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  1
▲김형석 교수는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라며 “사랑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변명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떤가. 끝까지 정의만 따지며, 손해를 보려는 크리스천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송경호 기자

‘백 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103)는 윤동주 시인과 한 반에서 공부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직접 들었다. 1985년 연세대 정년퇴직 후에도 강연과 집필로 여전히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15년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등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백년을 살아보니>,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영원과 사랑의 대화> 등 과거 출간된 글들도 재조명받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등을 통해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 달에도 과거 썼던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를 개정해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펴냈다.

“참다운 신앙이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김형석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 자신의 신앙과 성경에 대한 이야기 등을 지난 1편에 이어 소개한다.

기독교, 공간·자연 종교 아닌 ‘역사 신앙’… ‘聖地’ 없어
책 인기? 똑같은 설교 아닌, 같은 인간 닥친 문제 써서
기독교인, 가치관 변해 ‘그리스도의 향기’ 발하는 사람

-철학 서적을 주로 내시다,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뒤 신앙 관련 서적을 쓰셨지요.

“1962년에 예수님의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보통 성지순례라고 하지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으로 갔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모습과 너무 반대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정교회 신부들이 그곳에 있는데, 신앙이랄 것은 없고 관광객에게서 돈 받는 일만 하고 있었어요.

쓸데없는 것도 많이 만들어 놨어요. 예수님 마지막 기도드리시던 감람산(올리브산)에 갔는데, 예수님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 발자국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있을 리가 없으니 안 봐도 괜찮다고 했는데, 함께 갔던 스페인 사람이 자꾸 가자고 그래요.

돌담 안 거룩하게 꾸민 곳에 들어갔더니, 바윗돌이 이만큼 채워져 있는데 예수님 발이 그렇게 컸을 리도 없고(웃음), 하여튼 가득 차 있었어요. 다행히 이스라엘 갈릴리 바다나 이쪽에는 국민 수준이 높으니 그런 건 없었어요.

며칠 다니고 떠나던 날 밤, 갈릴리 바닷가 옆 호텔 잔디밭에서 기도를 드렸어요. ‘성지라고 해서 오랫동안 사모하다 왔는데, 여기에는 어디에도 주님이 안 계십니다. 이것을 다녀가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 멀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기도를 드렸는데 마음 속에 들어온 음성이 ‘너는 왜 날 여기 와서 찾느냐? 이곳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지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 안의 고통받는 환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성지에 온 게 아니라 예수님의 고향에 왔구나.’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잖아요?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고,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이슬람교에는 뚜렷하게 성지가 있지요. 인도에서 종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슬람 사원 안에 마호메트의 머리카락이 있다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6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성지의 관념입니다. 불교에도 성지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성지가 없어요. 제가 이스라엘 여행 중 수가성에도 갔는데, ‘야곱의 우물’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 수가성 여인이 ‘예배를 어디서 드려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내 종교는 공간 종교가 아니다. 자연 종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때가 왔다’고 하는 역사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성지’라는 건 기독교에 마땅치 않습니다.”

-그리고 쓰신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의 개정판이 이번에 나온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두란노)>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비슷한 기간에 세 권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을 돌아봤으니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참고 자료 없이 사복음서를 읽으며 쓴 것이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 묵시록(계시록) 해석 때문에 기독교가 너무 말이 많아서 쓴 것이 <어떻게 믿을 것인가(이상 이와우)>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 ‘예수’가 내게서 ‘그리스도’로 변하는 것, 그 접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와 같은 인간 사회에서 사는 인간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중심으로 썼습니다. 이 책들이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는데, 지금은 세 권 모두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그때는 크리스천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목사님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보니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한 인간으로서 가진 문제를 ‘크리스천은 무엇을 믿는가’ 하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설교하듯 성경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하는 일들을 사회적인 면으로 정리했습니다.”

-책에 대한 반응을 들으신 것이 있나요.

“고교 시절 제자였다가 지금 미국 텍사스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아니었는데, 제가 연세대 교수 시절 편지를 보내왔어요. 편지를 잘 쓰지 않는 성격인데, 어떻게 보냈나 싶어 읽어 봤습니다.

한국 대학이라면 제자들과 인간관계도 갖고 보람도 느낄 텐데, 미국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니 학생들이 학점 받고 떠나면 그뿐이더래요. 그 사람들은 합리적이라 인간관계가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인사 하고도 한참씩 다시 보는데, 거기는 가까워도 싹 돌아서서 가요(웃음).

그래서 그 친구가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어 볼까 하고 안식년에 들어와서 1년 교환교수로 있다 갔는데, 휴스턴 한국 서점에서 우연히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을 발견하고, 관심은 없었지만 ‘은사님 책이니’ 하면서 읽게 됐대요. 읽다 보니 시간만 나면 읽게 됐고, 부인도 읽게 됐다고 합니다.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이, 미국에서 교수 생활한 것을 전에는 후회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신 뜻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미국 학생들을 정말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도움을 많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대요. 미국 교수들은 그렇지 않은데, 한국 교수가 학생들을 정말 사랑해 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미국에 왔다는 걸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의 부인도 남편 교수처럼 직장 생활 가운데 따뜻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다 보니, 직장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새 출발을 하게 돼 즐겁다는 편지였습니다. 생활의 가치관이 바뀐 것이지요.”

연세대학교 김형석 명예교수 3
▲김형석 교수는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인간과 인생의 뜻을 바르게 깨달으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을 얻는다”며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지혜를 주기에 소중하다”고 말했다. ⓒ송경호 기자

교리 달라도, 예수님의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사는 삶
예수님, 깨달음과 사명감과 가치관 변화 통해 오셨다
성경, 상징적·의미적·체험적 삼각형으로 이뤄진 역사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셨나요.

“지난 주일에 ‘예수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30분 동안 설교하면서 신앙고백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건강도 잃고 집도 가난해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이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 달 반 정도가 남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건강 때문에 중학교도 못 갈 줄 알았습니다. 어른들도 제가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꿈을 꾸셨는데, 제가 이렇게 앉아 있다가 하늘로 쑥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할머니께서 ‘올해 장손이 죽으려나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우시지 않으면, 제 인생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건강을 허락하셔서 중학교도 가고 다른 사람들처럼 어른 될 때까지 살면, 건강을 허락하시는 동안에 제 일 하지 않고 저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던 것과 비슷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가장 어린 마음, 순수한 마음이었지요. 그때는 50세도 못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크리스마스에 윤인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인가? 예수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열네 살짜리가 그걸 깨달을 수 없거든요. 예수님이 제게 오신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이제부터 저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잊었지만, ‘건강을 허락해 주시는 동안 하나님 일 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을 주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우리 어머님도 오래 사셨는데, ‘너 스무 살까지 사는 것만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습니다(웃음). 저보다 건강했던 친구 김태길·안병욱 선생도 구십 대가 되니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만 백세를 넘겼습니다.

안병욱 선생이 항상 하는 말이, ‘김 교수는 크리스천이라 우리보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르다고 말이지요. 저는 지금도 누가 건강한가를 따질 때, 같은 나이에 누가 일을 가장 많이 하는가를 봅니다. 그런데 제 나이에 저만큼 일 많이 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니까 제가 제일 건강한 셈입니다(웃음).”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과 더불어 그렇게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이후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의 감격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철이 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그때 밭을 가는 꿈을 꿨습니다. 그래서 평생 교육계에 몸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밭을 갈아놓으면, 씨 뿌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곡식이 자라 열매를 맺게 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요. 해방이 되고 교육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사명감을 갖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철학 공부를 하고 교육자로 살다 보니, 인생관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그대로 제 것이 됐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끼리는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볼 때는 자신들과 인생관이 달라 보였을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신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법이 달랐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시겠지만 대표적 원로이신 한경직(예장)·김재준(기장)·홍영선(감리) 목사님과 함께 지냈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학 후배, 정진석 추기경은 고교 시절 제자였습니다.

그 분들과 이야기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니까 다 똑같습니다. 교리적인 건 다르지만, 신앙의 근본은 같습니다. 무슨 문제나 일이 생기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실까?’ 그렇게 생각하고 삽니다.

6.25 전쟁 때 부산 피란 갔다 다시 올라와 서울역에 내렸는데, 지게꾼들이 줄을 서서 내리는 사람들의 짐을 내려줬습니다. 그때 ‘나도 앞으로 주님의 지게꾼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지게꾼은 주인이 맡겨준 짐만 나르면 됩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열네 살 때 가졌던 생각과 같이, 주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리하면 처음엔 깨달음을 통해 오셨고, 다음엔 사명감을 위해 오셨고, 셋째로 인생관과 가치관을 통해 오셨습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이 ‘무슨 목적을 갖고 살 것인가?’입니다.

세상에서 목적이 있어서 죽은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목적이 있어 태어난 사람도 없고, 목적을 갖고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게 순교자입니다. 무슨 목적을 갖고 인생을 마무리할까 생각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씀은 교회보다는 한 사회인과 인간으로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도 쓰셨습니다. 인문학이나 철학을 강조하는 분들은 왠지 신앙이 약하고, 신앙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분들은 지성적인 부분이나 사회 개혁 등에 관심이 덜합니다. 둘 사이 어떻게 하면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성경을 읽는 태도가 조금 달라집니다. 인문학이란 역사, 문학, 철학 이 세가지인데, 이런 학문을 한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주셨다’고 하기보단 지성인으로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비판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세상 떠나시기 전, 정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요? 그랬다면 먼저 마가복음과 마태·누가 복음에 기록이 있어야 할텐데,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세 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전체 구성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긴 것은 아니지만, 요한의 후대에 은총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느낀 후 소설을 쓰듯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적으로만 읽는 사람은 ‘발을 씻기신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적이지만은 신앙이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만약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주님 제 발 좀 씻어 주실랍니까’ 하면 ‘필요하면 씻겨주겠다’고 하셨으리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징적 의미에서 역사가 나옵니다. 역사가 나오면, 그게 또 신앙의 길이 됩니다.

성경은 상징적·의미적·체험적, 삼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체험적인 것이 있고, 또 하나 비유와 상징이 차지하고, 다음에 예수의 말씀까지 함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음식 먹는 이야기 등을 많이 합니다. 그건 그 시대의 상황적인 문제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여기서 인문학을 한 사람들은 상황적인 건 빼고, 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입니다.

김형석
▲김형석 교수의 최근 저서들.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예전에 동양철학 교수님이 오셨길래 성경을 읽어보라고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창세기를 쭉 읽더니 하는 말이, ‘이번에 성경을 처음 읽었는데, 종교 경전이라기보다 역사 책이군요’라고 했습니다. 동양 경전에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말만 나오는데, 구약을 읽어보니 지저분한 이야기들도 다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보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 종교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봐도 창세기부터 룻기까지 다 역사이고, 다음에 선지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약도 사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 다 역사이고, 다음에 사도들의 역사 기록입니다. 세계적으로 역사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역사책으로 보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질적인 것과 상황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싸우게 됩니다. 인문학은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하면, 신학보다 인간학에 가까워집니다.

또 하나는 저 같은 사람은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인간이 가진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보통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과만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같습니다. 때문에 기독교를 인간학적 위치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전통 신학적 위치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해에 하고 싶으신 일이나 사회적으로 바라는 일이 있으실까요.

“저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미래가 길지 않으니까요(웃음).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잘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저를 위한 생각이고, 우리 사회와 민족으로 봐서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 새로운 희망을 세상 사람들은 휴머니즘과 민주주의라고 봅니다. 우리 기독교적으로 보면 인간애와 자유이지요.

자유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실과 정의, 자유와 인간애가 무너지면 끝입니다. 새해에는 그걸 회복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