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부패하면 이단과 사이비 기독교가 성행
중세 교회, 종교재판 강압적 방법 동원해 탄압
복음적 신앙 가진 왈도파까지 이단 몰아 처단
서방 교회 외형적 승리, 진정한 승리 인정 않아

왈도파들의 신학교. ⓒ한평우 목사
▲왈도파들의 신학교. ⓒ크투 DB
6. 왈도파 교회

리옹의 빈자들―왈도파 신앙인들은 이단으로 정죄당한 뒤 독자적인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왈도가 죽은 뒤 여러 지역에 산재한 왈도파 신앙인들은 비공식적 교류를 갖는 형태의 공동체(Council)를 유지하다 협회(Societies)라고 하는 교회 조직을 탄생시켰다. 매조랄(Majoral)이라는 치리 기구를 만들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이 교황에게 순종하듯, 리옹의 빈자들은 이 치리 기구의 결정에 순종했다. 어떤 지역 교회는 집사, 장로, 감독을 세웠다. 신자들은 상급자에게 순종했으며, 강한 형제의식(fraternity)을 가졌다.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불렀고, 설교를 듣는 평범한 사람들을 ‘친구, 신자(believer)’라고 불렀다. 자기 집에서 지도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설교를 들었다. 드러나지 않게 비밀리 집회 장소에 숨어들었다. 이곳저곳으로 지도자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왈도파 교회가 급속히 증가하고 로마 교회 신자였다가 왈도파 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많아졌다. 이 현상은 그 시대 사람들의 로마 교회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원시적인 기독교 신앙의 회복, 변화,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하층계급 대중에게 번졌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설교활동, 삶의 방식, 신앙관습은 중세 말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남부 프랑스에, 그 다음에는 독일, 알프스, 롬바르디 지방으로 퍼졌다.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스페인으로 확산되었다.

로마 교회가 왈도파 전도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고 카타리파를 징벌하는 방법으로 신자들을 죽이고 심하게 박해하는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의 왈도파 신도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왈도파 신앙운동에 가담하고 성경에 부합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랑스 왈도파 신앙 운동은 알프스 산 계곡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곳은 지역 특성 때문에 한동안 박해의 피해를 적게 받고 안전한 신앙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알프스 지역에서 제한적 자유를 누리던 왈도파 신앙인들은 템플(Temple)이라고 일컫는 교회당들을 세웠다.

왈도파 신앙인들이 박해를 피해 군사들의 접근이 어려운 알프스 산 피드몬트 계곡으로 피난하여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 그곳에 거주하는 자들이 전도를 받아 왈도파 구성원이 되었다. 일부 지식인 왈도파 신앙인들이 그곳에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남부 이단자들은 십자군의 창칼을 피할 수 없었다. 1316년에 이르러 왈도파 신앙인들이 종신형을 언도받았고, 또 다른 신도는 화형을 당했다. 3년 뒤에는 세 명이 종신형에 처해지고, 또 다른 세 명이 화형을 당했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때(1545)에는 프로방스 의회의 명령으로 프랑스 왈도파 무리가 거주하는 22개 촌락이 약탈당하고 화염에 휩싸였다.

왈도파 후손들은 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위스의 산골들은 자주 피로 물들었다. 프랑스에서 피드몬트 산 지역 신앙인들은 한동안 박해를 받지 않고 지내다가 추방당했다(1209). 벌금형 처벌을 받았다(1220). 화형 처벌을 받기도 했다(1312).

교황은 십자군 군사 1만 8천 명을 피드몬트 산에 파송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왈도파 신앙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더 안전한 지대를 찾아 더 높은 알프스 산 계곡으로 올라갔다.

왈도파 중세 수도원 회랑 cloister 유럽 가톨릭
▲중세 한 수도원 회랑 모습. ⓒ픽사베이
영국의 저명한 시인 존 밀턴(1608-1674)은 그 시기에 교회가 자행한 왈도파 기독인들에 대한 극악무도한 박해를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주여 학살당하는 당신의 성도들을 위해 복수하소서.
저들의 뼈가 추운 알프스 산맥에 널려 있나이다.”

왈도파 신앙인들이 순교하는 영광스러운 장면은 오스트리아 지방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적어도 50개의 왈도파 공동체가 거기에 있었고, 많은 학교들이 있었다. 왈도파 교회 감독 노이 마이스터는 많은 성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1315).

왈도파 신앙인들은 8만 명이 넘었다. 도미니크 수도단과 프란치스코 수도단은 종교 재판관을 보헤미아와 폴란드로 파견하여 그 지역 교회 당국자들을 도와 왈도파를 진압했다(1318). 당시 보헤미아는 왈도파의 중심 지역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시인 존 휘티어가 쓴 ‘왈도파 교사’라는 시는 14세기 파사우의 익명의 저자가 남긴 글을 토대로 지은 것이다.

휘티어는 왈도파 신앙인들이 귀족의 저택을 찾아다니면서 최상급 보석들과 좋은 물건들을 내민 다음,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석을 보여주겠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왈도파 사람들은 정직하고 근면하고 냉철했고, 맹세하지 않았고, 거짓이 없었다고 한다.

왈도파 후예들은 나폴레옹의 통치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16세기 독일과 스위스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개혁교회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남부 독일의 종교개혁 운동과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가톨릭 교회를 거부하고, 예정론 교리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을 받아들였다. 설교자―전도자의 결혼 생활을 인정했다.

중세 시대의 끝자락에 태동한 리옹의 빈자들, 곧 왈도파 신앙운동은 상당히 큰 영향력을 지녔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신앙운동을 받아들였다. 독일 지역 왈도파 사람들은 교회 박해에 강력히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

보헤미아 지역 사람들은 얀 후스의 추종자 일파인 후스파 사람들과 친분을 가졌다. 후스파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신학서적을 읽고, 번역하고, 요약하여 산재한 리옹의 빈자들, 왈도파 공동체에 보급했다.

그 안에는 연옥 교리와 결혼에 대한 로마 교회의 그릇된 가르침을 교정하는 내용과 타볼파 사람들의 신앙고백에 관한 긍정적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헤미아 지역의 왈도파 신앙인들과 후스파는 15세기에 이르러 ‘왈도-후스파 연합’ 기구를 탄생시켰다. 1555년에서 1560년 사이 알프스 산맥에 있던 공동체는 제네바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합류했다.

프랑스 왈도파 신앙인들은 위그노파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독일의 왈도파 신앙인들은 보헤미아의 독일어권 공동체로 유입되었다가, 1420년대에 발생한 후스의 종교개혁과 겹치면서 점차 사라졌다.

독일 왈도파 신앙인들은 순교자 얀 후스의 신앙 후예들인 타볼파 형제단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520년대 후반 알프스 산맥의 왈도파 신앙인들은 개혁교회 전통에 관심을 보였다. 초기 종교개혁 신학자들은 왈도파 교회를 모범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간주했다.

왈도파 교회는 기독교 역사의 분수령인 16세기 종교개혁을 넘어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현재 약 2만 명이 왈도파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왈도파 교회의 색깔도 변했다. 안타깝게도 초기 공동체의 철저한 정통신앙, 개혁정신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 설교활동을 찾아볼 수 없다.

피터 왈도
▲독일 보름스 루터 기념공원 속 피터 왈도의 동상.
1. 성경적 근거로 교회의 독립성 적극 변증
2. 성경 권위 존중과 평신도 대상 성경 교육
3. 평신도들 설교 권한 확보
4. 여성들도 가르치고 전도
5. 교회가 아니라 복음전도자가 사역 주체

왈도파 신앙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은 고귀하다. 첫째,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교회의 독립성을 적극 변증했다. 성경과 일상행위로 자신들의 활동이 옳음을 판단하도록 했다.

둘째, 성경의 권위와 평신도 대상의 성경교육은 성경을 살아 있는 책이 되게 했다. 자국어 성경 번역운동을 자극했다. 성경보급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게 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전체를 완전히 암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셋째, 평신도들이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자 했다. 교회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굽히지 않고 길거리, 집, 교회에서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넷째, 여자들도 가르치고 전도했다. “늙은 여자로 …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게 하라(딛 2:3)”를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사역은 공식적인 설교가 아니라 가르치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다섯째, 이 땅에서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은 교회라는 조직체가 아니라 복음전도자라고 확신했다. 범죄한 사제가 세례를 베푸는 것을 부당하게 보는 반면, 경건한 왈도파 평신도의 성찬 집례를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카타리파는 왈도파 시대에 알려진 이단이다. 종종 알비파로 알려진다. 알비파는 이원론적 사상에 기초한 카타리파의 다른 명칭이다. 그들 가운데 알비-카타르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왈도파로 개종했다고 알려진다.

이 주장은 프랑스 학계가 알비파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프랑스 개혁교회가 그들을 자신들의 신앙 선조로 수용한다는 것을 근거를 삼는다.

맺음말: 고귀한 교훈에 귀 기울이라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 북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왈도파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이는 도미니크와 프란치스코가 롬바르디의 빈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각각 독자적인 탁발수도단을 설립했다는 통설을 뒤집는다.

당시 사도적 빈곤의 실천이라는 이상은 널리 퍼져 있었으며, 리옹의 빈자들과 이탈리아의 왈도파 신앙인들이 사실상 반세기 전부터 그러한 정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이 사실 곧 프랜시스가 왈도파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았어도 자신들의 탁발수도 사역의 의미가 반감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왈도파 동굴
▲왈도파들이 비밀리에 예배 처소로 삼았던 천연 동굴 입구. ⓒ크투 DB
왈도파 신앙운동이 13세기에 남긴 문헌들 가운데 성경 프랑스어 번역판 다음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479행으로 구성된 종교 시(Nola Leyczon)이다. “형제들이여 고귀한 교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고, 인간 타락이 극에 달했고, 노아가 건짐을 받았음을 읊조린다.

또한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났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간 뒤 모세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율법을 가르쳤으며 가난한 자의 길을 걸었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시 살아났음을 말한다. 이 시는 최후 심판, 정경, 회개에 대한 권고로 마감한다.

수도원 운동의 열기와 맥박은 용사들의 시대에 이르러 수도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리옹의 빈자들, 왈도파 신앙운동은 가난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는 갈망을 가난한 자들의 방법으로 세상에 표출시켰다. 이 갈망은 교회 개혁을 향한 영적인 빛이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중세기판 선지자들의 외침이었다.

진리의 기둥인 교회의 권좌에는 정죄당해야 할 자들이 앉아 있었다. 죄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자들, 재(災) 위에 앉아 눈물로 회개해야 할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심문관의 자리에 앉아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고 이단 정죄를 하고 있었다.

성경적 신앙을 가진 선량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적반하장, 패륜아적 행패는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새 신앙운동은 수직적 서열과 위계 의식에 기초한 봉건적 사회 구조에 대한 항거였다. 서로를 평등하게 결합시킨 수평적 연대의식의 발현이었다. 용사들의 시대가 제공한 비평적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안의 계급주의와 교권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했다.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거나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교회가 활기를 상실했거나, 복음진리를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았거나, 교회답지 않은 상태였음을 뜻한다. 교회가 부패하면 이단과 사이비 기독교가 성행한다.

교회는 칼을 쥐고 있었다. 용사들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종교재판이라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신앙 표현을 뿌리채 뽑고자 했다.

복음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왈도파 신앙인들까지 이단으로 몰아 처단했다. 서방교회는 이단들을 진압하고 외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이것을 진정한 승리라고 기술하지 않는다.

사도시대 유형의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한 왈도파 신앙운동은 유럽인들에게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게 했다.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성경적 신앙운동에 불멸의 귀감이 되었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존재, 주장, 활동은 중세 유럽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자극했다. 리용의 빈자들이 펼친 신앙운동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여명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역사가는 없을 듯하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