는 예화 사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설교자의 페르소나 구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개혁주의 예배 전통 가운데 프랑스어 운율을 살려서 번역한 가사에 대중적인 곡조를 담은 사투리 찬송가인 주네브 시편가(Psautier de Genève)라고 있습니다. 익숙한 곡조의 주네브 시편가는 1540년대부터 이미 주네브 개혁교회의 예배를 위한 공식 찬송가집으로 사용되었고 대중적인 곡조로 지어 교회 밖에서도 대중적 인기를 가졌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대중적인 곡조에 성경의 가사를 담아 찬송가를 만들 것을 지도하고 추진한 분이 바로 칼빈입니다.

최근에 유행한 대중가요 가사 중에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원곡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이지만. 그러나 본문의 ‘의미수반 발화행위’가 기대하는 ‘효과수반 발화행위’에 충실한 설교학적 페르소나에서는 기존의 사랑의 노랫말도 하나님의 경작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의 밭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변화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구원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신앙고백의 진솔한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아니 “옷소매 붉은 끝동” 이란 드라마를 시청한 기독교인이라면 ‘이산’과 ‘성덕임’의 사건 가운데 신학자 “헤라르뒤스 판 델 레이우”가 말한 “가장 오래된 드라마, 곧 세계를 지배하는 드라마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드라마다”라는 표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더 이상 그 드라마의 OST는 왕과 시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곡조 있는 예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신학적 명제에 담긴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리에 담긴 은혜가 표현된 순간입니다. 교리의 근본이 된 말씀의 운동에너지가 은혜라는 열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열에너지가 설교자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기에 증인이 시인되고 증언이 노래가 됩니다. 설교의 예화에 곡조(曲調)가 담기며 이때 청중은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설교학사(史) 가운데 전설 같은 내용이지만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광대라고 말한 성 프란시스의 설교는 들짐승과 새들까지도 그의 설교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언어는 시장 언어가 많았습니다. 노래 역시 평민들이 익숙하게 알던 당시 민요에 복음적 내용을 담아서 찬양도 하고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서로 반목하고 있던 주교와 아시시의 영주가 노래하며 춤추는 성 프란시스의 광대 설교 후 극적으로 화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전해집니다.

현대 설교학 사전에서 그의 광대설교를 “복음을 선포할 때 제스처와 상징적인 행동을 사용함으로써 프란시스의 설교는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아서 메시지가 청중의 마음을 관통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로 청중의 전 인격체가 메시지와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게끔 하였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글로만 배우고 연구했던 프란시스의 설교적 페르소나가 목사님의 설교 시연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적 페르소나가 코로나의 겨울 가운데 다시금 한국교회의 부흥의 전설을 정월대보름의 들불처럼 번지길 기대합니다. 이 후 관련된 내용이 한 권 책으로 완성되면 꼭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