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수도사 훈련은 성경 중심… 하루 7회 예배도
성경 해석에 음률과 곡조 붙여 전수, 고유한 특징
황실 정략 결혼 그리스도인 황후, 교회 보호 힘써

동방수도사 서유기+그리스도교 동유기
▲곽계일 교수가 강연하는 모습.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2천 년 전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아시아 대신 서쪽인 유럽으로 건너가 그들을 도왔지만,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떠난 제자도 있었다. 사도 도마는 전승에 따르면 인도까지 가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

《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는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출발해 서방 헬라 전통을 거쳐 서방 라틴 전통을 경험한 세계 그리스도교인 사우마와 마르코스 두 몽골인 수도사를 통해,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예루살렘에서 대도로 전파된 ‘실크로드’를 보여준다.

특히 저자 곽계일 교수는 ‘그리스도교 동유기’를 통해 수많은 역경에도 신앙을 전파하고 전수했던 동방 교회 수도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 샤한샤의 크테시폰부터 아랍 압바스 왕조 칼리프의 바그다드를 거쳐 몽골 일 왕조 칸의 마라가까지, 총대주교는 언제나 세속 최고 통치자의 도시에 거주할 정도로 세속과 성직을 오가며 활동했다.

동방 시리아 교회의 모든 수도사가 주교는 아니었지만, 8세기 말 이후 모든 주교는 수도사였다. 동방 교회의 모든 수도원이 신학교는 아니었지만, 모든 신학교는 수도원과 관련이 있었다. 또 신학교장을 뜻하는 ‘랍반’은 수도원장을 높이는 존칭이었고, 동방 기독교의 수도원과 신학교는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였다.

파란만장한 동방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저자는 포스트 코로나와 포트스모더니즘을 당면한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말한다. “13세기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가 또다시 땅끝으로 흩어지게 된 그리스도교가 재차 확인한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태생적 존재 방식, 곧 일치된 주지에서 다양한 미지로 나아가며, 미지를 통해 주지를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존재 방식이었다.”

저자 곽계일 교수는 서울 고려대학교에서 생명환경대학(B.A.)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비블리컬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M.Div.)를, 필라델피아 루터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S.T.M.)와 교부학 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부 시대 성경해석 역사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기원부터 사도 전통에 내재된 일치성과 다양성 사이 역학 관계를 성경과 성례, 그리고 신경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현재 미국 조지아 센트럴 대학교 부교수로 재직하며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은 인터뷰 2편.

-동방 수도사들의 훈련 중점과 특징은 어떠했나요. 서방 수도사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었나요.

“동방 시리아 교회의 수도사들이 받은 훈련은 단연코 성경 중심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최고 수도사(즉 수도원장)에게 붙는 존칭이 ‘랍반’이었는데, 이 존칭은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이었습니다.

랍반의 또 다른 기본 직무는 성경 해석으로부터 끌어낸 신학적 가르침을 (‘메므레’라는 시리아 전통 음률에 따라) 찬송 시가로 지어 제자 수도사들에게 전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찬송 시가를 부르며 성경의 시편 말씀을 통해 기도하는 현장은 다름아닌 예배였습니다.

7세기 초반부터 동방 시리아 교회 수도사들은 하루에 7차례 공동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 7차례 예배를 통해 날마다 시편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읊조리며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예배를 끝으로 공식 일과가 끝나고 개인 (혹은 3-5명의 공동) 수도실로 돌아가면, 매일 밤 시편 전체의 1/3 분량을 가지고 (3일 밤마다 한 번씩 시편 전체를) 추가 기도했습니다. 동방 수도사들은 자연스럽게 예배 인도자로서 훈련받았기에, 주교로 안수받아 지역 교회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9세기 수도사 키프리안의 발자취는 동방 수도사들이 받은 훈련 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예시입니다. 그는 고향의 지역 교회에서 시편과 기본 신앙을 교육받았습니다. 그리고 지역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가 성경 해석, 찬송 시가, 교회법, 그리고 전례에 관해 공부하였습니다.

졸업 후 그는 머리에 복음서를 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 팔레스티나 곳곳과 예루살렘을 순례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시내 광야와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나일강 일대 광야에서 수도원을 돌며 공(公)수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 지중해 연안의 외딴 섬에 들어가 쉼 없이 시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독(獨)수도 하였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40여년 동안 순례와 공수도 그리고 독수도를 마친 그는 기도 중 본 환상을 따라 (현재 이라크) 마르가 지역에 이르러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장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성경 해석에 음률과 곡조를 붙인 시가 형태로 신학을 전수받고 전수하는 방식은 서방과 단연 구분되는 동방 시리아 수도원 (그리고 교회) 전통의 가장 고유한 특징이 됩니다.

이 외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공수도와 독수도를 병행하는 방식, 그리고 최고의 랍반을 찾아 수도원을 옮겨 다니는 방식, 그리고 종국에는 자기 스스로 랍반이 되어 수도원을 개척하고 제자들을 모으는 방식 또한 서방과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이에 반해 서방 라틴 전통의 수도사들은 개별 ‘수도원’보다 로마 교황이 인가한 ‘수도회’ 중심으로 훈련받으면서, 특정 수도회에 한 번 그리고 평생 정착하는 전통을 형성합니다.”

동방수도사 서유기+그리스도교 동유기
-책에 나오는 사우마와 마르코스 외에 이스라엘 지역으로 순례를 떠난 수도사들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유럽 교회에서는 시리아와 중국 등 동방 교회의 존재를 전혀 몰랐을까요.

“사우마와 마르코스에 앞서 예루살렘 및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순례를 떠난 몽골 출신 그리스도교 수도사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제가 아는) 현존 문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두 수도사는 대도(베이징)에서 출발할 때 쿠빌라이 대칸으로부터, 몽골인이 다스리는 땅 어디나 통과할 수 있는 통행 패를 받았습니다. 다음 기착지였던 (마르코스의 출신지) 온구트를 지나가는 길에 만난 지역 통치자는 극구 부인하는 수도사들에게 억지로라도 여행 경비를 챙겨주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개인이 빈손과 두 다리로만 갈 수 없는 길, 그러니까 경험 많은 상단이든 아니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군벌 세력이든 여러 집단의 협조와 도움을 받아야 갈 수 있는 멀고도 불안정한 길이었습니다.

이들에 앞서 역방향으로 예루살렘을 거쳐 대도로 갔던 (마르코 폴로를 포함한) 폴로 가문 상단 역시, 쿠빌라이 대칸이 성묘 교회에서 얻어달라고 부탁한 성유(聖油)를 (대칸의 통행 패와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13세기 말, 당시 대도와 예루살렘 사이를 왕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불특정 개인이 아닌 특정 세력으로부터 비호와 관리를 받는 공인들이었습니다. 공인들의 출입과 여행은 문서로 기록이 남았을 것입니다.

대칸 쿠빌라이에게 바칠 성유를 가지고 대도로 간 폴로 가문의 상단은 또한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파송한 특사이기도 했습니다. 마르코 폴로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도 동방 시리아 교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2세기 초부터, 더 구체적으로 2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려는 시점부터 유럽 사회의 소문 속에 등장한, 동방 시리아 교회의 사제이면서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왕 요한을 찾고 있었습니다. 서방의 십자군과 동방의 사제 왕 요한의 군대가 연합하여 무슬림들로부터 성지를 탈환할 거라는 묵시론적 기대 속에, 서방 교회는 12세기 초부터 수도사들을 동방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4-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과 더불어 로마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의 충돌로 말미암아 단절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관계는, 7세기부터 등장해 중간 지대를 차지해 버린 이슬람 세력으로 말미암아 단절 상태가 고착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지속적인 팽창은 서방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는 발단이 되었고,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이 예루살렘을 향해 동진하면서 비로소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과 접촉과 교류가 재개되는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원나라가 교회와 주교를 존중하고 대우하는 장면도 놀랍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고, 여태까지 역사학계에서 이런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 태조 테무진(칭기즈 칸)의 사상 속 몽골은 혈통에 기반한 민족이 아니라, 지역과 출신 그리고 종교에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충성 맹세에 기반한 새로운 개념의 민족이었습니다. 그의 사상 위에 세워진 원나라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서 여러 종교를 포용했습니다.

원나라에 흡수된 튀르크계 부족 국가 중에는 (수도사 마르코스의 출신) 온구트처럼 그리스도교를 주류 신앙으로 따르는 부족도 있었습니다. 주변 부족의 왕족 출신 딸과 대칸이 정략 결혼하는 관례를 따라 황실에 들어간 그리스도인 황후들을 통해, 교회는 보호받고 성장할 여건을 맞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의 영토 확장이 북중국에서 남중국으로, 그리고 분봉 칸 국들을 통해 서방으로 확장되면서, 유목 민족으로서 다양한 정착 민족들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지배 체제가 뒤따라야 했습니다. 그런 필요를 채워준 현지 출신의 고급 인력 속에 이전부터 페르시아 왕조와 아랍 왕조를 도운바 있던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었습니다.

게다가 몽골의 서진을 막고 있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를 넘어서기 위해 유럽 십자군 군대와 연합을 모색하던 상황에서,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요긴한 연결고리였습니다.

원나라에서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이 차지했던 사회적 위치를 알려주는 신뢰할 만한 지표가 있다면, 황실 중앙 부처인 종부사(崇福司)와 지방 부처인 장교사(掌教)의 설립입니다. 쿠빌라이 대칸이 통치하던 1289에 처음 설립된 이들 부처는 그리스도교와 관련한 제반 업무를 전담했습니다.

장교사는 원나라 전역에 걸쳐 지정된 72개소의 지역 교회 안에 설립되었습니다. 1315년 종부사는 종부원(崇福院)으로 승격하지만, 그 이면에 장교사 폐쇄라는 그림자를 남깁니다.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의 활력이 원나라 전역에서 황실 중심으로 위축된 증거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 추측으로 원나라의 그리스도교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근본 원인은, 그 뿌리 된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과 직접 관련 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중국 역사를 한족 중심으로 연구하는 역사관도 이유가 됩니다. 원나라의 동방 그리스도교 역사는 비주류와 비주류의 조합인 셈입니다.”

동방수도사 서유기+그리스도교 동유기
▲랍반 사우마가 동방 시리아 교회 전통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 로마와 파리까지 이동한 경로(1287-1288). ⓒ곽계일 교수(지도의 무단 복사를 금합니다)
동방 그리스도교, 각 문명권 적응하며 끈질긴 생존
한국, 그리스도교 동방 전통 상황 속 서방 전통 수용
동방 교회라는 낯선 타자 통해 스스로 정체성 찾길
그리스도교 역사 속 낯선 이들 계속 헤매고 다닐 것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동방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신앙적 교훈이 있을까요.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4-5세기부터 18-19세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을 거치며 단일 문명권 위에서 지배하고 관리하는 자세가 축적된 전통입니다. 반면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같은 시간 동안 여러 문명권 아래서 부단히 적응하고 끈질기게 생존하는 자세가 축적된 전통입니다.

한국교회는 동방 전통이 처한 상황 속에서 서방 전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그리스도교가 지배 사상이 아닌 환경을 지배하고 관리하려는 자세를, 어떤 면에서는 변혁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현실 도피적인 자세를 보여왔습니다.

최근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본토에서조차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해야 하는 시대를 맞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서방 전통이 이제 배우고 있는 자세는 다름 아닌, 동방 전통이 비교할 수 없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해온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서방 전통의 수혜자인 한국교회 역시, 같은 아시아 동네에서 오래 살아왔음에도 미지의 이웃으로 지내온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을 향해 이제는 인사라도 건네고 아는 체라도 해보면 어떨까요? 낯선 이웃을 만나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적합한 장소로 《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지 선정 ‘2021 올해의 책’에 교수님께서 쓰신 《동방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가 선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감과 독자들에 대한 격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유의할 점을 부탁드립니다.

“표지부터 일부러 드러나지 않은 색깔로 입힌 이 책을 찾아내 선정해 주신 크리스천투데이에 깊이 감사합니다. 감은사 이영욱 대표님 그리고 편집인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선정 소식을 듣고 ‘코로나 속 기독교 신앙의 본질 천착한 작품들’이란 선정 문구가 계속 뇌리에 맴돌며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 책이 신앙의 본질에 천착했다면, 천착한 본질의 일부는 ‘낯선 타자’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두 눈은 앞을 향해 있어 자기 모습조차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에 간접적으로 비춰보는 방법뿐입니다.

시리아 정교회
▲현재 시리아 정교회 주교단 모습. ⓒ위키
대학 졸업 후 첫 미국행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공항을 가득 채운 낯선 모습의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한국에서 살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저의 한국인 된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타자는 우리의 거울이기에, 타자 앞에 서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결국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궁극적 타자 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 교제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마주할 때도 비슷한 유익을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만남을 주선하고 싶은 타자가 있다면 동방 시리아 전통에 속했던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며, 또한 현재 이란과 이라크 등 중동 지역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그 후손들입니다.

이들과 마주할 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기 모습을 새로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주선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끝으로 교수님의 신앙적·학문적 여정을 소개해 주시고, 앞으로 목회 또는 연구 계획, 비전 등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낯선 이들을 찾아 그리스도교 역사라는 세계를 헤매 다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낯선 이들의 이야기를 계속 독자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은 3세기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교부들의 교부’로 불렸던 오리게네스와 관련된 이야기 두 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곧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루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