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 사후 평안까지, 뼈저린 관심 갖고 있나
목양, 출생 이전부터 죽음 후 사람들까지 대상
자녀들 신앙 교육과 교회 공동체 관계도 유익

하이패밀리
▲한 어린이가 정인이 수목장 앞에서 추모하며 꽃을 놓는 모습. ⓒ크투 DB
복지학에서는 인간의 태어남에서부터 무덤까지를 복지의 영역으로 본다. 그러면 목양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태어나기 전부터 낙원까지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부모들을 잘 양육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교회는 술과 담배를 삼가도록 권하고 있다. 담배를 왜 피우지 못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인간의 신체에는 굴뚝이 없다고 유머스럽게 답하기도 한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행동은 사람의 목 전체에 영향을 주고, 특히 임산부의 음주와 흡연은 태아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치고 있음을 자타가 다 알고 있다.

오십여 년간 목양을 해보았지만, 장례가 나면 장례예배에서 가장 슬프지 않는 사람이 목회자라고 하기도 한다. 직업인으로서, 예배 기술자로서, 장례예배를 집례하거나 인도할 수도 있다. 추운 겨울에 장례가 나거나, 더운 여름 휴가갈 때 장례가 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목양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명을 부르시면 시도 때도 없이 소천한다.

과연 저 성도나 직분자의 사후 평안까지 뼈저리게 관심 두는 목양자가 몇 명이나 될까? 장례로 인한 비용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성도들의 짐을 함께 지는 목양자가 얼마나 될까?

시신을 어디에 모실까? 그리고 육신이 한국의 티끌로 자연스럽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양자는 얼마나 될까?

지금은 매장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얼마 전만 하더라도 매장이 보편적이었다. 천주교 수사는 수맥을 보고, 심기에 명당자리를 잡아주는 신부도 있었다. 지금은 대다수가 화장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장례를 치르고 봉안을 한다.

기독교 초기에는 죽은 자와 산 자를 동일한 목양 대상으로 보았다. 카타콤(Catacombs)은 라틴어 ‘가운데’(Cata)와 무덤들(tumbas)의 합성어이다. 무덤들 가운데(among the tombs)라는 의미이다.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지하묘지이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여기로 들어가서 살았다. IXOCE는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이이소이스 크리스토스 쎄오이 이이오스 소티르)의 첫 글자를 따서 적은 표기가 카타콤베에서 발견되었다.

꽤 오래 전 미국 시골교회를 방문한 바 있다. 이미 오래된 교회라 갈대와 잡초가 예배당 마당을 덮고 있었고, 창문도 더러 깨져 있었다. 그 잡초 사이로 먼저 간 성도들의 무덤들이 즐비하였고, 예배당 구석진 곳에는 풍금이 있었다. 거미줄을 벗기고, 해묵은 먼지를 밀어내고, 덮개를 열어 보았다. 선명하게 적혀 있는 이름은 ‘록펠러’였다.

청교도들도 산 신자와 먼저 간 신자를 하나로 보고 목양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영생이고 보면, 당연히 그랬다.

필자 역시 새벽기도를 할 때 먼저 간 성도와 현재의 성도와 미래의 성도가 모두 보좌를 향하여 오늘도 영광을 돌리게 하여 달라고 매일 기도하며 목양을 하였다.

결국 목양은 태어나기 전부터 낙원에 간 자까지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장례예배는 시작만 있고, 끝도 없다고 본다. 결혼과 주례 역시 시작은 있고 끝은 없다. 결혼한 부부를 영원히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다. 현재 우리 교회가 섬기고 있는 복락원(봉안당)을 옮기기 위해 임야를 매입하기로 했다. 무심코 장로님 한 분이 “자기 지인이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한다”며, 교수에게 이 땅에 복락원을 지으려고 한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그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자리는 물이 많은 지역입니다. 만약 집을 지으면 흰색이나 나무색 건축물이 검게 변할 것입니다”라고 전해왔다.

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막상 들은 말이 있으니, 가서 산을 살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산꼭대기에 저수지가 있고, 논이 두 필지 있었다. 물이 많은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그 산을 포기한 적도 있다.

천주교의 신부님들이 철사 같은 봉을 들고 수맥을 찾아 좋은 터를 잡는 것도 보았다. 그 영혼은 떠나서 낙원에 가셨다. 그러나 그 시신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변화가 있으면 더욱 좋은 것 아닐까?

개신교 목양자들은 대다수가 장례예배만 드리고 끝이다. 이러한 목양이 ‘꽁지 빠진 꿩 같다’고 표현하기엔 부적절하지만, 그 또한 이미지는 남는다.

장례가 나면 상주와 함께 모실 곳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추모해야 할 사항까지 의논하면서 소천하신 분의 삶을 영생의 삶으로 보고, 영은 떠났지만 최선을 다하여 목양하는 것이 자녀들에게도 신앙 교육이 되고, 교회 공동체와 자녀들과의 관계도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장례에 관한 사업은 매우 복잡하고, 규격화나 투명화가 되지 않고 있다.

미국을 보면 장례 사업은 마피아가 맡고 있고, 묘지에까지 미국 시민을 에스코트하는 것은 경찰 오토바이가 한다. 목사님이 집례를 한다.

영생의 개념에 대한 보다 심오한 논리를 말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명당 찾아 모시자도 아니고, 그래야 복 받는다는 풍수지리설을 논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볼 때, 목양의 영역을 추모까지, 그리고 천국 가는 것까지도 목양 범위를 넓혀보자는 것이다.

지금은 매장(무덤을 파고 모시는 장례)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구라는 마을은 산 자를 위하여 있다. 그러므로 당연하다.

이젠 돌아가시면 수천 도의 불 속으로 상주들이 시신을 밀어 넣는 참혹한 경험을 하게 되고, 한 줌의 재를 항아리에 넣어 자녀에게 안겨주는 화장터에서 무슨 생각이 드는지 경험해 본 사람 외에는 모른다.

이러한 차가운 시대에 목양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목양 영역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윤대영 목사
▲ 윤대영 목사
윤대영 목사
목회상담도움협의회 대표
상담 문의: www.guwon.net
bjeil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