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죽음의 ‘생물학적’, ‘철학적 의미’보다는 ‘신학적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도 단지 ‘영혼 불멸’과 연관지어 ‘죽음’이 ‘최후적 종결’이나 ‘소멸’이 아니라는 점에 국한하고자 한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육체가 수한(壽限)을 다한 것이지만, 그것의 주인인 ‘영혼’은 육체를 떠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 ‘영혼 불멸’은 성경에 약속됐으며 ‘죄의 타락, 죽음, 구원, 영생, 재림, 부활, 천국’ 교리를 세우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만일 ‘영혼 불멸’이 부정된다면 그것들 역시 다 부정되며, 나중엔 결국 기독교 자체가 부정되고 유물론주의로 흐르게 된다. “육은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현대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2천 년 전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한(마 17:3) 사실도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의 육체는 당시를 기점으로 각각 900년, 1,400년 전에 이미 땅에 묻혔지만 그들 영혼은 살아 그곳에 현현했다.

◈영혼의 이동

‘죽음’은 ‘영혼’을 육체에서 떠나게 한다(혹은 ‘영혼’이 육체를 떠남으로 ‘죽음’이 일어난다). ‘육체’는 ‘영혼의 집’이어서 그것이 무너지면 영혼이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이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보는 히브리(Hebrew) 개념과 맞닿아 있다. 육체의 죽음으로, 영혼은 이제껏 자기가 거처로 삼았던 곳을 떠나(육체와 분리되어) 새로운 거처인 ‘낙원(paradise)’과 ‘음부(hell)’ 둘 중 한 곳으로 옮겨 간다.

이단 취급을 받는 서울 SR교회 김 모(某) 목사의 주장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영혼이 세상을 떠도는 것이 아니다(그의 주장은 유(儒)·불(佛)·도(道) 사상의 구천설(九天說)과 유사하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죽은 즉시 택자의 영혼은 ‘영생 천국’으로, 불택자의 영혼은 ‘영벌의 음부’로 옮겨진다(마 25:46).

사도 마태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그 영혼이 떠나시다(마 27:50)”라고 표현한 것은, ‘죽음’이 ‘육체와의 분리’임을 시사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은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2:43)”고 한 것 역시 육체를 떠난 그의 영혼의 갈 곳을 말씀한 것이다.

무엇보다 죽어 아브라함 품(낙원)에 안긴 거지 ‘나사로’와 음부에 떨어진 ‘부자’의 이야기(눅 16:22-24)는 사후(死後) 인간 영혼의 거처를 명백하게 알려준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닐 뿐더러, 영혼을 내세(來世)로 인도하는 진입로라 할 수 있다.

어떤 유명한 설교자가 ‘죽음’을 일컬어 ‘내세로의 문턱을 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지당하다. 특히 성도에겐 ‘죽음’이 그들이 희구하는 ‘지복(至福) 천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희구하는 천국을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죽음을 통해 들어간다. 이런 ‘죽음의 역설’이 그들로 하여금 ‘찬란한 천국의 진면목’을 놓치게 한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죽음 뒤에 숨은 ‘찬란한 천국’을 못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이 ‘천국에로의 유일한 통로’임을 알기에, 가장되게 부풀린 ‘죽음의 허상’에 마냥 속지만은 않는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의 기회’가 오면 마치 ‘복권 당첨(?)’이라도 된 듯 서로 앞 다투어 나섰던 것도, ‘순교의 영광’과 함께 ‘죽음의 지복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3)”는 말씀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반면 ‘육체의 죽음’이 ‘영원한 저주’가 되는 이들이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했다(마 26:24)”고 한 ‘가룟 유다’ 같은 이가 그들이다. 이들에겐 죽음으로 존재가 소멸돼 버리는 짐승이(전 3:21)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 죽음의 ‘이중성’과 ‘엄위함’을 느끼게 한다.

◈안식과 만남

성경은 ‘죽음’을 ‘수면(sleeping, 요 11:11, 고전 15:18, 20)’으로 표현했다. 이는 죽음이 ‘안식’임을 시사한 것이다. ‘생존경쟁, 온갖 질고와 세상 파고와의 싸움’을 그치고 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겐 ‘영·육(靈肉)의 싸움’이 종식됐다는 의미이다. 이젠 더 이상 그 싸움에 지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는 탄식 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죽음’이 안식이 아닌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계 14:11)’, 저주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에서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이들(막 9:48-49, 눅 16:23-25)’이 그들이다.

끝으로 성도들은 죽음으로 금생(今生)에선 ‘육체의 눈’을 감지만, 동시에 내생(來生)에선 ‘영의 눈’을 뜬다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죽음이 ‘육체의 감각’을 닫고 ‘영의 감각’을 열기 때문이다.

그 ‘영의 눈’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예수 그리스도와 앞서 간 성도들을 본다. 죽음으로 ‘금생의 사람들’과는 이별을 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 그것은 ‘이별과 만남의 교차점’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

어떤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매일 애틋하게 ‘수의(壽衣)’를 만지며 ‘주님 만날 때 입을 예복’이라고 했다 한다. 그에게 ‘죽음’은 오매불망 그리던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뿐이겠는가? 사도 바울도, 믿음의 선진들도 다 그랬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2, 8).”

“①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②구름 타고 올라가서 주님 앞에 절하고 온유하신 그 얼굴을 뵈올 때 있을 곳을 예비하신 크신 사랑 고마와 나의 주께 기쁜 찬송 드리리

③이 세상을 일찍 떠난 사랑하는 성도들 내가 올줄 고대하고 있겠네 저희들과 한소리로 찬송 부르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주를 뵈오리 ④영화롭게 시온성문 들어가서 다닐 때 흰옷 입고 황금길을 다니며 금 거문고 맞추어서 새노래를 부를 때 세상 고생 모두 잊어 버리리 (후렴)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찬 231장).”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